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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오광대

작품/자료명
통영오광대
지정여부
이기숙, 강영구, 강연호, 구영옥, 김옥연
구분
탈춤
흐름
오광대와 야류는 경남 일대에 분포된 영남형 탈춤의 하나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발생지는 초계 밤마리(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라고 하지만 발생지라고 하기보다는 중간 발전지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약 90여 년 전 시작되었다는 통영오광대는 처음 의흥계(義興契, 90여 년전)로서 유지되었고 그 다음은 난사계(蘭社契, 70여 년 전) 노인파들이었고 50여 년 전 장재봉이 29세 때 중년파로 춘흥계(春興契)를 시작하여 난사계의 오광대를 계승, 중흥시켰다. 16세기 통영에 수군통제사영(水軍統制使營)이 설치된 뒤부터 매해 섣달 그믐날 통제사 동헌에 들어 밤늦게까지 메구를 치고 탈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각 섬에서 소집되어 온 수군에 배치된 악공들 30여 명을 동원하여 섣달 28일 경부터 집사, 이방 등의 감독하에 연습하고 그믐날 메구행렬을 이루어 관가를 돌고 관가가 끝나면 민가를 돌며 정월 보름까지 메구를 쳤다고 한다. 이러한 연초의 메구는 궁중이 나례와 맞먹는 벽사의례의 하나였는데 주로 중광대탈이 앞장 서서 메구를 친 다음 중타령이나 염불과 천수경을 외우고 방안에 들어가 혼자서 귀신을 쫓기도 하였다고 한다. 수군통제영에는 취고수청(吹鼓手廳)과 교방(敎坊廳)이 있었고 그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악공조합은 따로 메구를 쳤다고 한다.
통영오광대의 구성 및 내용
통영오광대의 연출방식은 다른 오탈춤들과 거의 같지만 특히 꽹과리가 주도하는 장고와 북 등 타악기의 반주음악은 오광대와 야류에 쓰이는 지방적 특색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오광대와 야류의 춤은 모두 덧뵈기춤이라고 부르며, 특히 말뚝이춤은 건무(健舞)에 가까운 활발한 것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차차로 완만한 춤으로 약화되어왔다. 통영오광대의 각 과장별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첫째 마당(문둥탈): 문둥이가 소고를 들고 나와 춤을 추고 신세한탄을 한다. 조상들이 죄가 많아 불치의 병에 걸렸다고 한다. 양반 풍자와 문둥이의 비애를 표현한 것이다. ② 둘째 마당(풍자탈): 하인 말뚝이가 첫째 양반은 선대에 기생이 여덟이고, 둘째 양반은 종의 자식이며, 셋째 양반은 홍(洪)가와 백(白)가 두 아비가 만들었고, 넷째 양반은 어미가 부정타서 온 몸이 새까맣게 되었고, 다섯째 양반은 어미가 부정타 손님마마가 흔적을 내었고, 여섯째 양반은 중풍에 걸려 전신이 비틀어졌고, 일곱째 양반은 어미가 서방질하여 낳았다고 양반들의 근본을 폭로하며, 자기야말로 진짜 양반이라고 호통친다. 다른 탈놀음에 비하여 양반에 대한 풍자와 조롱이 심하게 표현된다. ③ 셋째 마당(영노탈): 무엇이든 잘 잡아먹는 괴물인 영노가 양반을 아흔 아홉명 잡아먹고 마지막 너를 먹으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고 하자 양반이 자기는 양반이 아니라고 하다가 결국 잡아먹힐 판이 되어 영노에게 쫓겨 퇴장한다. 영노라는 상상동물을 통하여 양반을 풍자하는 마당이다. ④ 넷째 마당(농창탈): 두 상좌가 제자각시(작은어미)를 두고 춤추다가 할미양반에게 쫓겨 퇴장한다. 할미양반과 제자각시가 통정하여 아기를 낳고, 그 아기를 어르는 할미를 제자각시가 쓰러뜨려 죽이고 할미의 상여가 출상한다. 이것은 다른 오광대의 파계승을 풍자하는 중마당과 처첩관계로 인한 가정비극을 표현한 영감, 할미마당이 합쳐진 것이다. ⑤ 다섯째 마당(포수탈): 담비는 사자에게 잡아먹히고 사자는 포수의 총에 맞아 죽는다. 연희자들은 약육강식의 원리를 표현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양반보다 강한 것이 있음을 암시하였다고 하나, 악귀를 쫓고 복을 비는 의식무(儀式舞)인 사자탈춤이 오락적인 놀이로 변모된 것으로 보인다.
통영오광대의 연희시기와 놀이판
장재봉의 증언에 의하면 의흥계 당시 섣달 20일께 임시총회를 열어 계원 중에서 기부를 거두고 고깔과 기타 메구에 필요한 일습을 마련하고 정월 2일부터 14일까지 계원들 즉 오광대 단원들이 집집을 돌며 메구를 쳐주고 기부받은 돈으로 14일 밤에 파방굿과 오광대놀이, 정기총회를 가졌다고 한다. 의흥계의 정기총회는 봄과 가을에 있어 정월 14일 밤과 3월 15일, 9월 15일에 단풍놀이를 겸하여 탈놀이를 놀았고 4월초 봄놀이에는 사또놀음에 곁들여 오광대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사또놀이에서 사또가 되는 사람은 물주로 이 날의 음식을 내는 것이 상례였다. 통영오광대 놀이판에는 특별한 무대나 장치를 하지 않았고 잔디밭에 연희자가 놀이하고 악사들이 그 옆에 앉아 장단을 맞추고 관객들은 그 둘레에 앉거나 서서 구경하였다. 놀이판 둘레의 한 구석에 개복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저녁놀이에는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우거나 횃불을 밝혀 조명하였다. 통영오광대는 민간신앙과 관계가 있는 정월 14일의 세시행사로 행해졌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오락적인 연희로 변해갔으며 봄놀이와 단풍놀이의 연희로 되어갔다. 또 오광대를 놀면 비가 온다고 하여 기우제 행사로 놀기도 하였다.
전승자 정보
19세기 말엽 통영오광대는 의흥계(義興契)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이화선과 장진국(張鎭局)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화선은 원래 창원 사람으로 통영으로 이사와서 통영오광대를 성립하는데 개척적인 역할을 하였고, 양반역을 맡았다. 장진국은 1960년대 통영오광대의 재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장재봉(張在奉)의 맏형으로 비비양반과 할미역을 잘했다고 한다. 통영오광대놀이는 1964년에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당시 예능보유자로는 장재봉, 오정두, 김진수, 구삼봉, 고영수,문창섭, 김삼성, 유동주 등이 선정되었다. 장재봉은 통영오광대 초기 유지단체인 의흥계의 주동인물인 장진국과 장용기의 막내동생으로 29살 때부터 중형인 장용기에게서 탈춤을 배워 춘흥계를 주동하였고, 1950년대 말 재연과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예능보유자는 대부분 장재봉의 제자이며 그는 특히 문둥춤과 말뚝이춤의 명수였고, 비비양반, 할미양반역 등을 두루하였다고 전한다. 오정두는 1933년에 박정대에게서 놀이를 배워 춘흥계에 참여하였고 장재봉에게도 놀이를 익혔다고 하는데, 꽹과리를 잘 쳐서 반주음악을 주도하면서 영노역도 맡았고, 탈을 제작하는 기능도 있어 많은 탈을 남겼다.
연계정보
· 재구성 <한국의 전통예술>, 심우성 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
관련도서
<한국의 전통예술>, 심우성 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 <한국민속대사전1>, 한국민속대사전 편찬위원회편, 민족문화사, 1991
관련사이트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_주요공연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사이트
통영오광대보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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