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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소운 (1924.7.12~)

예술가명
양소운 (1924.7.12~)
구분
전통연극
문화재관련정보
1967.6.16.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 봉산탈춤 보유자 인정
학력(계보)
1945.1.1. 이장선선생께 봉산탈춤 사사
생애(약력)
1967.10.1.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인연기상 수상 1977.3.~7. 미국 전지역 순회공연 1979.9. 홍콩 및 대만 순회공연 1984.7. LA올림픽 개막 예술제 및 캐나다, 일본 순회공연 1986.5. 캐나다 엑스포 '86 예술제 참가 1987.2. 재일한국청년회 초청공연 참가 1989.4. 중화민국국가극원음악청 초청공연 1991.6. 뉴욕국제페스티벌 참가
리뷰
재인-전통 예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26 웅장하고 활달한 북방형 춤사위 맥을 이어 “선생님!” “뉘시오.” “선생님, 저 소운입니다. 제가 양소운입니다.” “아니, 그대가 양소운이라구! 그런데 왜 이렇게 늙어 버렸느냐.” “선생님은 왜 이렇게 늙으셨습니까.” 순간 양소운(梁蘇云68)씨는 김진오(金振嗚79)옹의 품에 쓰러지듯 안겨 버렸다. 그리고는 통곡뿐. 1990년 12월 10일 밤, 예술의 전당 분장실 앞 통로. 실로 42년 만에 이루어진 사제지간의 극적인 해후는 서로 살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남북간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서울에 온 북한예술인 김옹과 인천의 양씨는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서로 훔쳐 주며 이 기막힌 만남의 흥분과 감격으로 전율했다. 북한에서 최고 예술인 대우를 받고 있는 김진오옹한테 양소운씨는 서도소리를 배웠고 1948년 초가을 황해도 연백군 청단에서 헤어진 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꿈에 떡 맛보듯 훌쩍 떠나 버리셨지만 저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했습니다. 춤을 가르쳐 주신 장양선 선생님과 함께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스승이셨어요. 휴전선이 원망스럽습니다.” 사단법인 해주검무보존회 회장인 양소운씨는 인간문화재 17호(봉산탈춤, 1967), 34호(강령탈춤, 1971)로 지정돼 있으면서도 자신이 해주검무의 정통 맥을 잇고 있음에 자긍심이 대단하다. 춤사위가 웅장하고 폭이 넓으며 활달한 북방형이기 때문에 어디서 어울려도 분위기를 사로 잡는다. 평양 진주 호남등 권번이 있던 곳에서는 동기들에게 기본적으로 가르쳤던 춤이다. 황해도 재령군 장수면 양현리 출생인 양씨는 고조부가 평양감사를 지낸 뼈대있는 가문 출신이다. 군양촌(양씨 집성촌)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해주정례학교로 전학(11세)하며 생각지도 않은 예인의 길을 걷게 된다. 부잣집 딸들이 소리 선생 불러다 독공(과외)받는게 그토록 부러웠지만 어머니 바느질 품삯으로 겨우 학비를 대던 양씨로선 별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마을 부자이던 이씨(해주 광제 정미소 주인)의 수양딸이 되어 장양선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 당시 장씨는 8선녀무, 포구락(궁중무), 승무 한량무는 물론 검무, 탈춤의 일인자로 장구 솜씨도 능했다. 이 때 장씨와 절친했던 김진오씨를 만나 사설초란가 등 서도 12잡가를 착실히 배웠다. 연백이 고향이었던 김씨는 젊은 시절 워낙 미남이고 소리를 잘해 가는 곳마다 염문을 뿌렸다고 회고한다. 12세 때부터는 해주 권번에 나가 예기를 더 익히고 이때 양희천(12잡가 등 서도소리), 문창규(배뱅이굿), 유정철(가야금)씨 등을 만나 재기의 틀을 굳게 다져 놓는다. 집 안에서는 막내딸이 가문 망신시킨다고 극성이었지만 예술과 손뗄 것을 생각만 해도 온몸이 시들하고 맥이 빠져 할 수 없이 내버려 두었다고. 14세 때부터는 권번 조교를 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고 자신도 배웠다. 이 때 해주에 자주 들르던 조택원, 한성준씨 등 유명 춤꾼들을 만나 춤사위를 고쳐 받고 장양선극단에 들어가 황해도 일대를 순회 공연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고왔던 양씨는 어느 ‘음흉한 총각’의 겨냥으로 기구한 여자의 일생에 빠져들게 된다. 네 살 위의 차영운(1959년 작고)씨가 권번시절부터 점찍어 두고 각시를 삼으려 했던 것. “스물 한 살에 결혼하고 나니 세상에 둘도 없는 팔난봉이었고 예술활동도 못하게 했습니다. 집에만 처박혀 있으니 병명도 없이 들쑤시고 핏기마저 말라 갔지요. 혈통으로 물림 받은 끼도 없었는데 왜 그리도 좋았는지 모릅니다.” 남편 차씨는 중선을 두 척이나 부리는 선주로 한번 배타러 나가면 2년이나 3년 만에 들어오곤 했다. 누구를 원망할 틈도 없이 4남매를 기르며 가정과 예술을 지켜 내느라 피멍으로 얼룩졌다. 해방 뒤에는 연백군 추하면 청단에서 박동신씨와 강습소를 차려 검무, 탈춤, 12잡가까지 가르쳤다. 여기서 김진오씨를 만나 사제지간의 스승되어 함께 가르치다 가족을 데리러 간다고 38선을 넘은 뒤 다시는 못 돌아왔다. 625 때는 피난지 대구서 미제 물건 행상, 떡 장사로 연명하며 모진 목숨을 이어 왔다. 양씨의 예술은 1956년 인천시 중구 용동에 고전무용학원을 차리면서 되살아난다. 검무, 탈춤(봉산강령은율), 소리 등 온갖 재기를 찾는 제자들에게 떠 넘겨 주었다. 양씨는 봉산강령탈춤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검무와 함께 세 분야에 걸쳐 수많은 제자가 있다. 큰딸 차재숙(45), 조카딸 양재옥(53)과 노승희(44), 조영애(44), 김혜영(44), 김영실(36)씨 외에도 50여명이 검무를 배우고 있다. 김실자(62, 인간문화재 34호), 김정순(61, 인간문화재 34호), 강대성(39, 두레패 사물놀이), 송용태(40, 연극인)씨 등은 강령탈춤의 제자들이며, 봉산탈춤 이수자는 김종엽(45, 방송인), 장준석(39, 주부)씨 등 16명이 있고 전수자도 10여명이다. 막내딸 차선숙(39, 일본 거주, 강령탈춤 이수자), 아들 부회(富會 33, 은율탈춤 이수자 겸 보존회 총무)씨도 어머니의 예술을 속속들이 이해해 주고 잘 따라 줘 인생 말년이 흐믓하다고 했다. 부회씨는 아들(원철, 5), 딸(은선, 2)도 예능의 끼가 있으면 어머니의 대를 잇게 해 3대 예술가문으로 이끌어 나가겠다고 말한다. 양씨도 요즘 인천문화회관(주 2회)과 인간문화재 전수회관(서울 강남구 삼성동, 주 3회)에 나가 제자들을 지도한다. 한때는 중앙문화센터와 흥사단에 나가 탈춤과 검무를 가르쳤다. 제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1등, 봉산탈춤 경기도문화상(1972), 문화부장관상 수상(1990)과 미주동남아 지역 순회 공연 등 ‘화려한 인생’이 평범한 여염집 아낙으로 있었으면 가능했겠느냐고 되묻는다. 양씨는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예술과 가정을 나란히 지켜 온 일에 대해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다. <세계일보>, 이규원, 1991년 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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