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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장군사당제(南怡將軍祠堂祭)

작품/자료명
남이장군사당제(南怡將軍祠堂祭)
전승지역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지정여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0호(1999월 7월 1일 지정)
구분
무속의례
개요
남이장군 사당제는 젊은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이장군의 영혼을 달래고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사당을 지어 제를 지내면서 시작되었다. 1972년 당굿을 끝으로 간단한 제만 지내오다가 1983년 학계의 복원작업에 의해 남이장군 당제에 장군의 출진을 재현하는 등 문화행사도 병행하고 있다. 1999년 7월 1일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흐름
남이장군 사당은 원래 원효로 2가 거제산(7번지)라는 작은 산에 있었는데, 1904년 전차가 생기고 길이 확장되면서 소란스러워지자 조용한 곳을 찾은 결과, 현 용산로2가 한강변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용문동을 배경으로 해방 후 조성된 시장의 상권과 오래 전부터 거주해 온 사람들이 남이장군 사당의 신앙적 토대이다. 따라서 상인들의 상업적 흥성을 기원하는 차원의 신앙적 대상물의 비중이 크다. 과거의 당굿 형태는 1972년을 마지막으로 전승이 중단되었다. 그 후 1983년 서울시와 문예진흥원의 후원으로 장군 출진 장면을 새로 연출하여 3일 간의 당굿을 거행하게 되었다.
내용
남이장군(1441~1468) 1441년에 출생하여 1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이시애의 난과 변방을 괴롭히던 만주의 여진족 세력을 평정하고 격파했던 조선시대의 무장이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26세에 이미 병조판서(현재의 국방부장관)에 올랐던 뛰어난 청년장수였으며, 예종이 등극하고 모함을 받아 한강 새남터에서 참형당했다. 거제산에 남이장군 사당이 세워지고, 그 일대의 사람들에 의해 수호신으로 받들어진 것은 남이장군이 모병을 하여 훈련시킨 장소가 용산이고 죽음을 맞이한 새남터도 용산의 한강변이란 인연과 관계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이장군신 이 신은 민간과 무속에서 신앙되는 장군신의 하나이다. 주로 서울지역에서 동제의 대상신으로 모셔진다. 나라를 위하여 용맹을 떨치고 공로를 크게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신으로 받들게 된 듯하다. 이러한 신앙은, 원혼이 강한 귀신을 반드시 모셔서 위해야만 탈이 나지 않는다는 소극적 금기에 바탕을 두고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 생전에 위엄있는 장군이었다는 점에서 잡귀를 쫓을 수 있는 주력(呪力)이 있다고 믿기때문에 모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잡귀를 쫓아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으로 믿어지기도 한다. 남이장군이 요귀를 쫓아냈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장군신으로서의 위용과 관련있는 속신을 나타낸다. “남이장군이 무술을 닦던 시절, 동네 청년들과 연을 날리고 있었다. 그때 한 하녀가 광주리에 감을 이고 가는데, 그 감 위에 요귀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남이의 눈에만 보인 것이었다. 남이는 ‘저 감을 먹는 사람은 죽겠구나.’ 생각하고 그 하녀를 따라 집안에 들어가니, 주인집 딸이 금방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딸의 목을 누르고 있는 요귀를 보고 남이가 호통을 치자 요귀가 달아나고, 주인집 딸은 소생하였다고 한다.” 남이장군신은 중부지역 무속에서 최영(崔瑩) 등 원한이 강한 장군을 신으로 받드는 맥락과 일치하는 것으로, 많은 장군 가운데에서 이러한 장군들이 신격화되어 모셔진 데는 생전의 업적이나 충정이 있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억울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서울특별시 성동구 사근동, 용산구 용문동과 도원동 등에 사당이 있으며, 제의는 정기적 또는 비정기적으로 마을 주민들에 의한 유교식 제사나 무당의 당굿으로 행해지는데, 대개는 유교식 제사로 지낸다. ① 과거의 형태 1972년 이전의 치성 형태는 4월초, 7월 1일, 10월 3일 연 3회에 걸처 행했다. 4월 1일에는 3년마다 한 번씩 하는 ‘대제’로, 3일에 걸쳐 ‘당굿’을 지낸다. 평소에는 제물만 차리고 간단히 제만 지냈다. 당굿은 동회-걸립-당굿-사례치성(제)의 순으로 진행된다. 동회 : 당제 15일 전에 열리며, 당굿의 규모, 비용, 제관외 화주 12명을 선출한다. 걸립 : 당에서부터 시작하여, ‘부군대’ 혹은 ‘느림대’ 라고 하는 용기를 앞세우고 풍물이 울리며, 동네 집집마다(약 400호) 돌면서 당비용을 모은다. 보통 3~4일 걸렸으며, 걸립패가 오면 각 가정에서는 대주 밥그릇에 쌀을 담고 숟가락을 꽂은후, 소지, 실타래, 촛불을 얹은 상을 준비한다. 덕담과 치성을 드리고 그 보답으로 당고사 비용을 모았다. 이때 풍물 걸립패와 마을 주민들을 걸립패를 따라다니며 흥겹게 놀았다. 치성의례 : 자정 유교식 제의로 당에 고사를 지낸다. 당굿 : 치성 당일 아침부터 시작한다. 주당물림부터 시작하여 용등 2개, 용기, 장군기(‘남이장군사당(南怡將軍祠堂)’이라 쓴 길이 3m의 깃발), 만신, 잽이, 풍물패, 제관, 남이장군사당보존회 임원, 마을 사람들 순으로 이동하여 신창동부군당에서 ‘꽃받기(이웃 당의 여신을 모셔오는데, 치성당일날 유가를 돌며 진행된다)’를 하고, ‘부군놀음’, ‘군웅거리’, ‘황제푸리’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사례치성 : 당굿이 끝나고 3일 뒤에 치뤄지며, 제관, 화주들만 모여 자정에 유교식 제의를 지낸다. ② 복원 형태 1983년부터 복원되어 거행되고 있는 ‘남이장군사당제는 10월 13일 걸립에서부터 시작하여 14일 꽃받기, 15일 본제의(本祭儀)인 유식제례(儒式祭禮)와 무굿으로 진행되었다. 변화된 제의의 특징은 ㉠제의 시기의 변화이다. 4월에 하던 당굿을 10월로 옮기는 대신 7월의 당굿은 폐지되었고, 3년 마다 하던 당굿을 매년 하여 용산구 차원의 구민축제로 자리매김하였다. ㉡제의 절차의 변화로, 가장행렬을 가미시킨 구민문화축제화이다. 걸립 : 걸립은 당일 소규모로 치뤄진다. 꽃받기(꽃등행렬) : 가장행렬의 성격이 가미되어 100여 개의 꽃등을 켠 채, ‘사당-용문시장-원효로-산천동 부군당-원효전화국앞-용문시장-사당’을 도는 꽃받기 의례절차가 거행되는데, 꽃받기(일명 꽃등행렬)는 꽃을 마을 아래의 할머니 당에 모셨다가 본당에 모셔오는 영신의례(迎神儀禮)로서, 신목(神木)이나 신대 대신 신(神)꽃인 점이 특색이다. 걸립과 꽃받기는 치성전날 치뤄진다. 당제 : 당일 자정에 지내던 것을 오전 10시로 옮겨 진행한다. 장군출진 : 당제가 끝나고 장군복장과 각종 의례용구 및 풍물패 등이 모여 시가행진을 하는 새로운 형태가 재창조되었으며, 이 행렬이 사당에 도착하면 당굿이 거행된다. 당굿 : 이명옥 만신이 당굿(각종 장군의 넋을 기리는 열두거리)을 거행한다. 굿판이 끝날무렵 구경하는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무감을 서는데 무감이란 무당옷을 입고 춤을 추는 것으로 무감을 서면 한해동안 병에 걸리지 않고 재해를 물리치며 복을 받는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사례치성 : 당굿이후 3일 후에 거행하던 것을 다음날로 옮겨 치룬다.
연계정보
· 관련도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서울편>, 국립문화재연구소, 민속원, 1999 <조선후기 서울의 사회와 생활>,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1998 <서울六百年史:民俗篇>,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特別市, 1990 <서울民俗大觀3 (민간신앙편)>, 서울특별시, 1990 <서울의 마을굿>, 박흥주, 정수미 사진, 서문당, 2001 <남이장군대제> ,'한국의 민속 3집', 문영옥, 경희대 민속학연구소, 1986 · 관련사이트
용어해설
꽃받기 : 남이장군사당제에서 보여지는 제의형태로, 이웃의 신창동부군당(현 성심여고 뒤편)의 여신을 초청해 함께 모시는 영신의례(迎神儀禮)이다 . 부군놀음 : 남이장군사당제의 주신인 남이장군의 공수를 듣는 제차거리로 만신이 담당한다. 황제푸리 : 당굿을 할 때나 집을 크게 지어 성주제를 할 때 등, 특수한 경우에만 하는 서울굿의 독특한 절차로, 만신이 통돼지를 등에 지고 춤을 춘다.
관련사이트
서울600년사_민속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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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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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장군 사진제공 서울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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