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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야류

작품/자료명
동래야류
지정여부
문장원(원양반, 가면제작), 천재동(가면제작), 이도근(차양반)
구분
탈춤
흐름
동래 지방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줄다리기 대회의 행사가 끝난 뒤 축하행사로 야류를 놀아왔다고 한다. 동래에서는 노년층이나 부녀자들이 ‘들놀음’이란 이름을 많이 쓰고 있고 유식층과 젊은 층에서는 야류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데 ‘들놀음’이란 우리말이고 ‘야류’는 한자어에서 온 것이다. 오광대와는 달리 들놀음은 탈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길놀이와 덧뵈기춤 놀이와 탈춤을 한데 묶어서 이르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영남 지방의 오광대와 야류의 형성 연대와 전파 경로에 대한 연구 가운데 송석하, 최상수, 이두현의 현지조사 결과가 거의 비슷한데 송석하에 의하면 수영과 동래가 1870년대, 부산진이 1890년대, 진주와 창원, 김해가 1890년대, 통영과 고성이 1900년대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수영야류가 1760년대, 고성오광대가 1860년대에 시작되었다는 설이 현지에서 전해지고 있고, 오광대는 산대탈춤 형성 초기의 분파라고 본 의견도 있지만 직업 연예인인 초계와 신반의 대광대패(1925년 무렵 없어졌다고 함)의 오광대와는 달리 영남 지방의 토착 오광대와 야류는 대체로 19세기 후반에 그 지방의 민속탈춤으로 정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노인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동래야류는 양반과장과 할미와 영감과장의 두 과장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65년에 재연할 때에도 연희자들은 이 두 과장만을 놀았다. 그러나 동래야류에 영향을 주었다는 수영야류에는 제2과장 영노가 있고 또 송석하의 <석남민속유고도록(石南民俗遺稿圖錄)>(1975)에 보면 동래 말뚝이와 함께 문둥이탈 사진이 있다. 따라서 1937년 중일전쟁이 나기 직전까지 연행되었다는 동래야류에는 문둥이과장, 양반과장, 영노과장, 할미와 영감과장의 4과장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그 뒤에 문둥이와 영노과장이 탈락되어 1965년의 재연 때에는 말뚝이 재담의 장인양반과장과 할미와 영감과장만이 당시의 연희자들 기억에 남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동래야류는 제1과장 문둥이, 제2과장 양반, 제3과장 영노, 제4과장 할미영감의 4과장을 연희하고 있다.
연희시기 및 장소
음력 정월 3~4일경부터 각 마을의 농청(農廳)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농악대가 집집마다 돌면서 지신을 밟고 걸립(乞粒)한 전곡과 유지로부터 받은 기부금을 야류공연 비용으로 쓴다. 정월 보름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패문(牌門)을 중심으로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큰 줄다리기를 한다. 1930년대의 줄다리기에서는 줄다리기에서 이긴 축하행사로서 탈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들놀음을 하는 날 해가 지면 부산다리, 범어교, 염창마당에 모여서 탈춤놀이 장소인 패문루 앞(현 동래시장 앞 네거리)까지 가장 행렬인 길놀이를 하였다. 행렬에는 영기(令旗)를 앞세우고 농장(農長)이 선두에 서고 농악대, 한량배와 말 탄 팔선녀(기생들), 선유(船遊 : 달구지에 배 모양의 장식을 하고 그 위에 사람들이 타고 노래를 부름) 용등, 봉등 등 여러 가지 등을 들고 원양반을 비롯한 탈놀이 연희자들과 가마 탄 할미광대순으로 간다. 가장행렬이 등을 높이 달고 장작불을 피워 놓은 탈춤놀이터에 도착하면 길놀이에 참가했던 사람들과 신명 있는 고을 사람들이 얼굴에 먹으로 칠을 하거나 참종이탈을 쓰고 함께 어울려 굿거리 장단에 맞춰 덧뵈기춤을 추는 집단 난무가 벌어진다. 이때 학춤을 비롯해서 각자의 특기를 보여주는 춤을 추어 사람들을 웃겼다. 이렇게 춤을 추다가 밤이 깊어 아녀자들이 귀가한 다음에 탈놀이를 시작하였다. 지금은 전수회관 앞 야외공연장에서 탈춤을 추고 있다.
탈춤의 구성형식과 내용
현재 동래야류는 제1과장 문둥이, 제2과장 양반, 제3과장 영노, 제4과장 할미영감으로 모두 네 과장으로 연희되고 있다. 제1과장 문둥이 평복의 문둥이 둘이 등장하여 왼손에 소고를 오른손에 소고채를 들고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등장한 뒤 얼굴을 가렸던 팔을 떼고 타령장단에 춤을 추는데 자빠지기도 하고 누워서 뒹굴기도 한다. 제2과장 양반 원양반, 차양반, 모양반, 네째양반, 종가집 도령 순으로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덧뵈기춤을 추면서 등장한다. 그런 뒤에 원양반이 먼저 말뚝이를 부르고 양반들이 차례로 한마디씩 말뚝이를 불러댄다. 그 때 말뚝이가 등장하여 자기 근본을 말하는데 5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벼슬한 것을 자랑하고 자기는 그 후손이라고 뽐낸다. 그러나 원양반이 과거날이 임박했는데 노새 준비는 하지 않고 싸다니기만 하느냐고 꾸짖자 말뚝이는 양반을 찾으려고 서울 시내의 각 동네와 팔도의 유명한 여덟 고을을 다녔다고 청산유수같이 지껄여댄다. 그러다가 한 곳에 당도하니 한 미인이 있어 말뚝이를 기뻐 맞아들이므로 보니 그것이 대부인 마누라였다고 하고 정을 통한 것을 폭로하여 양반을 모욕한다. 제3과장 영노 머리에는 개털관을 쓰고 흰 두루마기 입고 손에 부채를 쥔 양반이 나와 돌아다니자 머리에는 얼룩얼룩한 큰 보자기를 뒤집어 쓴 영노가 나와 입으로 “비- 비-” 소리를 내면서 굿거리 장단에 양반의 뒤를 따라 다닌다. 영노는 양반 아흔 아홉명을 잡아먹고 네 하나만 잡아먹으면 하늘에 올라간다고 하며 달려든다. 양반은 놀라 “나는 양반이 아니다”라고 하며 나는 똥이다, 개다, 돼지다, 소다 하며 사람이 아닌 짐승이라고 하여 온갖 수모를 당한다. 제4과장 할미영감 할미가 집을 나간 영감을 찾으려고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다 영감을 만났으나 영감은 그 사이 제대각시라는 첩을 얻어 재미를 보고 있었다. 샘이 난 할미와 영감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고 아들 삼형제가 다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영감이 화가 나서 할미를 발길로 차서 죽게 한다. 의원을 부르고 봉사를 부르나 소용없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상두꾼이 나와 상여를 메고 상여소리를 하며 퇴장한다.
탈과 의상 및 소도구
동래야류에 사용되는 탈은 대부분 바가지탈이고 모양반(毛兩班)탈만 털가죽으로 만들었다. 바가지를 연희자의 얼굴에 맞게 잘라내어 입과 눈을 도려내고 모와 눈썹을 붙이고 나서 그 위에 한지를 붙여서 말린 다음 물감을 채색하고 수염을 붙인다. 동래야류의 탈은 가장자리에 탈보를 달지않고 가면 좌우에 구멍을 내고 굵은 노끈으로 꿰어서 붙잡아 매게 되어있는 것이 특색이다. 또 원양반, 차양반, 넷째 양반, 종가도령의 탈들은 탈의 하반부인 입술 및 턱 부분이 상반부분과 노끈으로 연결시켜서 움직이게 되어있어 하회탈의 양반이나 선비탈처럼 말을 할 때 턱이 움직이는 절악면(切顎面)인 것이 특징이다. 원양반 - 바가지탈로 흰 얼굴에 검은 수염을 달았다. 의상은 도포 위에 사모각대(紗帽角帶) 관복으로 검은 목화를 신고 사선(紗扇)을 쥐었다. 차양반 - 바가지탈로 흰 얼굴에 검은 수염을 달았다. 의상은 황색 도포에 정자관을 쓰고 미투리 신고 부채를 쥐었다. 모양반(세째 양반, 일명 두룽다리) - 털가죽(개털이나 고양이가죽)을 얼굴에 맞도록 베어내어 그 안쪽에 종이를 붙이거나 바가지를 대어 붙이고 오뚝하게 코를 달았는데 흔들거린다. 눈과 입은 구멍을 낸다. 의상은 머리에는 털가죽관을 쓰고 주색(朱色)도포를 입고 미투리를 신고 부채를 든다. 넷째 양반 - 바가지탈로 흰 얼굴에 턱수염을 달았다. 의상은 옥색 때로는 흰색 도포에 정자관을 쓰고 미투리 신고 담뱃대를 가진다. 종가도령 - 바가지 흰 가면에 수염은 없고 의상은 남색 쾌자에 흑색복건(巾)을 쓰고 미투리 신고 부채를 든다. 말뚝이 – 큰 가지에 종이를 입혀 붉은 채색을 하였고 콧등을 비롯한 안면 전체에 커다란 혹 같은 여드름이 돋아 험상궂게 보인다. 두 눈알과 상하 이빨에는 은지를 오려 붙였으며 입술은 붉고 크게 찢어졌으며 코는 높게 두드러져 나왔다. 양쪽 귀가 크고 눈은 뚫리지 않아 입으로 앞을 보게 되나 의상은 흰 바지 저고리에 녹색 마고자를 입고 미투리를 신었다. 다리에는 누런 띠를 아래 위로 묶고 머리에는 황색과 적색의 조화 3개를 달았다. 동래야류 탈 가운데 제일 큰 가면으로 말뚝이가 주역임을 암시한다. 문둥이 2개 - 바가지탈로 미색바탕에 곰보자국과 푸르죽죽한 반점이 얼굴 전면에 박혀있다. 눈, 코, 입이 모두 비뚤어져 병색이 완연하다. 의상은 흰 바지 저고리 미색 조끼를 입고 대님은 매지 않고 걷어 올리며 맨발에 미투리를 신고 왼손에 소고를 들고 오른손에 북채를 든다. 영감 - 영감의 가면은 따로 없고 차양반 가면을 공용한다. 의상은 흰 도포에 갓을 쓰고 미투리를 신는다. 등에는 짚신을 매단 흰 묏산자 보따리를 지고 부채를 든다. 할미 - 바가지로 불그스레한 얼굴에 치켜 올라간 검은 눈썹과 코와 입은 비뚤어졌다. 여드름 같은 것이 여기 저기 나 있다. 눈과 입은 뚫렸고 흰 이빨이 입 위와 아래에 드러나 있고 콧구멍은 움푹 들어갔다. 의상은 짧은 저고리의 동정과 고름은 남색이다. 연한 회색 치마를 배꼽 노리에 입었기 때문에 유방 밑에서 배꼽까지 드러나있다. 미투리를 신고 붉은 처네를 늘어뜨리고 굽은 지팡이를 들었다. 허리에 쪽박과 짚신을 차기도 한다. 제대각시 - 바가지 흰 탈로 검은 눈은 가늘고 길며 눈 테두리는 먹으로 그렸다. 콧구멍은 움푹 들어갔으며 뺨은 연지를 찍었다. 의상도 황색 삼회장 저고리에 동정, 끝동, 곁막이, 고름은 붉은색이고 붉은 치마를 입는다. 머리에는 황, 적, 녹색의 조화 5개가 붙은 고깔을 쓰고 붉은 긴 수건을 목에 감고 고무신을 신었다.
전승자 정보
동래야류는 1937년 이후 중단되었다가 195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이후 1967년에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으며, 당시의 예능보유자는 신우언(辛祐彦, 차양반), 노진규(盧振奎, 양반), 이남선(李南先, 제대각시), 문장원(文章垣, 원양반), 양극수(梁克銖, 할미), 박점실(朴點實, 말뚝이), 천재동(千在東, 탈 제작), 변동식(邊同植, 악사) 등이 보유자 인정을 받았다. 현재는 문장원, 천재동, 이도근 등이 전승에 힘쓰고 있는데 수영야류와 더불어 부산지역에서 탈춤 단체의 쌍벽을 이루면서 활발한 전수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연계정보
· 재구성 <한국의 전통예술>, 심우성 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
관련도서
<한국의 전통예술>, 심우성 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7 <동래야류>, 김경남 저/이봉선 사진, 화산문화, 2000
관련사이트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_주요공연_탈춤공연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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