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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작품/자료명
명성황후
초연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작/연출
이문열 / 윤호진
장르구분
1990년대 이후
출연 / 스태프
출연 민비/윤석화 고종/홍경인 대원군/윤치호 미우라/권흥준 홍계훈/김민수 이노우에/이병준 이또오/채인석 4인의왜상/서영주,송이주,운기호,최진우 박상궁/정영주 김상궁/이혜정 원세계/이성호 손탁/박칼린 스태프 원작/이문열 연출/윤호진 각색/김광림 작곡/김희갑 작사/양인자 편곡/피터 케이시,권혁순 기획/김주섭 음악감독/박칼린 음악지도/서상권 무대미술/박동우 무대의상/김현숙 안무/서병구 무대감독/이종일 조명디자인/최형오,박연용 음향/윤정오
내용
서막 서곡과 함께 막이 오르면 히로시마 원폭투하 영상과 함께 1945라는 자막이 비친다. 1944, 1943, 1942… 연도가 하나씩 줄다가 1896에서 멈추며 무대가 밝아진다. 장소는 히로시마 법정. 명성황후 암살사건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이다. 명성황후 암살의 모의과정과 사실 여부를 묻는 재판장에게 미우라와 주범들은 천황에 대한 충성을 노래한다. 무대 한켠에서 회한의 눈빛으로 그 장면을 보던 대원군은 한나라의 국모였으며 자신의 며느리이기도 했던 비운의 민비를 추억한다. 1막 때는 다시 1866년 경복궁, 어린 민자영이 왕비로 간택되는 장면이다. 대원군과 조대비의 축복 속에서 민비는 앞날에 대한 기대와 다짐을 노래한다. 그러나 그 무렵의 조선은 어린 고종을 앉혀두고 섭정을 하는 대원군과 통상을 원하는 외국 함선들로 무척 혼란한 상태다. 대원군은 상석에 앉아 내정개혁과 쇄국정책을 외치며 통상을 요구하는 외국함선을 격파한다. 책을 벗하며 날로 총명해지던 민비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아름다움과 지혜로 고종을 사로잡는다. 또한, 민비는 고종에게 ‘나라의 왕’임을 일깨워주며 친정을 권하고 고종은 드디어 섭정을 폐하고 대원군은 민비에 대한 경쟁심과 권력에 대한 애착을 안고 물러난다. 이제 고종의 친정은 시작되었으나 조정은 수구파와 개화파의 논란으로 들끓고 난감한 고종은 수심을 안고 내전으로 향한다. 대세에 대한 혜안을 가진 민비는 개화를 시대의 흐름으로 인식하고, 고종에게 개화정책을 밀고 나가라하며 어떻게 일본을 경계하고 구미강국을 이용할 것인지 충고한다. 민비의 이이제이 정책으로 조선에 대한 야심이 꺽인 일본은 민비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외교에 능란했던 민비도 만백성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개화에 반하는 유림의 상소가 날로 쌓이고 밀린 봉급과 천대로 차별받던 구식군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후일을 기약했던 대원군은 반란군을 만류하는 척 은근히 선동하여 다시 정권을 잡게 되고, 민비는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한다. 그곳에서 나라와 고종, 아들을 걱정하던 민비는 지략을 발휘하여 청과 교섭, 다시 대전으로 들어서고 대원군은 청국으로 압송된다. 민비를 다시 맞게 된 대전은 왕실의 권위회복과 함게 행복한 앞날을 기약하며 기뻐하는데 일본정부는 모처에서 정한 회의를 하며, 조선을 정복하는데 걸림돌로써 민비를 지목한다. 2막 12년 후, 1895년, 무대는 대연회가 벌어졌다. 민비 고종을 비롯한 각국의 대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양무곡과 춤을 즐기며 흥이 무르익은 가운데, 일본의 이노우에 공사는 청일 전쟁의 승리로 의기양양하다. 바야흐로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이 노골화되어 가는 시기이다. 어느새 노련한 정치가로 변모한 민비는 일본의 음모를 간파하고 러시아 공사 베베르를 부추겨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을 내 몰 것을 계획하고 있다. 이노우에는 고종을 회유하여 조선에서의 상권과 정치권을 넘보지만, 역시 민비로 인하여 큰 곤란을 겪는다. 이윽고 베베르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견제하기로 한 삼국간섭이 결정되었음을 민비와 고종에게 알리고, 민비의 외교정책 결과 국제적으로 수세에 몰린 일본은 아다미 별장에서 미우라를 중심으로 ‘여우사냥'을 모의한다. 한편 홍계훈은 훈련대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음을 알리고 미우라는 양의 탈을 쓰고 고종을 태연하게 알현하나 민비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민비가 중궁전에서 외교관 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가운데, 드디어 미우라는 여우사냥 작전개시를 명한다. 홍계훈이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민비에게 알렸으나 이미 일본 낭인들은 대원군을 끌고 궁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낭인들과 맞서 싸우다 홍계훈과 시위대는 무참히 쓰러지고 수많은 궁녀들이 죽임을 당한 채, 무너져가는 조선왕조를 지키려고 몸부림쳤던 민비는 잔인한 일본인의 칼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맺음막 민비의 시신을 불태우는 연기가 무대에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대원군은 통탄한다. 무대 저편에서 험난한 시대에 태어나 조선을 위해 혼을 불사른 민비와 백성들의 노래로 막이 내려진다.
윤호진 (1948~ )
1948년 당진 출생. 1980년에 동국대학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후, 1984년 미국 뉴욕대학교 대학원 공연학과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다. 1970년에 극단 실험극장에 입단하여 소극장 연극운동가로 활동하였고, 1976년 <그린 줄리아>를 연출하였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극단 실험극장 대표, 1991년 한국연극연출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뮤지컬 전문극단 <에이콤>을 창단하여 대형 창작뮤지컬을 제작 및 연출하고 있다. 1978년과 1981년에 동아연극상 대상, 1978년과 1982년에 동아연극상 연출상 등을 수상하였다. 대표작품 <아일랜드>, <사람의 아들>, <호모 세파라투스>, <들소>, <신의 아그네스>, <매스터 해롤드>, <실비명>, <겨울나그네>
평론
배우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무대와 의상, 조명은 일단 기능의 수행과 의미 생산에 성공적이었다고 보인다. 김현숙이 디자인하고 만들어 낸 200여 벌의 의상은 당시의 분위기와 풍습을 잘 드러내는 동시에 깊은 색감과 다양한 질감의 천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특히 천을 누비거나 여러 가지 대비되는 듯한 질감과 색들을 조합해서 만든 민비와 고종의 의상들은 궁중의상의 품위와 화려함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그러나 색의 대비나 질감들이 무대의 크기에 비해 너무 섬세하고 무대장치가 의상에 비해 압도적이어서 노력한 공에 비해 의상의 아름다움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부분도 있어서 안타깝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무대를 적절히 채우면서 약 30여 개의 장소를 오가야 하는 장면의 변화를 회전무대를 비롯해서 다양한 무대 전환의 장치를 최대한도로 사용해 순조롭게 진행한 박동우의 세트는 극의 긴장감과 의미를 시각적으로 잘 전달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다툼을 각 나라의 국기를 크게 매달아 그 안에서 사신들이 노래를 하게 한 장면은 박동우와 연출 윤호진의 재치가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특히 서양의 함대들이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풀도록 종용하는 장면에서 프랑스의 배를 관객들을 향하게 설치하고 양쪽에 미국과 독일의 배로 균형을 잡아준 장면은 포화의 효과를 낸 불꽃과 연기, 음향과 함께 관객들에게 정면으로 좁혀 오는 외세들로 인한 위기감을 실감하게 하는 동시에 스펙터클한 장면을 보는 흥분을 함께 느끼게 해준다. 또한 고종과 민비가 프랑스, 독일, 러시아 삼국의 사신들과 일렬로 서있는 무대가 위로 올라가면서 그 밑에서 일본 아다미 별장에서 미우라의 주재 아래 낭인들의 음모가 결성되는 장면이 드러나도록 한 것은 무대장치가 극의 갈등과 이중성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지를 잘 드러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무대장치는 전체적으로 장면의 전환이 너무 많고 회전무대의 사용이 빈번해서 때로는 극으로의 몰입을 방해하고 공연의 호흡을 짧게 끊기게 하는 부작용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 뮤지컬에서 보기 드문 의욕과 규모로 우리가 가꾸어 나가야 할 역사 속의 인물을 소재로 한 점,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오래 기억될 여성 주인공을 만들어낸 점, 공연요소들이 골고루 수준급이었다는 점등이 이번 <명성황후>의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간의 노력과 투자가 관객들의 호응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김미도, <문화예술>, 1996년 2월) 이문열과 쇤베르크 등의 유명세로 일찍부터 사람들의 기대를 부풀렸던 <명성황후>에 대한 나의 조바심은 두 가지 방향이었다. 첫째는 대작 역사물 창작뮤지컬을 어설프지 않도록 어떻게 ‘작품 꼴’이 될 정도로 만들어놓을 것인가였고, 둘째는 결코 긍정적인 역사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어느 정도의 설득력 있고 참신한 내용으로 채워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첫번째 조바심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해결되었다.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최소한 무대 공간의 운용과 작품 진행의 템포 조절에 있어서, 이 작품은 전체의 흐름을 크게 흐트러뜨리지 않고 끌어가고 있었다. 대작에 걸맞는 스케일과 화려함을 갖추었고,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첨단 설비를 총동원하여(그래서 아마 국내의 다른 극장에서는 재공연하기는 힘들 것이다) 빠르게 장면을 전환하고 무대 공간을 다양하게 꾸려나갔다. 특히 이 작품은 특정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 않으며, 명성황후 민씨의 중전으로서의 몇십년 간의 삶을 삽화적으로 엮어가기 때문에 장면 전환이 많으면서도 긴박하게 극이 끌려나가지 않는다. 이런 일대기적 작품이 지니는 어려움에 비해, 무대를 꾸려가는 연출력은 상당히 돋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우아하고 세련된 분위기의 박동우의 무대미술과 섬세한 조명이 한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안정적이었고 뮤지컬 때마다 문제거리인 음향도 비교적 잘 통제되었다. 주인공을 맡은 윤석화를 비롯하여 뮤지컬 배우 전문배우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너무 어린 티를 없애기 힘들었지만 고종 홍경인의 분발도 신인으로서는 주목할 만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비교적 기술적 측면의 것이다. 그에 비해 작품의 핵심을 이루는 것들은, 상당 수준의 기술적 보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허약함을 드러냈다. 즉 작품의 근간이라 할 만한 극작과 작곡이 여전히 많은 문제를 드러내고 있었고, 연출 역시 이러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세련된 기술로 흠집 없애기에 더 주력한 듯했다. 따라서 얼마나 참신하고 설득력 있는 명성황후 해석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두번째 조바심은 ‘역시나’였다. 여태껏 부정적 해석이 지배적이었던 명성황후를 주인공으로 삼으려면, 명성황후의 정치적 입장과 처신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여걸로 만들거나, 아니면 그의 정치적 입장과 처신에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두며 현대인의 시각과의 충돌과 긴장을 극 전체에서 유지하는 길, 두 가지뿐이다. 그러나 이 극이 선택한 길은, 이 두 가지 어느것도 아니며 사랑스럽고 지혜로운 여인이라는 위인전식 인물형을 만드는 일이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작가의 재해석이란, 명성황후가 외세를 골고루 끌어들여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도록 했다는 것인데, 그러한 내용은 작품 전체에서는 두 장면에서 아주 조금 드러나있을 뿐이며, 별로 부각되지 않는다. 그래서 크게 설득력을 지닐 정도가 못되며, 결국 대원군은 청나라로, 명성황후는 처참한 죽음으로, 후에 고종은 러시아공관에의 감금으로 귀결되는 정책이었음에 대한 해명은 바랄 수 없을 정도로 내용적 무게가 가볍다. 오히려 명성황후는 고종과 세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너그러운 아내요 어머니로서, 지혜롭게 고종에게 충고하는 사랑받을 만한 여인으로만 부각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불쌍한 여인, 민족적 치욕이라는 단순한 수준의 주제의식만을 관객에게 남겨줄 뿐이다. 각 인물들의 정치적 입장이 객관적이고 역사적으로 드러나야만, 인물들은 시아버지 몰아내는 며느리, 며느리 죽이는 데에 동참한 시아버지라는 패륜적 평가를 벗어나, 일정한 정치적 입장과 입장의 대립으로 객관화되고 사회화되어 드러나게 된다. 그래야만 머리 좋은 정책가이자 매력 있는 여걸로서의 명성황후는 그 성격을 제대로 갖추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임오군란도 ‘명성황후를 고통에 몰아넣은 사건’ 정도로만 처리되었으며, 시해의 주범 일본이 득세하는 계기인 청일전쟁은 아예 빠져 일본과 명성황후 간의 대립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대원군과의 갈등이 부각되었고, 패륜적 며느리라는 이미지를 없애겠다는 작가의 의도는 제대로 관철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음악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음악은 안정적이고 장면 연결부도 매끄러웠으나 단조로웠다. 사랑타령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 나라 대중가요의 관행 탓에, 양인자의 가사와 김희갑의 음악은 사랑과 그리움 등의 개인적 서정이 넘치는 부분에서는 돋보였지만, 격동의 정치 한복판에 서 있는 여장부 명성황후의 복잡한 심적 갈등이 돋보여야 하는 임오군란 이후 피신 장면에서조차 단순한 사랑타령으로 머물러 버렸다. 대작 역사물 치고는 전반적으로 스케일이 작고 정서도 단순했으며, 특히 역사물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할 만한 우리 전통음악에서는 지나치게 무력했다. 설상가상으로 편곡조차 이러한 문제점들을 보완해주지 못했다. 즉 노래들은 아름답고 좋은 대중가요이기는 했지만 극적 갈등과 내용을 음악 안으로 끌어들이고 극적 갈등에 기여하는 뮤지컬 음악으로서는 충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영미, <시사저널>, 1997년 12월 18일) 모형 경복궁 축소무대가 무대 위에 있다가 올라가면서 공연되는 이 작품은 여러가지 볼거리들을 제공하여 스펙타클한 뮤지컬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이처럼 축소판 무대와 함께 대부분의 다른 무대장치는 상징적으로 처리되었으며, 배경막의 그림이나 천의 사용 그리고 몇몇 소도구만으로 장면을 묘사하여 깔끔한 무대를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적이지 않은 무대장치는 빠른 템포의 극을 극화하는데 효과적인 장치였다. 다음으로는 대부분의 회전무대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는 이중 회전무대의 사용 또한 이채로왔다. 밑그림을 세계지도로 함으로써 조선이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하였으며, 이중 회전무대의 엇갈린 높낮이와 회전은 역동적이면서도 각박한 극적 분위기를 창출하는데 일조하였다. 단순한 회전무대였다면 매우 평범하고 단조로웠을 무대를 재미있는 변형의 무대로 만들었다고 하겠다. 의상은 사실적이면서 한국적인 색채를 강하게 보였다. 특히 일본과 조선인을 색상 대비로 구상함으로써 극 구상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궁중의상의 경우는 매우 화려하게 설정함으로써 한국의 미를 강조하고자 하였다. 무용에 있어서는 서양의 뮤지컬과 차별성을 갖고자 하였다. 전반부에 등장하는 신하들의 춤은 흥미유발을 위해 패러디한 것이지만 2막의 대연회의 장면에서 보여준 화관무와 같이 한국무용을 그대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이는 그동안 우리 관객들조차 서양 뮤지컬에 길들여져 있던 관극 태도의 수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석만, '명성황후의 볼거리들',<오늘의 연극비평>,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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