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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님달님

  • 작품/자료명

    햇님달님

  • 초연장소

    시공관

  • 작/연출

    김아부

  • 장르구분

    1960년대 이전

  • 출연 / 스태프

    출연 박귀희, 김소희, 이기화, 김경희, 조농월, 조선옥, 김경자, 신유경, 고일연, 홍부용, 박향월, 이윤옥, 서화선, 박정숙, 박춘자, 성정애, 김정희, 성추월, 정유색, 김연수 스태프 작·연출/김아부 창지도/조상선 안무/김소희 장치/원우전

  • 내용

    여성국극 <햇님달님>은 당대의 명창 스타였던 김소희와 박귀희의 성격과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민담을 곁들여서 김아부가 쓴 작품이다. 냉정하고 이지적이며 좀처럼 굽히지 않는 김소희를 달님 공주로 만들고, 총명하고 명랑하며 호쾌한 박귀희를 햇님 왕자로 창조한 것이다. 달님공주가 낸 수수께끼를 햇님왕자가 풀어 가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사랑 이야기다.

  • 김소희 (1917 ~ 1995)

    본명은 순옥이고, 호는 만정. 전북 고창군 흥덕면에서 태어나 열 세 살부터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15세에 흥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부터 송만갑에게 심청가와 흥보가를 배웠으며, 명창 정정렬에게 춘향가와 수궁가를 배웠다. 송만갑으로부터 동편제 판소리의 장대한 가풍을 정정렬으로부터 서편제 판소리의 섬세한 가풍을 두루 섭렵한 것이다. 또한 김소희는 김종기에게 가야금 산조도 배웠다. 만정 김소희는 판소리뿐 아니라 창극과 국극, 가야금, 무용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 했다. 1937년 창극좌에 입단했고, 1939년 화랑창극단에 가입했다가 1942년 화랑창극단이 해산되자 잠시 창극계를 떠난다. 광복이 되자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고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창설하여 후진 육성에 힘을 쏟았다. 1964년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1957년~1958년 대한국악원 부원장, 1962년~1963년 국립국극단 부단장, 1962년~1963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1974년~1975년 국악예술학교 이사를 지냈다. 1972년 판소리 그룹단장으로 미국 18개주의 35개 대학과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한 바 있다. <춘향가>(1회)에서 춘향역, <심청가>(13회)에서 장승상부인 역을 비롯, <수궁가>(19회), <배비장전>(22회), <대업>(23회), <춘향전>(24회) 등에서는 도창으로 출연했다. 신영희, 안숙선, 유수정, 이명희, 오정해 등의 스승이다.

  • 박귀희 (1921 ~ 1963)

    본명은 오계화이고 호는 향사. 대구에서 출생해 1923년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진학했으며, 1957년 경상대학교 상경학부 경제학과 3년을 수료했다. 15세에 박지홍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17세에 강대홍에게 가야금병창을 21세에 오태석에게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현대 가야금병창의 일인자로 손꼽힌다. 1955년에 한국국악협회 이사 취임했으며, 1962년 한국민속가무예술단 단장을 맡았다. 1960년에 한국국악예술학교 창설했으며,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추풍감별곡>(1940), <일목장군>(1942)의 장군 역, <호동왕자>(1947)의 왕자 역, <흥보가>(1944)의 흥부 역, <햇님달님>(1949), <가야금의 유래>(1951)의 가실왕 역 등 남자 역할을 잘해 큰 인기를 끌었다. 1979년~1981년 제3대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바 있다. 박귀희의 문하에서는 안숙선, 강정숙, 김성녀 등이 배출됐다.

  • 리뷰

    <햇님달님>은 한국 연극사에 여성국극의 물꼬를 튼 작품이다. 1949년 2월 <햇님달님>이 무대에 올라간 이후 전국은 아름답고 아기자기하며 애연한 여성 창극의 독특한 매력에 빠지게 된다. 창극단체 국악원 멤버들 중 여류 명창들은 1948년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했다. 박녹주를 이사장으로 김소희, 박귀희, 임춘앵, 정유색, 임유앵, 김경희 등 최고의 베테랑과 야심만만한 20대 신인들 30여 명의 여성 명창들이 모였다. 여성국악동호회의 첫 작품 <옥중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두 번째 작품 <햇님달님>은 창극사상 전무후무할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그들은 흥행 수입으로 창립공연 때 진 빚을 갚은 것을 물론이고, 단원들에게 개런티를 듬뿍 주고도 거금 200여 만환이 남아 사무실을 위한 집을 170만환에 살 수 있었다. 서울에서 <햇님달님>이 놀라운 흥행을 거두자 지방도시에서 흥행사들이 몰려들어 대구와 부산으로 순회공연에 나서게 됐고, <햇님달님>은 대구와 부산에서 더욱 인기를 누린다. 관객은 여성국극의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와 의상에 압도됐으며, 특히 남성으로 분장한 여성 배우의 특이한 매력 때문에 수많은 여자 관객들이 매료당한다. 여성국극단들은 야사, 설화, 전설을 애정과 이별 중심으로 재구성한 레퍼터리로 극성팬들을 몰고 다니며 50년대에 찬란한 여성국극 전성기를 누린다.

  • 평론

    소문이 서울장안에 널리 퍼지자 이제까지 가정에만 얽매였던 부녀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고, 너도나도 극장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극장문전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흥행사상 전무후무하였다. 부산공연때는 부산시민 뿐 아니라 인근도시에까지 관객이 몰려들어 부산역 앞 공회당은 인파로 메워져 통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창극사연구>, 박황, 백록출판사, 1776) 여성국극이 얼마나 인기 있었는가는 당시 대단한 인기를 끌던 서양의 스펙타클 영화와 대결해서도 이긴 경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즉 부산에서 여성국극을 보려는 관객의 열이 같은 시간대의 인기 서양영화 <흑기사>의 입장행렬의 배나 됐던 것이다. … (중략) … 대중은 달콤하면서도 감상적인 것을 좋아하며 이를 통해 현실도피를 꾀하려 든다.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여성국극은 너무나 적합한 예술양식이었다. 왜냐하면 한이 굽이굽이 서린 창의 애연한 가락과 멋스런 춤이 있으며, 환상적이면서도 센티멘탈한 사랑이 주제인데다가 현란한 의상과 웅장한 무대장치가 볼거리로 조화를 이뤄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전적이면서도 종합예술적이며 환상적인 여성국극은 전쟁과 가난에 시달린 대중의 시름을 충분히 달래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국연극운동사>, 유민영, 태학사, 2001)

  • 관련도서

    <추억의 여성국극 53년사>, 김병철, 남산예술원 <창극사연구>, 박황, 백록출판사, 1776 <한국 창극사 연구>, 백현미, 태학사, 1997 <한국연극운동사>, 유민영, 태학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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