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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우직녀

  • 작품/자료명

    견우직녀

  • 초연장소

    부민관

  • 작/연출

    설의식 / 서항석

  • 장르구분

    1960년대 이전

  • 출연 / 스태프

    출연 송진혁, 민인식, 권진원, 윤부길, 김형래, 성애라, 이성운, 고향선, 김옥춘, 이용남, 전방일, 계수남, 태을민, 이화삼, 박용구 등 스태프 작·가사/설의식 구성·연출/설항석 작곡/안기영 편곡/김순남 안무/장추화

  • 내용

    서항석은 일본의 우리 말, 글에 대한 말살책에 대항하기 위해 설의식과 함께 우리의 전통 소재를 찾아내 극화하는 활동을 했다. <견우직녀> 역시 이른바 ‘민화극’ 혹은 ‘설화극’을 표방하고 있는 작품이다. <견우직녀>는 제1부 지상편이고, 제2부 천상편 <은하수>가 있다. 작품은 민담 ‘나뭇꾼과 선녀’ 이야기를 주축으로 삼고 있다. 대지의 아들 견우는 소를 데리고 금강산에 왔다가 사냥꾼에게 쫓긴 사슴을 구해주게 된다. 사슴은 은혜를 갚기 위해 금강산 팔경에 목욕하러 내려온 천상선녀 직녀의 옷을 감춘다. 견우는 하늘로 올라 갈 수 없게 된 직녀와 인연을 맺어 두 아이를 낳고 산다. 10년 후 사슴은 직녀에게 옷을 돌려주고, 견우, 직녀, 아이들, 소, 사슴 모두 천상으로 올라간다.

  • 서항석 (1900.3.18~1985)

    독문학자이자 극작가이자 연출가. 호는 경안. 함경남도 흥원 출생. 1929년 도쿄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사 학예부장을 지냈다. 1931년 해외문학파 회원으로 가담했고, 홍해성, 윤백남, 유치진 등과 극영동호회를 조직했는데, 이 단체는 극예술연구회의 전신이다. 이어 극예술연구회 창립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38년 4월 유치진과 함께 극예술연구회를 극연좌로 개칭하여 1939년 해산되기까지 이끌었다. 1941년 현대극장 결성에 참여했고, 1948년 민주일보사 편집국장을 거쳐 1952~61년 중앙국립극장장을 지냈다. 1963년 서라벌예술대학 교수를 거쳐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1965년 서울특별시 문화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71년 한국연극협회 고문을 거쳐 1978년 대한민국 예술원 부회장을 지냈다. 1932년 5월 극예술연구회 산하에 있는 극단 실험무대에서 공연한 고골리의 <검찰관>에 출연했고, 카이젤의 <우정>, 클리포드오데츠의 <깨어서 노래부르자> 등을 번역했다. <부활>, <콩쥐팥쥐>, <파우스트> 등을 연출했으며, 연기, 번역보다 비평 강연을 통한 연극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괴테의 시>(문예월간, 1932. 1), <독일문학의 특질>(삼천리, 1936. 6), <하우프트만의 예술>(신문학, 1946. 8) 등은 대표적인 평론이다. 또 시에도 관심을 갖고 <산 넘어 또 산넘어> 등을 발표했으며, 희곡 <여당원>(1926), <마을의 비가>(1962) 등을 발표했다. 해방 후 괴테의 <파우스트>를 번역해 1960년대 중반 국립극장 무대에 올림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독일의 괴테 훈장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서항석 전집’(하산출판사, 1987)에 수록돼 있다.

  • 안기영 (1900.1.9~1980.8.2)

    성악가이자 작곡가. 충남 청양읍에서 태어나 공주에서 자랐다. 공주 영명학교와 배재학당을 다녔고, 배재학당에서 악보 읽는 법과 코르넷 연주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입문했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 선교사로부터 음악적 재질을 인정받아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미국 유학의 행운을 얻었다. 1919년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3·1 운동에 참가했다. 그 해 5월에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에 건너가 동북지방의 류하현에 있던 신흥학교(독립군의 비밀 군관학교)와 광주에 있는 예비군관학교에 다녔으며, 상해에 있는 독립신문사에서 사무원도 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조교를 잠시 지냈으며,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레곤주에 있는 엘리슨-화이트 음악학교에서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였고, 1928년 귀국해 1932년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성악과 교수로 재직했다. 이때 이화여자전문학교 합창단 지도를 맡아 교내 발표와 전국순회연주활동을 했다. 처녀작으로 <그리운 강남>(1928)을 작곡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서 작곡에 열중해 수십 곡의 노래들을 썼다. 가요 <작별>(일명 ‘오 내사랑 오 내사랑’, 1933)과 동요 <조선의 꽃>은 이 시기 그가 쓴 대표적인 곡들이다. 한편 민요연구의 일환으로 1931년 전통민요를 합창으로 편곡한 <조선민요합창곡집>을 발간하였으며, 같은 해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민요합창곡을 취입했다. 그리고 1940년대에는 민요를 바탕으로 <콩쥐팥쥐>(1941), <견우직녀>(1942), <은하수>(1943), <에밀레종>, <장화홍련전> 등과 같은 새로운 종류의 음악극을 만들었다. 해방 직후에는 서울에서 음악건설본부 작곡부장,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해방전사의 노래> 외 수 편의 노래를 썼다. 1947년 7월 근로 인민당의 음악부장을 하면서 당수 여운형이 암살됐을 때 추도곡을 작곡해 지휘했다는 이유로 음악 활동을 중지 당했다. 1950년 월북해 국립예술극장 작곡가로, 평양음악대학 성악 교수로 있으면서 후진양성 사업과 창작활동을 했다. 음악대학교수로 1957년에 예술가 급수 1급을 받았다. 작품집으로는 <안기영 작곡집 1>(1929), <안기영 작곡집 2>(1931), <안기영 작곡집 3>(1936), <조선민요합창곡집>(1931)이 있다.

  • 리뷰

    서구의 뮤지컬과 흡사한 음악극의 양식이 우리에게 있으니 이것이 바로 악극이다. 즉 악극이란 ‘대사와 동작과 노래와 무용과 경음악으로 엮어 나가는 연극’으로, 악극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대중의 인기를 누리면서 활발한 공연 활동을 벌였다. 당시 활약한 악극단에는 조선악극단, 반도가극단, 라미라 가극단, 그리고 제1악극단 등이 있다. <견우직녀>는 창작 오페레타 운동을 의도한 라미라 가극단의 두 번째 작품이다. 기존 악극보다 좀더 품위 있는, 본격적인 가극 상연을 목표로 라미라 가극단은 <견우직녀>의 배역을 음악 학교 출신들로 구성했다. 테너 송진혁은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이인선의 수제자였고, 민인식은 동경 고등 음악학교 출신이었으며, 김형래는 동경 제국 음악학교 출신이었다. 또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음악가 안기영이 작곡을 맡고, 안무를 맡은 장추화는 일본 동경 이시이 무용연구소 출신으로 스텝진은 각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들이었다. <견우직녀>는 고유의 설화를 악극 무대에 신선한 소프라노와 베이스의 가수들이 구현해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얻는다. 공연팀은 1942년 정월 일본으로 순회 공연에 나서는데, 유학생들(한평숙, 마금희, 신막, 김형로 등)이 찬조출연해 동경의 일교 대학강당에서 올린 공연은 성공을 거둔 반면 오오사까 지방 공연에서는 흥행에 실패한다. 라미라 가극단에서 활동했던 박용구(작가·평론가)는 설화나 민담을 소재로 한 줄거리에 순수 음악의 곡을 붙인 음악극 라미라 가극단의 공연을 ‘향토 가극’이라 명명한다.

  • 평론

    재래적인 악극단의 이미지를 불식하기 위해 단체의 이름을 콜럼비아 악극단에서 라미라 가극단이라고 개칭했다. 라미라란 민족 음계인 5음계 중 계면조의 기본음을 계명으로 라(La), 미(Mi), 라(La)로 한다는 발상이었다. (<음악동아>, 황문평, 1985년 7월, '에피소드로 본 한국가요사5') 라미라 가극단의 활동, 반도 가극단의 활동 등이 일제에 대한 위기 의식 속에서 향토 가극을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지요. … <견우직녀>같은 작품은 프롤로그가 무용으로만 되었고, 주제가도 상당히 좋았어요. 북쪽의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등의 구성이나 극적 전개는 향토가극의 흐름을 이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어요. 향토가극 시절에 활동하던 스텝들이 많이 월북했으니까요. 안기영씨도 월북했죠. (<20세기 예술의 세계>, 장광열, 지식산업사, '박용구옹의 증언') 라미라가극단의 성공작 <견우직녀>의 경우, 음악도 민요풍의 음악에 프롤로그를 무용으로 처리했고, 또 ‘8선녀의 춤’, ‘금강산 정령들의 춤’ 등 무용 장면을 많이 넣어 뮤지컬에 가까운 공연을 했다. 그리고 공연 말미에 쇼를 붙이곤 했던 다른 악극과는 달리 쇼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뮤지컬 양식과 흡사한 공연이었다. 라미라가극단에서 활동했던 박용구는 이 가극들이 물론 일상동작을 무용화하고, 양식화하는 본격 뮤지컬의 수준까지는 못 갔지만, 민속 소재에 무용과 음악으로 극적 줄거리와 인물성격을 표현하는 등의 공연스타일이었으므로 우리 나라 자생적인 근대 뮤지컬이라고 평가한다. 이 자생적 뮤지컬 운동은 <너를 노래한다>(1931)가 퓰리처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 예술로 인정받은 미국 뮤지컬사와 비교해 볼 때도 시기적으로 10년 정도 밖에 뒤지지 않은 시기인 것이다. (<한국 극예술 연구> 제14집, 김성희, 2001.10, '한국 뮤지컬 운동 연구')

  • 관련도서

    <한국연극>, 김미도, 1988년 1월, '악극의 발자취' <20세기 예술의 세계>, 장광열, 지식산업사, '박용구옹의 증언' <한국희곡전집 5>, 서연호, 태학사, 1996, '견우직녀' <한국근대연극사>, 유민영, 단국대출판부, 1996. <음악동아>, 황문평, 1985년 7월, 에피소드로 본 한국가요사 <한국 극예술 연구> 제14집, 김성희, 2001년 10월, '한국 초창기 뮤지컬 운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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