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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한

작품/자료명
규한
초연장소
학지광 1월호
작/연출
이광수
장르구분
1902년-1910년대
내용
영준은 순전히 부모의 의사에 따라 14살에 자기보다 3살이 많은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고 동경유학을 떠난다. 그러나 동경에 유학한 영준은 아내에게 수 년 만에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그 편지에는 자신의 결혼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한 것이 아니라 부모에 의해 강제로 한 것이니 그 결혼은 효력이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남편인 영준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구식 결혼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영준은 귀국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신문명이고 신사조고 아무것도 모르는 조강지처는 정신이상이라는 파멸로 비극적인 끝을 맺는다. 이 작품에서 유학생 남편의 편지는 전통인습에 대한 도전이요, 유교윤리에 기반을 둔 전근대적 전통의식에 대한 결별 선언이다. 1910년대 희곡의 가장 큰 주제인 근대적 자각의 하나로서 구식 결혼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자유 연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근대와 전근대, 전통과 신식의 갈등에서 결국 춘원은 전근대의 패배로 종결짖고 있다. 전통인습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조강지처가 정신이상이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남편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을 가진 아내는 무기력하기 때문에 시대의 전환기에 희생물로 남고 마는 것이다. 참고: <한국예술사전Ⅳ-연극·무용·영화>, 대한민국예술원, 1985.
예술가
이광수 (1892~1950) 호 춘원(春園). 평안북도 정주 출생. 소작농 가정에 태어나 1902년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후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되었으나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4년 상경하였다. 이듬해 친일단체 일진회의 추천으로 도일, 메이지(明治)학원에 편입하여 공부하면서 소년회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는 한편 시와 평론 등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10년 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재차 도일,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無情)>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소설문학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였다. 1919년 도쿄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상하이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21년 4월 귀국하여 허영숙과 결혼,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지내고, 1933년 ‘조선일보’ 부사장을 거치는 등 언론계에서 활약하면서 <재생> <마의태자> <단종애사> <흙> 등 많은 작품을 썼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반 년 만에 병보석되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친일 행위로 기울어져 1939년에는 친일어용단체인 조선문인협회(朝鮮文人協會) 회장이 되었으며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라고 창씨개명을 하였다. 8·15광복 후 반민법으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그간 생사불명이다가 1950년 만포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밖의 작품에 <윤광호(尹光浩)> 등의 단편과 <이차돈(異次頓)의 사(死)> <사랑> <원효대사> <유정> 등 장편, 그리고 수많은 논문과 시편들이 있다.
리뷰
춘원이 자유연애와 민족주의를 주창한 장편 <무정>을 1917년 6월부터 연재하기에 앞서 ‘학지광’ 1월호에 발표한 단막극으로 연극적 기교 없이 거의 토론 형식을 취했다. 근대극을 개인의식에 눈뜬 근대시민사회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본다면 이 작품이야말로 분명히 본격적인 근대희곡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관련도서
<이광수 문학사전> 한승옥, 고려대학교, 2002. <이광수 소설의 이야기와 담론> 홍혜원, 이화여대출판부, 2002. <흙> 이광수, 하서출판사, 2002. <무정> 이광수, 청목사, 2001. <이광수와 그의 시대 1,2> 김윤식, 솔, 1999. <유정> 이광수, 문학과현실사, 1994.
연계정보
-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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