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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관노탈놀이

작품/자료명
강릉관노탈놀이
지정여부
김종군
구분
탈춤
흐름
강릉관노탈놀이는 강릉지역에서 전승되는 단오제 행사의 일부로 연행되는 탈놀음으로 우리나라 탈놀이의 주류인 산대도감 계열의 탈춤과는 다른 서낭제 탈놀이 가운데 하나이다. 제의적 연희의 성격을 가진 농촌형 탈춤으로 봉산탈춤이나 양주별산대놀이, 고성오광대 등이 4월 초파일, 추석, 정월대보름 등과 같은 명절에 공연되던 것 외에도 온전히 오락적인 이유 만으로 공연될 수 있었던 것에 비하여 관노탈놀이는 강릉단오제의 일부로서만 공연되었으며,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연희자들이 관청에 소속된 노비들이었다. 강릉지방에서는 예전부터 음력 5월 5일, 즉 단오절에 서낭신에게 제를 지내는 단오굿이 있었다. 이 행사는 조선 말까지 성행하였지만 일제강점기에 금지되었다가 1965년에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그 맥이 이어져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과거 강릉부(江陵府)에 속해있던 관노들에 의해 연행되던 관노탈놀이는 신이 강림해 있는 상태에서 벌이는 신성한 연극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과거 단오제에서는 5월 1일에 시작하여 단오날인 5월 5일에 마쳤는데, 이 기간동안 괫대를 앞세우고 다니면서 탈놀음을 했다. 신목은 굿청에 모셔두었기 때문에 이를 옮길 수 없으므로 또 다른 신체인 괫대를 만들어 모시고 다니면서 지금은 없어진 약국성황, 소성황 등에서 놀이를 하고 다시 시장과 여러 관청 앞에서도 성대한 연희를 했다고 전한다. 1965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관노탈놀이가 처음 재현된 후 1966년에 강릉에서 일반에게 처음으로 공개되었으며, 현재는 1993년에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권영하 옹을 중심으로 강릉시 유천동 주민 24명으로 구성된 강릉관노가면극보존회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다.
내용
강릉관노탈놀이는 한국 탈놀이 가운데 유일하게 대사 없이 진행되는 무언극이며, 다른 지방의 탈놀이들이 사상좌춤과장, 오방신장무과장, 노장과장, 양반과장, 영감과 할미과장 등에서 알 수 있듯 각 과장의 내용들이 서로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비하여 강릉관노탈놀이는 장자마리춤과장과 양반과 소매각시춤과장, 시시딱딱이춤과장, 소매각시 자살과 소생과장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양반과 소매각시를 중심으로 한 서사적인 내용이 연행된다. 기능보유자였던 고 차형원 옹의 증언에 의하면 강릉관노탈놀이에 사용된 반주악기는 날나리(태평소), 꽹과리, 북, 장구, 징 등이었고 무당들이 연주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꽹과리와 북, 장구, 징으로만 연주되고 있다. 그리고 장단은 질꼬내기(길군악), 굿거리장단, 삼채장단만으로 연주된다.
각 마당별 내용 및 등장인물
다른 지방의 탈놀이에서는 목중와 노장의 갈등, 노장과 소무의 갈등, 양반과 말뚝이의 갈등, 영감과 할미의 갈등 등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갈등은 갈등으로 끝나고 할미가 죽는 등의 비극적인 결말을 맺지만 강릉관노탈놀이에서는 소매각시의 소생으로 모두가 즐거워 하며 행복한 결말로 끝이 난다. 한편, 다른 지방의 탈놀이에서는 대부분 노장이 소무를 차지하기 위해 일어나는 내용이지만 관노탈놀이에서는 양반광대가 소매각시를 차지하기 위해 일어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의 탈놀이에서 양반의 권위에 대한 풍자가 주로 말뚝이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비해 관노탈놀이에서는 소매각시가 양반 권위의 상징인 수염에 목을 매는 것으로 그 권위를 부정하고 있다. 관노탈놀이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은 모두 6명으로 양반광대 1명, 소매각시 1명, 시시딱딱이 2명, 장자마리 2명으로 이루어진다. 양반은 모든 탈놀이에 등장하는 인물로 연희자들이 지배계층에 대한 반감을 풍자하는 주요대상으로 삼았었다. 관노탈놀이에 등장하는 양반도 배꼽까지 수염을 기르고, 담뱃대를 들고 위엄을 부리지만 광대들이 쓰는 고깔을 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여자를 쫓아다니는 희극적 인물로 표현된다. 소매각시는 백분을 바르고 연지곤지를 찍었으며, 쪽진 머리에 다홍치마와 노랑저고리를 입고 왼손에는 노란 수건을, 오른손엔 꽃무늬 있는 부채를 들고 사뿐사뿐 등장한다. 장자마리는 일명 보쓴 놈이라고도 하는데, 가면 없이 머리부터 자루 모양의 장삼 비슷한 것을 땅에 끌리도록 쓴다. 머리를 상투처럼 매어 꼭지가 달리게 하고 옷 속으로 허리에 둥근대를 넣어서 몸이 뚱뚱해보인다. 그 대를 두 손으로 안고 춤을 추고, 옷에는 여기저기 해초와 채소를 단 모습이다. 시시딱딱이는 눈이 크고 입이 두껍고 좌우로 많이 찢어졌다. 코는 울뚝불뚝하고 빽빽하게 얼굴이 얽고 붉은 칠, 검은 칠을 한 아주 무서운 탈이라고 전한다. 베로 만든 청회색의 장광의(長廣衣)와 흑색띠를 띠고 마른 신을 신었으며 손에는 나무로 만든 칼을 들고 등장한다. 제1과장 : 장자마리춤 과장 2명의 장자마리가 나와 요란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불룩한 배를 내밀면서 마당을 빙빙 돌아다닌다. 관중을 희롱하기도 하고 서로 장난을 치며 익살맞은 모습을 보인다. 장자마리 두 명이 양쪽으로 갈라졌다가 서로 힘을 모아 가운데로 와서 한두 번 세게 부딪친 후 뒤로 넘어지면 상대방의 위로 올라타는 동작을 취하는데, 이것은 모의 성행위를 상징한다. 제2과장 : 양반광대, 소매각시춤 과장 양반광대와 소매각시가 양쪽에서 등장한다. 양반광대는 뾰족한 고깔을 쓰고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고 위엄 있게 등장하여 소매각시에게 사랑을 구한다. 소매각시는 얌전한 탈을 쓰고 노랑저고리, 분홍치마를 입고 수줍은 모습으로 춤을 추다가 양반광대와 서로 뜻이 맞아 어깨를 끼고 장내를 돌아다니며 사랑을 나눈다. 제3과장 : 시시딱딱이춤 과장 무서운 형상의 탈을 쓴 시시딱딱이 두 명이 양쪽에서 호방한 칼춤을 추며 뛰어나온다.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사랑에 질투하여 훼방을 놓기로 모의하고 때로는 밀고 잡아당기며 둘 사이를 훼방놓다가 결국 둘을 갈라 놓는다. 제4과장 : 소매각시의 자살과 소생과장 시시딱딱이가 양반광대와 소매각시의 사이를 갈라 한 쪽에서는 양반광대와 놀고 다른 편에서는 소매각시를 희롱하며 함께 춤추기를 원하나 소매각시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나 결국 소매각시는 시시딱딱이와 춤을 추는데 이를 본 양반광대가 크게 화를 낸다. 분통해 하던 양반 광대는 마침내 시시딱딱이를 밀치고 나와 소매각시를 끌고 온다. 소매각시가 잘못을 빌어도 양반광대가 질책하자 소매각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양반광대의 긴 수염에 목을 맨다. 소매각시가 자살을 기도하여 쓰러지자 장자마리는 깜짝 놀라 그 사실을 양반에게 알리고 처음에는 믿지 않던 양반이 점차 장자마리의 보고를 사실로 받아들여 신에게 빌고 정화수를 떠서 소매각시에게 준다. 소매각시는 자신의 결백이 전해짐을 깨닫자 모의자살극을 끝내고 양반광대와 화해한다. 등장 인물들이 모두 기쁨의 춤을 흥겹게 춘다. 마침내 악사들과 배우, 관중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춤으로써 흥겨운 화해의 마당으로 끝이 난다.
전승자 정보
강릉관노탈놀이가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보유자로 지정 받은 연희자는 고 김동하 옹과 차형원 옹이며, 이 두 연희자는 전승이 중단되었던 강릉관노탈놀이의 복원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고 김동하(金東夏, 1884년 1월 12일 생) 옹은 1967년 1월 16일에 관노탈놀이로 기능보유자 지정을 받았으며, 1976년 7월 31일에 작고하였다. 강릉 용강동 출생으로 지정조사 당시 21세에 관노탈놀이를 보았다고 진술하였고 그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었으므로 보유자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전수활동은 하지 못했다. 고 차형원(車亨元, 1890년 9월 5일 생) 옹은 김동하 옹과 함께 관노탈놀이로 기능보유자 지정을 받았다. 강릉 성남동 출생으로 1965년 조사당시에 17세에 관노탈놀이를 본 것이 마지막이라고 하였다. 이 증언들에 따르면 1907년에서부터 1910년 한일합방 전까지 관노탈놀이가 행해졌던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차형원 옹의 자세한 고증으로 현재의 탈놀이 복원이 이뤄졌으나 1968년에 부산으로 이주한 관계로 전수활동은 하지 못했다. 1972년 7월 2일 작고하였다. 권영하(權寧夏, 1918년 6월 4일 생)옹은 1993년 8월 2일에 관노탈놀이의 양반광대역으로 보유자 지정을 받았으며, 1997년 4월 9일에 작고하였다. 강릉 지변동 출생으로 유천동 주민들로 구성된 강릉관노탈놀이 보존회의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상쇠와 양반광대춤을 추었으며, 강릉관노탈놀이의 정착과 활성화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김종군(金種群, 1942년 3월 5일 생)은 2000년 7월 22일에 관노탈놀이로 기능보유자 인정을 받았으며, 1984년부터 권영하 보유자로부터 양반춤을 전수받았다. 현재 강릉관노탈놀이 보존회 회장을 맡고있다. 속초 장재터 출생으로 1세 때 강릉 지변동으로 이주, 1970년대부터 유천동 농악대에 참여하였다.
연계정보
· 재구성 <강릉단오제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94 <한국예술사전(연극/무용/영화 편)>, 대한민국예술원, 1985
참고도서
<강릉단오제 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94 <한국예술사전(연극/무용/영화 편)>, 대한민국예술원, 1985 <한국전통연희의 이해와 실제 Ⅰ>, 유영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1998 <구비문학개설>, 장덕순 외, 일조각, 1971 <봉천놀이마당 민속교육자료집>, 우리교육, 1994
용어해설
강릉단오제 : 강원도 강릉에서 음력 5월 5일, 단오를 전후하여 서낭신에게 지내는 마을 공동축제로 1967년에 중요무형문화재 13호 지정되었다. 강릉관노탈놀이는 바로 이 단오제 기간에 연행된다. 강릉지역에 범일국사(泛日國師)가 죽어서 대관령 서낭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범일국사와 관련이 있는 칠사당, 대관련산신당, 대관령국사성황사 등 여러 서낭에서 차례로 제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단오제를 지내는데 열흘이 걸리고 관속·무당·지방민 등 수백 명이 제사에 참가하였으며, 관중도 수만 명이 몰렸다고 전한다. 지금도 해마다 단오를 전후하여 지내고 있으나, 규모는 옛날보다 축소되었다. 단오제 행사의 내용은 유교적 제사와 무당굿으로 이어지는 종교의례와 탈놀이, 농악놀이, 그네, 씨름, 활쏘기 등의 민속놀이, 수십만의 구경꾼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거대한 난장으로 구성된다. 길군악(질꼬내기) : 풍물에서 행진할 때 쓰이는 쇳가락을 총칭하는 말이다. 일명 질굿, 길굿, 질매구, 길꾸내기라고도 하며, 엇모리형 장단과 자진모리형 장단으로 대별된다. 엇모리형 장단이 고형(古形)이다. 경북, 경기, 경남농악의 길군악, 경기농악의 마당 일채, 길군악7채, 호남 우도 농악의 오채질굿, 좌질굿은 엇모리형이거나 이의 변주형으로 전자에 해당하고 호남 외마치질굿과 다른 고장의 질굿은 후자에 해당한다.
관련사이트
강릉단오제 사이트
관련사이트
문화재청
관련사이트
한국의 탈 (디지털 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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