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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근 (본명:강맹근, 1918.10.9~1996.5.13)

예술가
강도근 (본명:강맹근, 1918.10.9~1996.5.13)
구분
중요무형문화재
문화재관련정보
1988.12.1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보유자 인정 1996.5.13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보유자 사망해제
리뷰
재인-전통 예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1 오장육부에서 뽑는 철성의 독보적 존재 판소리 동편제의 맥을 잇고 있는 강도근(姜道根·73, 인간문화재 제5호)옹. 조선 말기의 대표적 명창 송만갑(宋萬甲, 1865~1939)의 소리제를 이은 그는 동편제 소리의 멸실을 우려하고 있다. 대마디 대장단으로 엇걸어 오장육부에서 냅다 내지르는 학습(소리 공부)이 고되고 힘들어 배우려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이숙자(李淑子, 전북대 국악과 1년)양이 겨우 명맥을 잇고 있으나 역시 동편 소리는 힘 좋은 사내의 단전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것. 17세에 당대 명창 김정문(金正文, 1887~1935)에게 남원군 주천명에서 소리를 배운 강옹은 <흥부가> 중 제비 후리는 대목이 특기. 갑자기 솟구치는 초성과 철성(쇳소리)은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그만의 소리다. “원래 송명창은 3대에 걸친 소리꾼 집안이었제. 나도 그 분 말년에 좀 배웠는디 기맥혔어. 일제 때 이름 날렸던 명창들이 그 어른 밑에서 수도 없이 나왔응게. 김정문, 장판개, 이화중선, 박록주씨 등 명창들은 거의야.” 남원시 향교동의 ‘꼬막집’에 살며 남원 시립국악원에 나가 후학 양성에 전념하고 있는 강옹은 때가 되면 농사일에 열중하며 다른 욕심이 없다고 했다. 스승 송명창은 물론 대개의 소리꾼들이 타고난 혈통 세습을 뿌리치지 못하거나 소리가 좋아 대를 물려 왔다는 숙명론을 털어놓는다. 명창 송만갑은 가왕 송흥록(歌王 宋興祿, 1800년경)의 종손자로, 부친 송우룡(宋雨龍)도 명창이었다. 할아버지 광록(1803년경 흥록과 형제간)도 고수 겸 명창이었으며 남원·구례 지역에 살며 판소리 동편제를 창제, 송문 일가를 이루었다. 동편제 창시자 송흥록은 전설적 명창으로 알려진 김성옥(金成玉, 1795년경 강경 무가 출신)의 큰처남으로 남원군 운봉면 비전리 태생. 흥록은 부친 송첨지(초대 명창 권삼득 수행 고수)에게 소리를 배웠다. 흥록은 철종한테 통정대부(정3품) 벼슬까지 제수받으며 한시대를 풍미했다. 문하에 명창 박만순과 가선 박기홍이 배출됐다. 비록 천민 출신의 예인들이었지만 명창으로 이름만 떨치면 양반의 비호는 물론 임금 앞에도 드나들 수 있었으며 벼슬까지 제수받는 등 당대 최고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만의 한과 설움은 쉽게 떨칠 수 없어 이를 소리에 응축시켜 예술성을 더하는 한편 계급 사회에도 저항했다. 일단 명창이 되면 팔자가 뒤바뀜은 물론 오늘날과 같이 대중의 우상이었고 스타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명창의 대물림과 무가의 세습은 뿌리를 내려왔다. 흔히 동·서편제로 분류되는 판소리는 이 대가들이 살아 온 지역을 구분지어 나눠 놓은 것이다. 전라도 섬진강을 경계로 남원·구례·흥덕·고부는 동쪽이라서 동편제고, 광주·나주·보성·장흥 등지는 서편이므로 서편제라 이른다. 여기에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중고제(김성옥, 염이달 명창이 법제 계승)가 파생되나 동편제에 가까운 소리 가락이다. 동편 가락은 우조(꿋꿋하고 장엄하며 엄격한 맛을 지닌 격조)를 내세우며 창의 음성이 뱃속에서 우러나오므로 소리가 정중하고 온화하면서도 씩씩한 맛을 준다. 단전에서 뽑아내고 쇠망치로 내리찍는 철성이 많아 그만큼 고되고 힘이 들어간다. 강옹은 “이래서 동편 소리를 이으려는 소리꾼이 줄어들고 맥조차 끊어지려 하고 있다.”면서 살아 생전 사내 후계자를 길러 내고 말겠단다. ‘남원국악원’에서 초·중생들이 학습 연마중이나 꼴을 볼 수 있을런지를 걱정하고 있다. 제자인 이숙자(남원군 대산면 풍촌리 태생)양은 대물린 소리꾼 집안은 아니나 동편제 위기를 실감하며 결혼도 미룬 채 굳은 결의를 보이고 있다. 여름방학엔 구례 수라 폭포에 들어가 피를 쏟는 독공에 들어가겠다고 결의를 보인다. 희대의 명창 송문 일가는 만갑 3대에서 혈통 대물림을 끝내고 말았다. 만갑의 아들 기득씨는 ‘예인’, ‘쟁이’ 소리에 피멍들어 소리 학습을 끊어 버렸다는 것. 6년 전 화엄사 입구에 송만갑 명창 기념비가 세워질 때 가왕 3대의 후손은 아무도 나타나질 않았다. 기득 씨는 일제 때 광산경찰서 경무보를 지내면서 세습 재인의 후예임을 내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득씨 역시 그렇게 소리를 잘했다는 현지 노인들의 증언이다. 술 한잔 얼큰해지면 “야, 나가 누군줄 알어. 나가 명창 송만갑의 큰아들이여!” 그러고는 펑펑 울어댔단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선조들의 행적을 옷섶에 접어 두고 기죽어 살아야 했는지 신분 사회가 타파된 오늘의 사회 현실에 묻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대중의 우상이면서도 유가 전통에 옭매인 시대 관념은 그들의 마음을 닫아 놓고 있다. 강도근(姜道根)옹은 말한다. “집안 얘기는 혀서 뭘혀. 집안 내력 들추자면야 굿 한 번 안 해 보고 성황제 안 지내 본 집 있간디.”<세계일보>, 이규원, 1990년 7월 19일 인간문화재시대를 연다 30 동편제만을 고집해온 소리꾼 남원서 후진양성에 평생바쳐 판소리는 발상지의 지역적 특성과 사사계보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파로 나뉜다. 동편제는 전라북도 남원, 구례, 순창 등지를 중심으로 명창 송흥록의 소리를 숭상하는 소리이고, 서편제는 전라남도 광주와 나주 등지를 중심으로 명창 박유금의 소리를 세우는 소리를 가리키며, 중고제는 염계달, 금성옥이 유포한 소리로 동편제와 서편제의 중간을 걷고, 주로 경기도, 충청도 지방에서 즐겨 부르던 소리를 말한다. 이와같이 지역적으로 유포되던 판소리의 유파는 차츰 그 전통이 무너져 최근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특색을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에 유독 고집스레 동편제만의 맥을 잇겠다며 남원에 칩거하고 있는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판소리 흥보가의 인간문화재 강도근옹이다. 남원은 국악의 본고장이라 할만큼 예로부터 걸출한 명창과 명인들을 많이 길러냈다. 우리나라 5악성 중의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거문고의 대가 옥실고는 이곳 운봉 출신이며 정조 때의 판소리명창 권삼득은 이곳 주천면 출신이고, 판소리의 중시조로 일컬어지며 가왕이란 칭호로 판소리계 최고명창으로 떠받들어지는 송흥록이나 고종황제 생일잔치에 어전에서 노래하여 절찬을 받던 장재백, 한강 위에 줄을 매고 대원군 앞에서 줄을 타 절찬을 받았던 장재봉도 운봉 출신이다. 일제시대 판소리계의 왕자로서 조선성악연구회장직을 역임하면서 국악 전수에 크게 기여한 송만갑과 함께 일제시대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유성준, 송만갑과 유성준의 제자가 된 김정문, 여자명창으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다가 간 이화중선과 그의 동생 이중선, 인간문화재로 활약하다 간 여자명창 박초월도 이곳 남원출신이다. 가야금의 명수 장신진, 대금의 명수로서 인간문화재로 활약하다 간 강백천도 이곳 출신이며 지금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간문화재 강도근옹을 비롯하여 인간문화재후보로서 활동하고 있는 안숙선·오정숙도 이곳 남원 출신이다. 동편제의 맥을 잇기 위해 남원시립국악원에서 창악강사로 활동하면서 남원을 지키고 있는 강도근옹을 찾아갔다. 남원시내를 가로지르는 요천을 사이에 두고 광한수와 마주하고 있는 남원시립국악원의 창악실에서는 옹의 흥보가 잦은 모리가락이 낭랑하게 울려퍼져 나오고 있었다. 옹은 지금의 남원시 향교동에서 1918년 줄타기의 명인이었던 강원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호적명은 강맹근이다. 그는 11살 때부터 3년 동안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고는 20여 마지기의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목소리가 우렁차 소리를 배우면 크게 성공하겠다는 주위의 권유로 18세 되던 1935년부터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첫번째 선생은 남원군 주천면에 살고 있던 김정문이었다. 김정문은 그의 목소리를 시험해보고 ‘쓸만하다’며 문하에 거두었던 것이다. 김정문은 송만갑의 수재자로, 유성준의 생질인데 남원권번에 나와 소리선생을 하고 있었으며 문하에는 박록주를 비롯하여 훗날 국내 국악계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즐비했다. 청년 강도근은 남원권번과 주천을 오가며 열심히 소리공부를 했다. 교과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녹음기가 있는 때도 아니어서 다시 들어볼 수도 없었다. 스승이 한꺼번에 많은 분량의 가사를 일러주니 바짝 정신 차리고 들었다가 연습하지 않으면 배울 수가 없었다. 마음먹은 대로 진전이 안 되자 중도 포기할 생각도 몇 번인가 하였으나 그때마다 하루가 지나면 가사와 장단이 저절로 떠올라 계속하게 되었다. 흥보가를 마치고 차츰 신명이 나 다른 소리를 공부하고 있는 무렵 스승이 타계하자,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지 8년 만에 다른 선생을 찾아야 했다. 강옹은 아예 스승 김정문의 사부인 송만갑을 찾아갔다. 사조를 스승으로 삼은 셈이다. 서울로 올라와 익선동에 있던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에게 사사하면서 정진하기를 2년, 강옹은 스승 앞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뽐낸 기회가 생겼다.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 스승에게 인정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첫 대목을 시작하자마자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것도 소리라고 하는 거야. 건방만 잔뜩 들었구나. 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라.” 강옹은 그길로 봇짐을 싸들고 스승 앞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실망도 컸으나 이것이 자신에게 득음의 기회를 주기 위한 스승의 채찍이라는 사실을 알고, 득음을 않고서는 바깥세상에 나오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하동 쌍계사에 들어가 독공을 시작하였다. 독공을 하면서 당시 하동에 살고 있던 유성준을 찾아가 김정문에게 못다 배운 수궁가를 끝마쳤다. 수궁가만 마치고 몇 달만에 유성준의 길을 떠났는데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유성준의 까다로운 성미 때문이었다. 소리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불이 들어있는 담뱃대로 이마를 지져 강옹의 이마에는 지금도 흉터가 남아 있다. 그 후로 강옹은 독공에만 정진했다. 마뿌리로 허기진 배를 채워가며 종일 폭포 앞에서 소리를 했다. 어느날 폭포 앞에서 소리를 질러대자 온몸이 달아오르면서 목에서 시커먼 피가 넘어왔고 온몸이 쑤시고 결려 운신할 수가 없었다. 선배명창들의 말대로 똥물을 물에 풀어 마셨다. 열도 내리고 몸도 거뜬해지면서 목도 트였다. 이곳에서 득음한 그는 동일창극단, 조선창극단, 호남창극단을 전전하며 임방울, 박동실, 오태석, 박초월, 김연수 등과 공연을 하면서 해방전후의 혼란기를 보냈다. 그러나 창극단생활도 오래 계속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소리가 명창의 경지에 미치지 못했다고 판단한 그는 6·25 전쟁 중인 1952년 쌍계사 계곡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다시 독공을 계속했다. 강옹은 이곳에서 전후 7년간에 걸쳐 독공을 했다. 그는 송홍록이 귀곡성을 얻기 위해 3년 동안 비오는 밤이면 공동묘지를 찾아 밤을 새웠으며 권삼득이 물소리와 새소리를 얻기 위해 폭포 아래에서 정진했던 고사를 비유하면서 자기가 겪은 독공의 고난을 설명했다. 강옹은 그때의 독공이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했다. 1959년에 남원에 돌아온 강옹은 지금까지 후진양성에 몰두하고 있다. 틈틈이 전국국악경연대회와 전국판소리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명창으로서의 이름을 날리게 되자 곳곳에서 초청을 했으나 모두 사양하고 끝내 고향에 남기를 고집했다. 1973년 남원에 시립국악원이 생기면서 이곳 창악강사로 초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강옹은 30여 년 동안에 수백명의 문하생을 길러냈다. 안숙선, 오갑순, 성우향, 김정숙, 한농선, 홍성덕, 강정흥 등 명창과 많은 국악인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그동안 국악에 끼친 공로로 姜옹은 ‘한국국악협회 공로상’(1981), ‘남원시민의상 문화상’(1985), ‘KBS국악대상’(1986), ‘자랑스러운 전북인의 상 대상’(1988) 등을 수상하였으며 198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의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 남원국악원에 등록된 학생은 150여명, 그 중 기악과 무용을 제외하고 판소리를 공부하는 학생만도 50여명에 달하는데, 강옹은 이들을 1대 1로 지도하고 있다. 73세의 고령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이 양반다리로 학생과 마주 앉아 직접 북장단을 치면서 목청을 돋구고, 소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교정해주는 진지한 모습에서 그의 집념을 읽을 수 있었다.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더니 근력이 부쳐서 은퇴할 생각도 있으나, 후계자도 양성이 안된 마당에 동편제의 맥을 끊는 사람이 될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강옹은 동편제가 후계자 없이 사라질 것을 녹음하는 것을 그토록 기피해 왔던 태도를 기피해 왔으며 지난해 11월 첫 음반을 내놓았다. 신나라레코드사는 강옹을 여러 차례 설득한 끝에 마침내 그의 동의를 얻어 흥보가와 수궁가를 채록, 각각 3장의 LP음반을 내는데 성공했다. 이번에 녹음되어 나온 흥보가는 전형적인 동편제창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작품이다. 후계자가 없어 동편제 판소리의 법통이 강옹을 끝으로 끊길 것을 생각하니 서글프기만 했다. <월간 문화재>, 1991년 1월, 제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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