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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가

작품/자료명
잡가
지정여부
경기민요 - 묵계월, 이은주, 이춘희, 서도소리 - 이춘목·김광숙, 이은관, 선소리산타령 - 황용주
구분
민속악
개요
잡가는 조선 말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번창하였던 시가의 한 갈래이다. 원래 잡가라는 말은 <동가선(東歌選)>·<남훈태평가> 등의 가집에 나타나는 곡명에서 유래된 것이나 문학적으로 볼 때는 시조·가사 등과 구별되는 일군의 시가류를 지칭한다. 이러한 잡가의 개념에 대한 견해는 문학계와 음악계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으며 학자간에도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음악계에서 잡가라 하면 서울·경기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12잡가를 가리키나, 넓은 의미로는 서도잡가와 경·서도지방의 입창인 산타령, 그리고 휘모리잡가와 남도지방의 입창까지를 포함하는데, 잡가는 전문가의 음악이다.잡가는 전체적으로 시조·가사·판소리·민요 등 여러 갈래의 장르가 혼용되어 형성되었다. 시조인 경우는 사설시조가 많이 원용되었으나 종장형태의 구성이 미흡하며, 가사인 경우는 4음보격의 율조를 깨뜨리고 있다. 판소리에서는 부분만이 노래되었고 민요인 경우는 세련미가 가미되어 소박미가 줄어들었다. 가령, 서울·경기지방의 12잡가는 이 지방의 민요와 같은 선법으로 된 긴 노래이나, 어떤 곡은 서도지방의 선법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점은 경기잡가의 형성에 서도지방 음악이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케 한다. 만약 이러한 변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잡가가 아니고 원래의 장르에 소속될 수밖에 없다.잡가가 문헌에 등장한 것은 대학본 <청구영언>에서 비롯된다. 여기에는 <상사곡>·<권주가>·<군악>·<어부가>·<양양가>·<매화가> 등 16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몇 편이 빠지고 새로운 시가가 추가되어 이른바 12가사가 이루어졌다. 12가사는 오랜 시대에 걸쳐 불리던 노래들이 19세기 초 내지 중엽에 판소리의 열두 마당과 같이 짝을 맞추어 12가사가 형성되었으리라 보인다. 여기에서 영향을 받아 <유산가>·<적벽가> 등을 묶어 12잡가라 한 것은 그것보다 뒤에 이루어진 듯 하다.잡가를 형성한 계층은 삼패나 사계축의 소리꾼이다. 이 방면의 명창으로는 추교신·조기준·박춘경이 유명하다. 12잡가의 첫머리에 오르는 <유산가>가 박춘경이 지은 노래였다고 하니 비록 잡가 중 일부의 시가는 그전부터 있었다 하겠으나 12잡가로 묶여진 것은 19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다. 그 뒤 일제 침략으로 반상의 차별이 무너지고 창가나 유행가가 대두되기 전인 1930년대까지가 잡가가 번창한 시기로 볼 수 있다.이러한 잡가의 향유층은 신흥도시 상공인에서 비롯하여 일반서민 및 사대부계층까지 확대되어 갔다. 그것은 삼패나 사계축을 불러 노래를 시킬 수 있는 계층이 처음에는 신흥도시 상공인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점잖은 양반층에서는 가곡이나 가사와 달리 잡가는 즐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츰 서민들의 애호를 받게 되고 여기에 자극되어 일부 양반계층에게까지 잡가가 감상, 수용된 듯 하다. 이와 같은 잡가는 조선 말기에 형성되고 번창하다가 1930년 전후 유행가 등 서양풍의 노래에 밀려났다. 조선조의 최종 장르이기 때문에 종래부터 있었던 시조·가사·판소리 등의 원용이 가능했으나 새로운 사조에 밀려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광복 이후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잡가도 <가요집성>(歌謠集成) 등의 단행본으로 자료정리작업과 연구가 이루어졌다.
내용
잡가의 종류 현존하는 잡가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경기잡가·서도잡가·남도잡가로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경기잡가는 다시 산타령(입창), 12잡가(좌창), 휘모리잡가, 잡잡가로 나누고, 서도잡가는 산타령, 잡가, 시창과 송서로 나눈다. 그러나 남도잡가는 곡목으로만 나누어 연가곡처럼 한덩어리로 계속 부르지 경기잡가나 서도잡가처럼 하위개념으로 세분화하지 않는다.
경기잡가
경기잡가는 서울·경기지방에서 주로 불렸고, 가사와 같이 긴 사설을 도드리장단이나 세마치장단으로 짠 긴잡가와 사설시조형의 긴 사설을 빠른 장단으로 짠 휘모리잡가, 그 외에 전문예능인들의 노래인 잡잡가가 있다. 대개 19세기 중엽에 발생한 속요로 지금의 서울 청파동 일대의 사계축(四契軸) 소리꾼들 사이에서 널리 불렸다. 그 당시에는 8잡가와 잡잡가(雜雜歌)로 구분하였는데, 8잡가란 <유산가(遊山歌)>·<적벽가(赤壁歌)>·<제비가>·<집장가(執杖歌)>·<소춘향가(小春香歌)>·<선유가(船遊歌)>·<형장가(刑杖歌)>·<평양가(平壤歌)> 등이고, 잡잡가는 <달거리>·<십장가(十杖歌)>·<방물가(房物歌)>·<출인가(出引歌)> 등이다. 12잡가는 변형유절형식이며 주로 독창으로 연주된다. 실내에 앉아서 연주하기 때문에 좌창(座唱)이라고도 부르며, 선율악기의 반주는 없고 장구(杖鼓)의 리듬적인 반주가 따르는데, 장단은 6박의 도드리장단이 많이 쓰인다. 이밖에 긴잡가에는 <풍등가(豊登歌)>·<금강산타령>·<토끼화상>·<자진방물가>·<변강쇠타령> 등이 있다. 휘모리잡가는 주로 삼패기생(三牌妓生)과 소리꾼 사이에서 널리 불린 소리로서, 예전에는 소리꾼들이 모이면 제일 먼저 긴잡가를 부르고, 다음에 선소리를 부르고, 마지막으로 휘모리잡가를 불렀다 한다. 현재 전창되는 곡으로는 <곰보타령>·<생매잡아>·<만학천봉>·<육칠월 흐린날>·<한잔부어라>·<병정타령>·<순검타령>·<기생타령>·<바위타령>·<비단타령>·<맹꽁이타령> 등이 있다. 휘모리잡가는 빠른 템포로 해학적인 가사를 엮어 부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쟝르는 어느 것이나 우스꽝스런 내용을 빠르게 엮어 부른다. 휘모리잡가는 본래 사설시조에서 파생된 변형으로 그 음악의 구성도 시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2잡가
경기12잡가의 특징은 경기 특유의 율조로서 대개 서경적 혹은 서정적인 긴사설로 비교적 조용하고 은근하며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서정적인 표현이 많다. 조선시대 서울 장안의 소시민들의 모임장소인 ‘공청’을 통해 12잡가가 발생하였으므로 공청소리문화의 특색을 잘 담고 있다. 음악적 특징은 12가사의 그것과 비슷하여, 장단이 가사처럼 4분의 6박자인 도드리장단으로 된 것이 대부분이며 예외로 <집장가>만이 세마치장단으로 되어 있다. 음계는 서도민요의 선법을 딴 것이 대부분이고, <선유가>·<평양가>·<달거리>·<출인가> 등이 경기민요처럼 경제(京制)로 되어 있다. 형식은 약간 불투명한 유절형식(有節形式), 즉 마루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설은 가사가 지식층들이 즐겨 인용하는 한문시를 많이 혼용하고 있는 데 반하여, 잡가는 서민들의 직설적인 표현이 많다. 창법은 가사가 가늘고 부드럽고 세련된 발성법에 때로는 속청을 쓰고 정악적인 표현법을 써서 마치 세피리를 연상시키는 데 반하여, 잡가는 소위 잡가목이라 하여 굵고 힘차고 폭이 넓은 요성(搖聲)을 써서 마치 굿거리 때 부는 향피리 같은 감이 난다. 12잡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산가 - 12가사 중에서 "백구사"를 가사의 백미로 한다면, 잡가에서는 이 유산가를 잡가의 백미로 꼽는다. 삼춘가절(三春佳節)을 맞아 우리나라 각처의 좋은 경개를 중국 명승지에 비교하면서 찬양하는 내용이며, 서도소리 선법으로 부르며, 한 장단은 6/4박자 도드리 장단이다. 전체 14절이 전·후반부 7절로 양분되는데, "제비는 물을 차고"부터 구분된다. 적벽가 - 적벽가는 삼국지(三國志)의 내용 중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한 조조(曹操)가 관운장에게 목숨을 비는 광경을 그린 노래이다. 싸움에서 몰린 조조가 화용도로 쫓겨가는 초라한 행색과 이긴 자의 충천하는 위엄을 눈앞에 그리듯이 묘사하고 있다. 전반에는 조조의 구차한 구명을 그리고, 후반에는 관우의 너그러운 덕으로 조조가 목숨을 건져 화용도를 벗어나는 데까지를 엮었다. 전반은 8마루, 후반은 7마루이다. 장단은 도드리장단이고, 서도소리 선법으로 불린다. 제비가 - 새를 주제로 한 이 곡은 "제비가 별조"라고도 하며 한자곡명은 "연자가"이다. 곡의 처음이 "만첩 산중 늙은 범 살찐 암캐를 물어다 놓고 어르고 노닌다. 광풍에 낙엽처럼 벽허(碧虛) 둥둥 떠나간다"로 제법 기발하게 시작하나 뒷부분으로 갈수록 평이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곡은 매우 널리 애창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곡조와 리듬의 변화가 비교적 재미있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처음은 도드리 장단이고, "제비를 후리러 나간다"부터 세마치 장단으로 바뀌면서 다른 긴잡가(12잡가)에서 맛볼 수 없는 비약적인 가락이 돋보인다. 음계는 본질적으로 서도소리의 음계를 사용하면서도 평조를 혼용하고 있다. 집장가 - 판소리 춘향가 중의 "집장가"를 잡가로 옮긴 노래이다. 춘향이 관장답지 못한 변사또에게 엄숙한 말로 "유부 겁탈하는 것은 죄 아니고 무엇이오"하고 대꾸함을 마지막으로 모진 형벌을 받게 되는 장면을 그린 노래이다. 집장 군노의 형장 다루는 거동, 집장 군노의 형장 들고 내닫는 모습, 춘향의 엄형을 당하는 형상 등을 엮어 나가고 있다. 도드리 장단이나 실제로는 경쾌한 세마치장단으로 치는 것이 보통이며 모두 9마루로 되어 있다. 소춘향가 -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춘향이 이도령과 처음 만나는 장면을 그린 노래이다. 장단은 도드리 장단으로 6/4박자이며, 서도소리 선법으로 부른다. 판소리에 춘향가의 이름이 있는 탓에 춘향가라 하지 못하고 "소춘향가"라 하였다. 전체는 9마루로 구분된다. 선유가 - 산을 노래한 유산가(遊山歌)에 대가 되는 것으로, 물놀이를 노래한 것이지만 가사의 내용은 일관성이 없다. 이것은 문학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소리꾼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 오면서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가세가세"의 후렴이 중간에 삽입되기 때문에 "가세타령"이라고도 한다. 전체 6마루는 3마루씩 전후로 나뉘는데, 이 중 전반부 3마루를 선유가라 하고 후반부는 따로 떼어 "풋고추" 또는 "출인가"라고 하여 독립시키기도 한다. 도드리 장단에 맞춰 부른다. 형장가 - 판소리 춘향가 중 신관사또에게 모진 형벌을 받고 옥중생활을 하는 춘향의 애닯은 정경을 노래한 것이다. 처음 네 마루는 도드리장단, 뒤의 18마루는 세마치 장단에 맞추고, 유산가와 같은 조로 부른다. 평양가 - 8 또는 9장단의 짧은 가락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곡이다. 평양기생 월선(月仙)이네로 놀러가자는 야유랑(冶遊郞)의 콧노래로, 도드리 장단에 맞추어 부르며 전체는 11마루로 구분된다. 달거리 - 그 달에 있었던 옛 일을 말하고 그 달의 정경과 행사(行事)와 회포를 늘어놓는 월령체(月令體)이다. 가사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단은 정월부터 3월까지를 월별(月別)로 노래하였다. 2단과 3단은 서로 관련성이 적고 어법이 유치한 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소리판에서 늘어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달거리는 많이 불리워졌는데 그 까닭은 일반적인 긴잡가 대부분이 차분한 느린도드리 장단인데 비해서 달거리는 1단은 세마치장단, 2단은 도드리장단, 3단은 굿거리장단 등 변화가 있기 때문에 즐겨 부른 것이라고 한다. 십장가 - 판소리 춘향가 속의 십장가를 서울 소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춘향이 매를 맞는 대목으로 한 대 맞을 때마다 맞은 대 수의 숫자로 시작하는 사설을 늘어놓는다. 춘향이 유산가조로 허두를 부른 다음, 이부불경(二夫不更)하는 절개를 노래한다. 유산가조인 첫마루의 가락을 계속 되풀이하기 때문에 단조롭다. 도드리 장단에 서도소리 선법으로 부르며 전체는 11마루로 구분된다. 출인가 - 같은 12잡가의 하나인 선유가의 후반부에 드는 풋고초부터 따로 풋내어 부르게 된 곡으로 "풋고초"라고도 한다. 춘향과 이도령이 이별하는 내용 등 여러 가지 일관되지 않은 내용이 얽혀 있으며, 도드리장단에 맞추어 부른다. 방물가 - 경기잡가 중에서도 잡잡가(雜雜歌)에 속한다. 방물장수가 파는 패물이며 잡화 등을 주워 섬기지만, 사실은 남녀의 사랑이 주제를 이루고 있다. 한양으로 떠나는 님에게 애가 타는 아녀자의 속도 모르고, 집 치례·세간 치례·의복 치례·노리개 치례 등 허다한 물건을 들추어내며 그녀의 소원을 풀어 주겠다고 돈 자랑하는 촌부자의 노래이다. 사랑하는 낭군을 한양으로 떠나보내는 한 여인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가사로 “서방님 정 떼고 임 이별한 대도 날 버리고 못 가리라”로 시작하여 “고대광실(高臺廣室)도 나는 싫고, 금의옥식(錦衣玉食)도 나는 싫소. 원앙충충 걷는 말에 마부담하여 날 다려가오”로 끝맺고 있다. 도드리장단에 서도민요에서 딴 가락으로 엮었으며, 유절형식(有節形式)에 가까운 음악형식이다. 별로 어려운 가락은 아니나 요사이 부르는 이가 드물다.
휘모리잡가
휘모리잡가는 우스꽝스러운 익살과 군말투성이의 사설을 Parlando Style처럼 빠른 속도로 촘촘히 휘몰아쳐 부르는 연주형태에서 명칭이 유래하였다. 사설은 대개 장형시조의 변형인데, 이를 자진타령장단에 얹어 촘촘히 엮어부른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설시조의 한 갈래에 포함되기도 한다. 다만, 장단을 볶는타령 장단으로 바꾸고 사설에 군말이 많이 들어가며 발성법이 시조와는 달리 잡가조(雜歌調)라는 것뿐이다. 또한, 휘모리잡가의 마지막 부분은 예외없이 시조의 종지형처럼 4도 아래로 뚝 떨어져 끝나고 있어 이 점에서도 시조의 한 변형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휘모리잡가에는 <곰보타령>·<생매잡아>·<만학천봉>·<육칠월 흐린날>·<한잔 부어라>·<병정타령>·<순검타령>·<비단타령>·<맹꽁이타령> 등이며 음악적 특징이나 창법은 12잡가와 공통된다.
잡잡가
산타령·12잡가·휘모리잡가 외에 전문예능인들의 노래를 모두 잡잡가라고 부르는데, <풍등가>·<장대장타령>·<금강산타령>·<범벅타령>·<국문뒤풀이> 등이 전해온다.
서도잡가
서도잡가는 황해도와 평안도의 직업예능인에게 전승되어오는 전문가들의 노래를 가리키며, 서도민요 선법으로 되어있다. 사설이 특히 길고, 장단 없이 노래한다는 점등을 특징으로 한다. 입창에 대하여 앉아 부른다 하여 서도좌창이라고도 한다. 서도잡가에는 <공명가(孔明歌)>·<사설공명가>·<제전(祭奠)>·<초한가(楚漢歌)>·<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 ·<관동팔경(關東八景)>·<관산융마>·<적벽부(赤壁賦)> 등이 있다. 이것들을 대체로 판소리의 한 대목이나 단가(短歌)와 같이 긴 사설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긴 사설을 간단한 가락에 얹어 촘촘히 엮어 나간다. 선율은 수심가 토리로 된 것이 많고, 경기잡가가 일정한 장단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서도잡가는 일정한 장단이 없이 사설의 자수(字數)에 따라 3박, 4박, 5박, 6박 등의 불규칙적인 장단으로 되어 있다는 점과 노래가 끝날 때는 반드시 수심가와 같은 가락으로 끝난다는 점이 특징이다.적벽부와 관산융마는 글을 읽는 듯한 소리로 노래하기 때문에 시창(詩唱) 또는 송서(頌書)라 하기도 한다. 산타령·서도잡가·시창과 송서로 세분된다.서도잡가는 서사적인 긴 사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긴 사설을 <엮음수심가>처럼 간단한 가락에 사설을 촘촘히 엮어서 불러나가다가 제일 끝의 한 구절만을 <수심가>와 똑같은 가락에 얹어서 부른다. 서도잡가는 경기의 긴잡가가 도드리 장단으로 되어 있는 데 비하여, 일정한 장단이 없는 무장단(無長短)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사설에 따라 장단이 들쭉날쭉하여 3·4·5·6박 등이 엇갈려 나온다. 창법은 콧소리로 얕게 탈탈거리며 떠는 소리, 큰 소리로 길게 쭉 뽑다가 갑자기 속소리로 콧소리를 섞어서 가만히 떠는 소리 등이 특징이다. 이러한 창법은 남도의 목을 눌러서 내는 창법이나 경기의 우아한 두성(頭聲) 창법과는 매우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음계는 솔·라·도·레·파·솔·라·도의 5음음계인데 이 가운데 솔·레·파의 3음, 즉 5도 위에 단3도를 쌓아올려 이 3음을 근간으로 삼고 있다. 레는 콧소리로 얕게 탈탈거리며 떨고 파는 크게 질러내지만 하행성음으로 마침내는 레로 떨어진다. 라와 도는 주로 경과적으로 사용된다. 솔·라·도의 높은 음들은 주로 높이 질러낼 때 사용한다. 공명가 - 제갈공명이 남병산에 올라가서 동남풍(東南風)을 비는 광경을 노래했다. 공명가는 3박자, 4박자, 5박자, 6박자 등 글자수에 따라 장단이 변하는데 이것은 서도잡가의 한 특징이다. 음악적으로는 단조롭지만 듣기에 재미있는데 노랫말의 내용 전개도 재미있지만 서도소리 특유의 음 색깔이 독특한 맛을 준다. 공명가의 끝부분은 수심가조로 부른다. 사설공명가 - 가사의 내용은 뇌성벽력(雷聲霹靂)과 풍우대작(風雨大作)을 마음대로 일으키는 공명(孔明)이 남병산에서 동남풍을 비는 형상과 천지 신명에 고사하는 축문이 그 골자가 되고 있다. 악곡 형식이나 장단은 공명가와 같고 수심가조로 끝맺는 것도 같다. "사설공명가"는 "공명가"보다 사설 수가 적은데, 사설이라고 해서 반드시 가사가 더 긴 것은 아니다. 즉, 음악적으로 리듬이 촘촘한 것이 곧 "사설"이지, 사설수가 많고 적음으로 기준 삼는 것은 아니다. 제전 – 제전은 북망산에 묻힌 임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드리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읊은 노래이다. 총 23악절 구성으로 첫째 대목은 제물(祭物) 고이는 법을 풀이하고, 둘째 대목에서는 제상(祭床)에 차려진 산해진미의 이름을 든 다음 초헌(初獻)·아헌(亞獻)·종헌(終獻)의 절차를 그리고, 셋째 대목에서는 결국 한줌 흙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인생의 무상함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맺고 있다. 세마치장단이 근간을 이루며 서도 특유의 애절한 창법으로 노래한다. 초한가 - 초한가는 판소리를 부르기 전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단가와 서도잡가의 두 갈래가 있다. 단가 초한가는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진 초패왕의 이야기를 다룬 노래이다. 한패왕이 한신으로 하여금 진을 치게 하는 내용, 장자방의 옥통소 소리에 초패왕의 군사들이 사기를 잃게 만드는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전쟁에 8년씩이나 남편을 보내고 남겨진 가족들 특히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내의 심정이 애절하게 그려져 있는 노래이다. 서도 잡가의 하나인 초한가는 곡조가 단가와 엄연히 다르지만, 노랫말은 전체적으로 비슷하며 약간 다르다. 잡가 후반부의 초패왕의 신세 한탄 내용은 단가에 없는 내용이다. 대개 4구절을 한 단위로 반복하는데, 자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장단이 일정하지 않은 점은, 같은 서도잡가의 하나인 공명가와 같다. 노래를 끝마칠 때는 수심가조롤 부르는데, 이는 서도 잡가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추풍감별곡 - 조선 말엽의 소설 <채봉감별곡(彩鳳感別曲)>에 나오는 노래이다. 장필성과 백년 가약을 맺었다가 평양 기생이 된 여주인공 채봉이, 장필성을 그리워 하는 정을 읊은 내용이다. 송서조(誦書調: 고문이나 옛 소설에 가락을 넣어 구성지게 읽어 나가는 것)로 부르는 것인데, 1장단을 4박씩 읊어 나간다.
송서와 시창
격조 높은 한문가사를 고동박이 분명치 않을 정도로 느리게 부르는 형태의 노래가 시창이고, 글읽는 형태로 노래하는 것은 송서이다. 두 노래 모두 조선조 중엽까지 유행했던 것으로 보이는 사대부들 노래 형태의 단편적인 모습으로 짐작된다. 시창으로 부르는 관산융마는 석북 신광수(申光洙)가 장원급제한 시제이고 송서 적벽부는 중국 송대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시인데, 적벽부는 단가로도 부르고 있다. 관산융마 - 조선 정조 때의 시인 신광수(申光洙)가 지은 공령시(功令詩:과거 때 쓰는 詩體)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를 자유리듬에 얹어 부른 노래이다. 느리고 꿋꿋한 선율로 서도잡가 중에서도 기품 있는 곡으로 손꼽힌다. 공령시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두보(杜甫)가 표랑생활을 하다 만년에 악양루(岳陽樓)에 올라 탄식한 것을 읊은 시로 두보의 글귀가 많이 인용되어 있다. 그 사설은 “추강(秋江)이 적막(寂寞) 어룡랭(魚龍冷)하니 인재서풍중선루(人在西風仲宣樓)를 매화만국청모적(梅花萬國聽暮笛)이요, 도죽잔년수백구(桃竹殘年隨白鷗)를 오만낙조의함한(烏蠻落照倚檻恨)은 직북병진하일휴(直北兵塵何日休)오…”이다. 적벽부 - 중국 송나라 때, 작가 소식(蘇軾, 號는 東坡)가 황저우(黃州)로 귀양 갔을 때 적벽 아래에서 한 나그네와 함께 뱃놀이한 이야기를 읊은 운문이다. 인생의 의미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인생이 허무하다'고 탄식하는 나그네의 말에 대해,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그 반론을 제시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색과 함께 강산 풍월(江山風月)의 아름다움을 향수(享受)하는 기쁨이 잘 드러나 있다. 양면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동양적 사고를 엿볼 수 있으며 노장 사상(老莊思想)이 바탕에 깔려 있는 작품으로 널리 애송되는 소식의 대표작이다.
남도잡가
남도잡가는 남도입창이라고도 하며 전라도지방에서 부르던 잡가이다. 본래 사당패가 부르던 것으로 불교적인 내용의 <보렴>을 첫 곡으로 부르고 이어 <화초사거리(花草四巨里)> 외에도 <육자배기>·<자진육자배기>·<흥타령>·<개구리타령>·<새타령>·<성주풀이> 등을 치지만 <육자배기> 이하는 민요에 넣기도 한다. 앞의 곡은 통절형식이고 <육자백이> 이하는 유절형식의 악곡이다. 오늘날 무대에서 공연되는 남도입창의 연주에는 소수의 관현악기로 이루어진 반주가 따른다. 발성법이나 시김새는 판소리와 비슷하여 목을 눌러내는 발성법을 사용한다. 시김새는 대개 계면조로 일관하며 시나위청에 가깝다. 판소리는 특정한 이야기 줄거리가 있어서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많은 표현력이 필요하지만, 잡가나 민요는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대개 평계면성(平界面聲) 내지는 시나위청으로 흥겹게 소리한다. 떠는 목, 평으로 내는 목, 꺾는 목의 독특한 목 구성을 가지고 있어 쉽게 판별할 수 있다. 떠는 목과 평으로 내는 목과 꺾는 목 사이는 장2도에 가깝다. 특히 꺾는 목은 그 음보다 약 반음 위에서부터 꺾어 흘러내리는데, 꺾는다는 말은 먼저 전타음(前打音)을 강하게 내야 하므로 목소리를 꺾는 듯한 인상을 듣는 이가 받게 되기 때문이다. 장단은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 등을 많이 사용하는데, 대개 처음은 느린 중모리로 시작하다가 차츰 빨라져서 중중모리(또는 굿거리)를 거쳐 자진모리로 끝나게 된다.
보렴
“상래소수공덕해(上來所修功德海)요 회향삼처실원만(回向三處實圓滿)을 봉위주상전하수만세(奉位主上殿下壽萬歲)요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을…”로 시작한다. 예전 사당패가 입창을 부를 때면 우선 처음에 불가어(佛家語)로 된 판염불을 불러 벽사(辟邪)나 축원(祝願)을 한 뒤에 놀량을 하는 것인데, 현재 경기나 서도의 산타령에서는 이 판염불 부분이 빠지고 바로 놀량 부분부터 시작한다. 불가어로 시작하는 이 보렴은 그 판염불 부분이 따로 떨어져나가서 하나의 독립된 곡을 이룬 것으로 짐작된다. 보렴은 처음 중모리로 시작하다가 굿거리(또는 중중모리)를 거쳐 자진모리로 변한다. 음계는 완전히 남도 시나위인 평계면으로 되어 있지만 구(句)의 끝을 위로 뻗쳐서 끝내는 점 등은 입창의 특징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좋은 증거이다. 매우 씩씩한 느낌을 준다.
화초사거리
“산천초목(山川草木)이 송닢에 헌데 구경 헤허허 어기얼사 네로구나 얼시구나 이기히 얼시구나 절시구나 말들어 보아라…”로 시작한다. 사설이 처음에 경기놀량과 마찬가지로 ‘산천초목이’로 시작하여 별 의미없는 입타령으로 된 긴 염불 부분과 후반부인 화초염불(花草念佛) 부분에 이르러 화초들의 이름을 약간 들다가 마는 대목이 더 첨가되어 있는 것이 특징일 뿐, 그밖의 사설은 경기나 서도 놀량처럼 별 의미없는 소리로 되어 있다. 장단은 보렴에서처럼 처음에 중모리장단으로 소리하다가 거의 끝부분에 이르러 굿거리 또는 중중모리장단으로 변한다. 가락의 진행은 계면조라기보다는 경기놀량에 더 가깝다. 그러나 굿거리 부분 이하는 완전히 남도 계면조로 변하여 씩씩한 맛을 준다.
육자배기
“아라리요 구나 에- 내 정(情)은 청산이요 임의 정은 녹수(綠水)로구나. 녹수야 흐르건만 청산이야 변헐소냐. 아마도 녹수가 청산을 못잊어 휘휘 감돌아 들구나. 에- …”로 시작한다. 전라도소리의 대표적인 육자배기는 드물게 진양조로 시작한다. 자진 육자배기에서는 세마치로 친다. 육자배기는 잡가로도 분류되지만 민요에 넣기도 한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민요였지만 뒤에 잡가 소리꾼들이 즐겨 불렀기 때문이다. 합창으로 받는 소리(후렴구)가 독창으로 메기는 소리에 비하여 매우 짧다. 육자배기의 ‘유자’란 여섯 글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무아미타불’을 한 장단에 넣어 불렀기 때문이라는 말이 전하나 믿을 수 없다.
새타령
“삼월 삼짇날 연자 날아들고, 호접은 편편 송림 나뭇가지 꽃이 피었다. 춘풍은 떨쳐 먼산은 암암, 근산은 층층 기암은 첩첩 태산이 울며 천리 시내는 천산으로 돌아가고…”로 시작한다. 장단은 중중모리이다. 처음에는 마치 주워섬기듯 부르다가 ‘새가 날아든다’에서부터 원래 새타령으로 넘어간다. 통절형식(通節形式)으로 되어 있으나 대개 두 장단이 한 마디를 이룬다. 여러 새소리의 흉내를 내는 것이 들을 만하다. 원래 새타령은 판소리 <심청가> 가운데 ‘심봉사가 황성 찾아가는 대목’과 <적벽가> 가운데 ‘조조가 적벽강에서 대패하여 도망가는 대목’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잡가의 새타령은 판소리의 그것과는 약간 취향이 다르다.
선소리산타령
선소리산타령은 서울·경기지역과 서도지방에서 불리는 잡가 중 서서 소리하는 선소리의 대표적인 곡목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종류에는 경기 산타령과 서도 산타령이 있고, 각각 <놀량>·<앞산타령>·<뒷산타령>·<자진산타령>으로 되어 있다. <자진산타령은 경기에서 <도라지타령>이라 하고, 서도에서는 <경발림> 또는 <경사거리>라고도 부른다. 솔·라·도·레·미의 5음계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솔·도·미 3음이 많이 나오며, 장·단3도 진행이 현저하다. <놀량>에서 시작하여 <앞산타령>을 거쳐 <뒷산타령>에 이르기까지 그 한배는 점점 빨라지며 <자진산타령>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산타령>에 맞추어 소고를 치며 춤추는 발림춤도 느린 <놀량>에서보다는 빠른 <뒷산타령>과 <자진산타령>에서 더욱 흥이 나게 마련이다. 이렇게 차츰 빨라지는 한배는 마치 <영산회상>이 <상영산>에서 <중영산>·<세영산>을 거쳐 <가락덜이>에 이르는 과정과 비슷하고, 전체적으로 퍽 씩씩한 맛이 난다. 서도 산타령은 경기소리를 배워다 부른 것이어서 경기 산타령과 음악적 특징이 대개 비슷하나, 한배와 리듬이 빠르고 규칙적이며 세련된 무용성을 띠고 있다. 경기와 서도 산타령을 구성하고 있는 각 곡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놀량>은 일정한 형식과 장단이 없고 통절형식(通節形式)이며 넓은 음역을 지니고 고음을 많이 쓴다. 서도 <놀량>은 경기 <놀량>의 후반과 같고 통절형식이며, 처음에는 느리게 시작하다가 점점 빨라지며 세마치·도드리·자진타령장단을 섞어서 친다. 경기 <놀량>을 <구놀량>, 서도 <놀량>을 <신놀량>이라고도 하였다. 둘째, 앞산타령은 경기의 경우 서울 근처에 있는 산을 주제로 하고 유절형식이며, 일정한 장단이 없고 고음을 많이 쓴다. 서도의 경우는 유절형식에 세마치장단을 쓴다. 셋째, 뒷산타령의 경우 경기는 <중거리>라고도 불리고 유절형식에 리듬과 음역은 <앞산타령>과 같고, 한배는 조금 빠르다. 서도 역시 유절형식이며, 한배는 경기의 경우보다 갑절이나 빠르고, 장단은 일정하지 않지만 4박자의 빠른 타령장단이 나올 때도 있다. 가락은 경기의 것과 거의 같다. 넷째, 자진산타령은 경기의 경우 일명 <도라지타령>으로도 불리고, 처음에 느리게 부르다가 빠르고 경쾌한 4박자장단으로 바뀐다. <뒷산타령>의 파생곡으로 음악적 특징도 또한 같다. 서도의 것은 일명 <경사거리>·<경발림>으로 불리고 유절형식이며, 그 음악적 특징은 경기의 것과 같고, 선율도 비슷하여 서로 혼동될 경우가 가끔 생긴다.
경기잡가
경기잡가는 지금의 서울역 앞에서 만리재 위를 돌아서 남쪽으로 청파동 청패까지의 일대를 가리키는 사계축에서 이름난 소리꾼이 많이 나왔으며 이밖에 문안과 문밖, 우대와 아랫대에서도 소리꾼이 나왔다고 한다. 사계축의 상공인들 사이에는 유명한 소리꾼이 많이 나서 이 지역에 산재했던 공청(公廳)이 소리꾼들의 공연장이며 동시에 연습장 겸 전수장이 되었다. 이들은 잡가 외에도 가곡·가사·시조도 불렀다. 사계축의 명창으로는 흔히 추교신(秋敎信)·조기준(曺基俊)·박춘경(朴春景) 세 사람을 꼽는다. 추교신은 가장 선배이며 기량도 뛰어나고 가곡·가사·시조도 잘 불렀다. 조기준은 추교신의 수제자로 애오개 공예인출신인데 기골이 장대하고 노랫소리가 좋아서 잡가 이외에도 가사나 시조에도 뛰어났다. 그의 문하에서 박춘경·장계춘(張桂春)·최경식(崔景植) 등 당대에 뛰어난 명창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박춘경은 농부출신이었으나 조기준을 사사하여 시조·수잡가(首雜歌)·긴잡가·휘모리잡가를 잘 불렀는데, 특히 잡가는 그로 말미암아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기 때문에 잡가의 중시조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제자로는 한말 재담(才談)의 명인 박춘재(朴春載)가 있고, 잡가에 공헌이 많은 최경식·주수봉(朱壽奉)도 박춘경을 사사하였다. 그뒤 한인호(韓仁浩)·이경준(李慶俊)·탁순흥(卓順興)·이현익(李鉉翼)·장계춘·주수봉·최경식·박춘재 등이 나와서 잡가를 발전시켰다. 박춘재·주수봉은 박춘경의 제자이며, 한인호·이경준·장계춘은 조기준 문하에서 났으며, 장계춘 문하에서 최경식이, 한인호 문하에서는 원범산(元範山) 등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한말부터 민족항일기초까지 협률사·원각사 등에서 공연하였으며, 권번(券番)을 통하여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최경식은 조기준·장계춘 문하에서 가사와 시조를 배웠고 박춘경에게서 잡가를 공부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가 배출되었으니 유개동(柳開東)·정득만(鄭得晩)·이창배(李昌培)·김순태(金順泰)·엄태영(嚴泰泳)·김태운(金泰運)·최정식(崔貞植)·탁복만(卓福萬)·박인섭(朴仁燮)·이명길(李命吉)·원경태(元慶兌) 등이다. 오늘날 경기소리의 전승은 그의 공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한편, 김홍도(金紅桃)와 보패(寶貝) 등은 1910-1920년대에 활약하던 여류명창들이다. 당시에 여류가인을 양성하는 예기학원(藝妓學院)이 생겼는데, 가곡·가사·시조 외에 잡가와 민요 등도 가르쳤다. 예기학원은 뒤에 광교조합(廣橋組合)이라 했는데 나중에는 일본식 명칭을 붙여서 권번이 생겼는데, 한성권번에서는 장계춘이 가곡·가사를, 유개동이 잡가를 가르쳤고, 조선권번에서는 하규일(河圭一)이 가곡·가사를, 최정식이 잡가를 가르쳤다. 최정식의 문하에서는 정경파(鄭瓊波)·묵계월(墨桂月)·안비취(安翡翠)·조백조(趙白鳥) 등의 여류명창이 나왔다. 광복 후에는 최경식이 대한국악원을 중심으로 이창배와 함께 활약하던 중 6·25사변으로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이창배가 1957년 청구고전성악학원(靑丘古典聲樂學院)을 만들어 경서도소리를 가르치면서 이곳이 경서도소리 명창들의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1974년에 경기잡가 중 긴잡가는 경기민요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고, 안비취·묵계월·이은주(李銀珠)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었다. 이후 안비취가 사망하였고 이춘희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서도잡가
서도 소리꾼들은 평양에서 많이 났다. 고종 때 허득선(許得善)과 그의 후배인 김관준(金寬俊) 두 명창이 나서 이 두 사람에 의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허득선은 서도 소리꾼으로 평양에서 이름이 높았으며, 서울 선소리 명창 의택이와 종대가 평양에 와서 선소리하는 것을 보고 새로 선소리를 자서 서도의 선소리를 만들었다. 또한 그가 만든 <기밀경>은 연희적인 노래로 김칠성(金七星)을 거쳐서 김옥선(金玉仙)에게 전해졌다. 허득선은 학식이 있어서 서도잡가의 사설을 다듬고 좋은 사설에 가락을 얹어 부르는 재주가 있었다. 허득선 이후로 문영수(文泳洙)·이정화(李正華)가 서울에서 서도소리를 퍼뜨려 박춘재·최정식·박인섭·김태운·유개동·김경호·원경태 등 경기소리 명창들도 서도소리를 썩 잘하게 되었다. 김관준은 허득선의 후배로 작곡에도 조예가 있어, <배뱅이굿>·<안중근의사가>·<까투리타령>·<적벽가>·<전쟁가>·<심청전> 등을 서도소리로 지어 불렀다. 김관준의 문하에서는 그의 아들 김종조(金宗朝)를 비롯하여 김칠성·김주호·곽풍·최순경 등 명창들이 배출되었으며, 이들이 활약하던 시절은 서도소리의 전성기였다. 평양에서는 많은 제자를 내었던 김밀화주(金密花珠)도 그의 문하에서 나온 사람으로 추측된다. 문영수는 평양출신으로서 선소리로 유명하던 날탕패의 일원으로 활약하다가 서울에 올라와서 서도소리로 이름을 떨쳤다. 천부적인 높은 청으로 서도소리의 된목을 들고 나가는 데는 당할 사람이 없었다. 이정화도 평양출신으로 날탕패로 있다가 서울에 올라와 문영수와 함께 서도소리로 이름을 떨쳤다. 김밀화주는 예기학원의 후신인 평양의 기성권번(箕城券番)에서 많은 여류명창을 길러냈다. 장학선(張鶴仙)·이반도화(李半島花)·이정렬(李貞烈)·이부용(李芙蓉)·장금화(張錦花) 등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김밀화주를 전후하여 많은 여류명창들이 있었는데 최섬홍(崔蟾紅)·이진봉(李眞鳳)·손진홍(孫眞紅)·백모란(白牡丹)·이계월(李桂月)·길진홍(吉眞紅) 등이 있었다. 이들은 문영수·이정화와 같은 무렵에 축음기로 서도소리를 취입하였다. 김칠성도 평양출신으로 허득선·김관준의 제자이다. 서도잡가와 <배뱅이굿>을 잘 불렀고 특히 서도입창이 장기였다. 또 <별조공명가(別調孔明歌).를 지어서 박월정(朴月庭)에게 전하여 유명해졌다. 김정연(金正淵)도 어려서 그에게 잠깐 배웠다 한다. 그의 제자로는 <배뱅이굿>을 잘 하던 백신행(白信行)이 있다. 김주호·이인수(李仁洙)도 김관준의 제자들로 서도명창들이었다. 이은관(李殷官)은 이인수에게 사사하였고 김주호는 <서도맹꽁이타령>을 작곡하였다. 평양 외에 해주·개성에도 명창이 많이 났다. 서원준(徐元俊)은 황해도에서 <변강쇠타령>으로 이름이 높았고, 해주출신의 민형식(閔亨植)과 최풍천은 서도소리를 잘 하였고 김옥선은 개성에서 서도잡가를 잘 불렀다. 서도입창이 경기입창과 함께 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으로 지정되어, 서도잡가와 민요만을 따로 떼어서 서도소리라 하여 1969년에 장학선을 보유자로 지정했으나 그 이듬해에 타계함으로써 1971년에 김정연과 오복녀(吳福女)가 인정되었으며, 김정연과 오복녀가 타계한 현재에는 이은관, 이춘목, 김광숙이 보유자로 되어 있다.
남도잡가
남도는 판소리의 고장으로 판소리 명창들이 수없이 나왔으며 잡가도 불렀다. 고종 때 전라남도 옥과(玉果)에서 풍류하던 율객(律客) 신방초(申芳草)가 나와서 <화초사거리>를 만들자, 그 멋들어진 가락에 많은 소리꾼들이 나오게 되었다. 한말에는 장판개(張判介)·조진영(趙進榮)·김정문(金正文) 등이 남도잡가의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들은 원각사·광무대 등을 중심으로 <보렴>·<화초사거리>·<남도산타령>·<새타령>·<성주풀이> 등 남도잡가를 하였다. 1920년대에는 김정문·조상선(趙相鮮)·한독득(韓獨得)·강남중(姜南中)·송기덕(宋基德)·신옥란(申玉蘭)·신정옥(申貞玉)·신연옥(申蓮玉)·김금화(金錦花) 등이 남도잡가의 대가로 이름이 났고, 김추월(金秋月)·신금홍(申錦紅)·김녹주(金綠珠)·이화중선(李花中仙) 같은 판소리 명창들도 잡가를 잘 불렀다. 1930년대부터 광복 전까지 협률사(協律社)·창극단(唱劇團)·연예단(演藝團) 등을 중심으로 많은 창극과 잡가가 연주되었는데, 앞의 명창들 이외에도 엄준옥(嚴俊玉)·김점용(金點用)·권득진(權得鎭)·조요실(趙要實)·성원목(成元睦)·신마산포(申馬山浦) 등이 활약하였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당시 함께 활동했던 여류명창의 대부분이 잡가를 잘했다. 광복 후 현재까지는 판소리 창자들이 대개 남도잡가를 겸하여 부르고 있어 잡가나 민요의 명창이 따로 독립해 있지는 않으나, 대개 오정숙(吳貞淑)·신유경·김효순·성우향(成又香)·성창순(成昌順)·신영희(申英姬)·강정자(姜貞子)·김동애(金洞愛)·안숙선(安淑善)·김영자(金英子)·윤소인(尹昭仁)·김경숙(金京淑)·전정민(全貞敏) 등이 그 대를 이어오고 있다. 2001년에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강송대가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선소리산타령
흔히 <산타령>의 시초는 조선 말기 오강(五江)으로 불린 한강·용산·삼개[麻浦]·지호(支湖)·서호(西湖) 등의 소리꾼들로부터 비롯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재효(申在孝)의 <박타령>과 <변강쇠타령>에 사당패들이 나와서 <놀량>을 비롯한 <산타령>을 부르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고종연간의 오강의 소리꾼들을 <산타령>의 시초로 잡기는 어려울 것 같다. 1915년에 간행된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에는 지금의 <놀량>을 <판염불>이라 하여 “진국명산망장봉에 청천삭출금부용 음도로 시법이라…”고 하여 운문의 불가어로 시작하다가 한참 뒤에야 “산천초목이”가 나온다. 이렇게 <산타령>에 불교와 관계가 있는 <판염불>이 나오는 이유는 창자들이 원래는 사당패들로서 수백년 전부터 민가나 절로 순유하며 매창매기(賣娼賣技)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부르는 소리 중에 <산타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뒤 고종연간에 서울 오강의 소리꾼들이 <산타령>을 불렀다. 이때 의택이 나타나 선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후 의택-종대-신낙택(申洛澤)의 계보를 따라 전승되었다. 신낙택 이후로는 이들의 가락을 서울 주변의 소리꾼들이 익혀 여러 곳에 선소리패가 생겼다. 뚝섬패·한강패·쇠봉구패·용산삼개패·동막패(東幕牌)·성북동패·왕십리패·진고개의 호조(戶曹)다리패·배오개의 마전다리패·과천의 방아다리패·자하문밖패 등이 당시에 이름을 날렸는데, 이 중에 뚝섬패가 으뜸이고 과천의 방아다리패가 그 다음이었다 한다. 뚝섬패에서는 이태문(李泰文)이 신낙택에게 배워 황기운(黃琪運)·이동식(李東植)·이동운(李東運)에게 전하였는데, 이들은 모두가 선소리의 명창으로 알려져 있다. 과천패는 소완준(蘇完俊)·한인택(韓仁澤)이 유명하였다. 왕십리패에는 명창 이명길(李命吉)을 비롯하여 하순일(河順一)·엄태영(嚴泰泳)·탁복만(卓福萬)·이명산(李命山) 등이 활약하였고, 진고개의 호조다리패에는 월선(月仙)·김응렬(金應烈)·김병규(金炳奎), 배오개의 마전다리패에는 박삼쇠(朴三釗) 등이 그 이름을 날렸다. 그 뒤 1920-30년대에 이르러 패의 개념이 차츰 사라지고 대신 원각사나 광무대 또는 극장무대를 중심으로 불렸다. 최석조(崔錫祚)·최정식(崔貞植)·김태봉(金泰鳳) 등이 선소리를 잘하였다. 이명길·엄태영·김태운·최정식 등은 잡가 명창인 최경식·박춘재 등에게 경기잡가를 공부해서 이 무렵부터 선소리 명창이 잡가 명창을 겸하게 된다. 전수기관으로는 패들이 활약하던 고종 연간에는 공청(公廳)이 소리꾼들의 공연장이며 수련장이었다. 그러다가 민족항일기에는 권번을 통하여 전수되었고, 광복 뒤에는 최경식이 소속한 대한국악원을 중심으로 전승되었으나, 6·25동란을 만나 침체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창배(李昌培)가 청구고전성악학원(靑丘古典聲樂學院)을 만들어 가르치자 많은 신진들이 배출되었고, 특히 1954년에 <가요집성(歌謠集成)>을 간행한 뒤 계속 증보시켜 1976년에 <한국가창대계(韓國歌唱大系)>를 완성한 뒤부터 완전히 정립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산타령>의 발전과 정립에는 이창배의 힘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서울 강남구에 선소리 보존협회를 두고 전수교육을 하고 있다.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는데, 이명길에게 배운 이창배, 소완준에게 배운 정득만(鄭得晩), 김태봉의 문하에서 배운 김순태(金順泰), 그리고 유개동(柳開東)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활동하였다. 지금은 황용주 그들의 후계자로는 박태녀(朴泰汝)·최창남(崔昌男)·황용주(黃龍周)·윤종평(尹鍾平)·조순자(趙順子) 등이 이수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서도의 산타령은 서울의 산타령이 옮아간 것이다. 이는 <산타령>의 시조라 할만한 의택과 종대가 평양에 가서 부벽루에 올라 <산타령>을 불렀는데, 당시의 서도 명창인 허득선과 임방울이 이를 듣고 모방하여 서도 산타령을 만든 것이라 한다. 그들은 서울에도 올라와 서도 선소리를 불러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서도 선소리는 평양의 날탕패에 의하여 널리 퍼졌는데, 문영수(文泳洙)·이정화(李正華) 등이 유명하였고, 서울에 올라와 원각사에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평양에서는 양세진(梁世振)이 선소리를 잘하였고, 또 김종조(金宗朝)·최순경(崔順慶)·김칠성(金七星)·김주호(金周鎬)·이인수(李仁洙) 같은 서도 잡가의 명창들도 <산타령>을 잘 불렀다. 서울에서는 박춘재·최정식·박인섭·김태운·유개동·김경호·원경태 등 경기소리 명창들이 문영수·이정화에게 서도소리를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산타령>은 경기·서도의 구별 없이 선소리 명창들이면 다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산타령> 중 <놀량>의 불가어 부분은 오강의 소리꾼들이 부르기 시작하면서 따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연계정보
재구성국악개론, 장사훈·한만영 공저, 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 1975.국악대사전,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84.전통음악개론, 김해숙·백대웅·최태현 공저, 도서출판 어울림, 1997.최신국악총론,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95.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한민족음악론, 권오성, 학문사, 1999.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한민족음악론, 권오성, 학문사, 1999.http://www.kmusic.org 풍류마을http://www.ncktpa.go.kr 국립국악원http://www.koreandb.net 디지털한국학http://www.ocp.go.kr 문화재청
관련도서
개정판 국악통론, 서한범, 태림출판사, 1995. 국악개론, 장사훈·한만영 공저, 사단법인 한국국악학회, 1975. 국악대사전,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84. 전통음악개론, 김해숙·백대웅·최태현 공저, 도서출판 어울림, 1997. 최신국악총론, 장사훈, 세광음악출판사, 1995. 한국가창대계, 이창배, 홍인문화사, 197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 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 한민족음악론, 권오성, 학문사, 1999.
용어해설
* 수잡가시조와 잡가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는 곡이다. 다른 말로 "엇엮음시조"·"얼편시조", 처음을 질러 내기 때문에 "엮음지름시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시조 반, 잡가 반의 곡조이기 때문에 시조라고 부르기에는 격이 떨어지고 그렇다고 잡가라고 하기에는 시조의 장단법이나 창법이 섞여 있기 때문에 잡가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도 없어서, 잡가의 으뜸이라는 뜻에서 "수(首)잡가"라고 한다. 현재는 "푸른 산중하에"·"창내고자" 등이 있다. 처음에는 지름시조와 같이 높게 질러 부르다가 그 중간에서 요성의 자리가 서도소리와 같이 중간음인 중려로 옮겨지고, 장단도 시조장단에서 세마치 장단으로 바뀌면서 사설을 촘촘하게 엮어 부르다가, 종장에 가서는 다시 시조 장단·창법으로 끝맺는다.* 권번검번(檢番) 또는 권반(券班)이라고도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서울에는 한성권번(漢城券番)·대동권번(大東券番)·한남권번(漢南券番)·조선권번(朝鮮券番), 평양에는 기성권번(箕城券番) 등이 있었고, 그밖에 부산·대구·광주·남원·개성·함흥·진주 등에도 각각 권번이 있었다. 이 권번에서는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치게 하였으며, 이들 권번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많은 명기(名妓)가 배출되었고, 한때 한국 가요계를 주름잡던 이화자(李花子)도 권번출신이었다. 권번은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할 무렵 일제의 강압정책으로 폐지되었다.* 사당패전문으로 하였을 때는 홀미패라고 불리기도 하고 후에 구성된 남사당패와 구별하기 위하여 여사당패로 불리기도 하였다. 거사라는 용어와 함께 절에서 나왔다. 출가하지 않고 불교에 귀의한 일반 가정의 남자를 거사·남사당이라고 하는데 반하여 그 여자를 사당·여사당이라고 불렀다. 여자들로 조직되었다고 하여 반드시 여자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들에겐 짝이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거사다. 그리고 사당패를 대표하여 거사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사람을모갑이라고 불렀다. 모갑과 거사들이 주로 걸립패의 화주 출신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사당패와 걸립패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조직이 처음에는 거사들이 직접 연행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니 거사들이 대부분 노래, 풍물, 버나(접시돌리기), 얼른(요술) 등의 예능을 가진 걸립패 출신이라는 점에서 점차 직접 연행에 참가하였다. 이들은 18세기 중반 금과 비파가 빠진 삼현육각으로 연주를 하였다. 사당패의 삼현육각 반주에 사당들의 주요 공연 종목은 장구춤과 그 지역의 민요나 단가 등이었지만 주요곡은 <산타령>이었다. 사당을 업고 다니거나 사당패의 뒷바라지를 하거나 사당의 허우채(解衣債 : 몸값)를 관리하였다. 절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면서 수입원으로 삼아 그 수입의 일부를 절에다 내고 연행판의 수입과 허우채 그리고 부적 판매와 양식 구걸로 유랑을 하면서 살았다. 청룡사 뒤편에 살았던 바우덕이라는 여사당의 경우 1864년 경복궁 중건 사업에 초청 연행자로 불림을 받아 노래와 소고춤으로 당대를 홀릴 정도였다고 한다. 1930년대에는 걸립패와 남사당패가 합류함에 따라 사당패가 없어지고 이들의 연행 종목이 남사당패에 흡수되기도 하였다.날탕패 – 평양에 근거지를 두고 각종 연행을 하는 패로서, 1908년에 서울에 와서 그 이름을 날렸으며 선소리패인 서울의 뚝섬패와 함께 각종 무대 공연을 장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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