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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작품/자료명
판소리
지정여부
오정숙, 성우향 외
구분
민속악
개요
판소리가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시기는 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만화집(晩華集)>에 한문시 200구로 기록된 춘향가의 사설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숙종(1675-1720)무렵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판소리가 재인 광대들이 벌이는 판놀음에서 여러 놀음 틈에 끼여 한 놀이로 구실을 하던 것은 훨씬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큰 마을굿에는 흔히 창우의 판놀음이 딸렸고 창우 가운데 소리광대가 벌이는 놀음이 판소리였던 바, 민속적인 소리와 재담조 아니리와 발림으로 서민적인 이야기를 엮어 판놀음으로 공연하면서 판소리가 생겨난 것이라고 보고 있다.판소리가 마을굿과 떨어져 따로 벌이는 놀음으로 발전하면서 민중의 판놀음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방안놀음으로도 끼이게 되었다. 19세기 전반에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송만재는 가난하여 자기 아들의 과거 급제에 광대를 불러 축하연을 베풀지 못하고 대신에 관우희라는 한문시를 지어 아들에게 주었는데, 그 관우희 안에 그 당시 광대들이 연주했던 판소리 열두 마당이 소개되어 있다. 그 열두 마당은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끼타령·적벽가·배비장전·강릉매화전·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 등이다.판소리 열두 마당은 영·정조 때 이미 공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 당시 활동했던 초기 명창들로 우춘대(禹春大)·하한담(河漢潭)·최선달(崔先達) 등을 꼽을 수 있다. 판소리가 형성되던 초기는 사설의 길이도 짧고 장단이나 선율 같은 음악적 요소도 소박한 단계에 머물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18세기에 여러 명창광대들에 의하여 민속악의 새 쟝르로 성장되어 갔다고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전통이 19세기에 이르러 폭넓게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19세기 전기는 판소리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유명했던 판소리 명창들이 자기의 독특한 음악적 예술을 담은 더늠을 후세에 남겼을 뿐만 아니라 지방마다 특징적인 음악양식을 나타내는 판소리의 유파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활동한 명창들로는 권삼득·모흥갑·송흥록·김제철·고수관·염계달·황해청·송광록·주덕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경드름이나 추천목·석화제 등의 독특한 가락을 전하기도 하며 특정한 대목을 잘 불러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에 이유원의 <가고오략>에 이르면, 앞서 말한 열두 마당 중에서 그 내용이 황당무계하다고 여겨진 강릉매화타령·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 등이 빠지게 되며, 신재효(1811-1884)가 정리한 판소리 사설집에서는 이 중에서 배비장전과 장끼타령을 제외한 여섯 마당만을 실었다. 판소리 여섯 마당만이 채택된 이유는 두 가지 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판소리 청중의 폭이 확대됨에 따라 양반이나 중인 출신의 지식층에 의하여 조선시대의 사상적 주류를 이루던 유교적 관점에서 판소리 사설이 조명되었을 것이란 점이다. 다른 하나는 명창광대들의 출신이 천인계급에 머무르지 않고서 조선 말기의 사회적 변동 속에서 차츰 중인을 포함한 서민층으로 확대되어 나갔던 추세에 의한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19세기 후반 명창광대들의 활동과는 달리 20세기 전반기에는 창극의 영향으로 판소리가 쇠퇴하게 되었다. 판소리 여섯 마당은 1933년 이선유(1872-?)에 의해 내용이 외설스러운 변강쇠타령을 빼고 현재와 같이 다섯 마당으로 <오가전집>에 정리되었다. 많은 판소리 명창들이 원각사가 생기면서 창극에 참여하게 되었고 판소리 한마당을 전부 공연하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광복 후에는 여성창극의 성행으로 판소리가 더욱 쇠퇴해졌으나 1960년대에 판소리 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한때 판소리가 부흥되는 듯 하였다. 현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기능보유자를 중심으로 판소리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판소리의 구성
판소리는 소리광대가 서서 소리도 하고 아니리도 하고 발림도 하며 긴 이야기를 엮어나가고 고수는 앉아서 추임새를 하며 북장단을 치는 판놀음의 한 가지이다. 판놀음이란 널찍한 마당을 놀이판으로 하여 음악·춤·연극·곡예 따위 놀음을 순서대로 짜서 벌이는 놀음을 가리키는 바, 이때 놀음을 벌이는 연희자를 장기에 따라 소리광대·줄광대·어릿광대·대광대·탈광대 등으로 나눈다. 이 가운데 소리광대가 가장 대우를 받았다. 솜씨가 뛰어난 소리광대는 명창이나 가객이라 하여 예우를 받았으며 이들은 통양갓에 창의를 걸치고 손에는 부채를 쥐고 소리를 했다. 소리광대가 부르는 소리는 서양 오페라의 아리아와 같은 것으로,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등의 일정한 장단에 맞춰 부른다. 아니리는 소리가 아니라 말인데, 대개 44조로 된 리듬을 가지고 있으며 대화 뿐만 아니라 ‘이러저러한데’라는 설명이 들어가기도 한다. 판소리에서 광대가 소리나 아니리로 이야기를 엮으며 몸짓하는 것을 발림이라고 하고 너름새 또는 사체라고도 이른다. 발림이란 춤이나 놀이에서 벌이는 몸짓을 뜻하는 것으로, 판소리에서 발림은 소리에 따른 춤가락스러운 몸짓, 소리가락을 강조하기 위한 몸짓, 사설의 극적 내용을 그리는 몸짓을 포함한다. 판소리에서 고수는 북장단을 치는 잽이를 뜻하는데, 광대의 소리에 따라 장단을 치는 한편 광대에게 소리의 한 배를 잡아주고 장단과 박을 가늠하게 하며 추임새로 극적 상대자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소리의 맺고 푸는 것을 알아서 북의 통과 가죽을 가려치므로 고수의 구실이 무겁다 하여 일고수 이명창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판소리의 유파
판소리의 전승지역은 전라도·충청도 서부와 경기도 남부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해당하므로, 판소리는 지역적 특성과 전승 계보에 따른 파가 생겼다. 전라도 동북지역의 소리제를 동편제라 하고 전라도 서남지역의 소리제를 서편제라하며 경기도·충청도의 소리제를 중고제라 한다. 동편제는 운봉·구례·순창·흥덕 등지의 전라도 동북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를 순조 때의 명창 송흥록(宋興祿)의 소리제에서 송광록(宋光祿)·박만순(朴萬順)·송우룡(宋雨龍)·송만갑(宋萬甲)·유성준(劉聖俊)으로 전해지는 소리제를 주축으로 한다. 동편제 소리는 비교적 우조를 많이 쓰고 발성을 무겁게 하고 소리의 꼬리를 짧게 끊고 굵고 웅장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서편제는 보성·광주·나주, 즉 전라도 서남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로 철종 때의 명창 박유전(朴裕全)의 소리제에서 이날치(李捺致)·김채만(金采萬)으로 전해지는 소리제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 서편제 소리는 비교적 계면조를 많이 쓰고 발성을 가볍게 하며, 소리의 꼬리를 길게 늘이고 정교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중고제는 경기도·충청도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소리제로 순조 때의 명창 김성옥(金成玉)·김정근(金定根)·황호통(黃浩通)·김창룡(金昌龍)으로 전해지는 소리제와 또한, 순조 때의 명창 염계달(廉季達)·고수관(高壽寬)·한송학(韓松鶴)·김석창(金碩昌)으로 전해지는 소리제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중고제 소리는 동편제 소리에 가까우며 고박한 시김새로 짜여 있다.
판소리의 장단
오늘날 판소리는 여러가지 조·장단·붙임새·시김새·발성이 있어서 음악적으로 다채롭고 정교한 표현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사설에 나타난 여러 극적 상황에 따른 음악적 표출을 할 수 있어서 훌륭한 극적 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판소리에 쓰이는 장단에는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엇중모리가 쓰인다. 느린 장단인 진양조는 사설의 극적 상황이 한가하고 이완되어 서정적인 장면에 많이 쓰인다. 진양조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적성가·긴사랑가, <심청가>에서 범피중류·추월만정 따위가 있다. 중모리는 보통 빠른 장단이며 사설의 극적 상황이 서정적인 장면이나 서술하는 대목에 많이 쓰인다. 중모리장단으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쑥대머리·옥중상봉, <흥보가>에서 가난타령, <심청가>에서 선인 따라가는 대목 따위가 있다. 중중모리는 춤추는 느낌의 한배이며 사설의 극적 상황이 춤추거나 활보하거나 통곡하는 장면에 많이 쓴다. <춘향가>에서 천자풀이·자진사랑가, <심청가>에서 화초타령, <흥보가>에서 제비노정기·비단타령, <수궁가>에서 토끼화상, <적벽가>에서 장승타령 등이 중중모리장단으로 유명한 대목이다. 자진모리는 느린 자진모리와 자진 자진모리로 나눌 수 있다. 느린 자진모리는 사설의 극적 상황이 어떤 일을 길게 서술하거나 나열하는 대목 또는 어느 일이 차례로 길게 벌어지는 대목에 많이 쓰이며, 자진 자진모리는 극적이고 긴박한 대목에서 흔히 쓰인다. 자진모리장단으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신연맞이·어사출도, <심청가>에서 임당수 바람부는데, <적벽가>에서 자룡이 활 쏘는데·적벽화전 등을 들 수 있다. 휘모리는 매우 빠른 장단이므로 사설의 극적 상황이 매우 분주하게 벌어지는 대목에서 쓰인다. <춘향가>에서 춘향 끌어내리는데, <심청가>에서 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이 휘모리장단으로 유명한 대목이다. 엇모리는 3박과 2박이 혼합된 박자이며 사설의 극적 상황이 신비한 인물의 거동이나 신비한 장면에 쓰인다. <심청가>와 <흥보가>에서 중타령, <수궁가>에서 도사 내려오는 대목이 유명하다. 이밖에 엇중모리는 판소리의 뒤풀이에 흔히 쓰이는 장단이다. 판소리에서 2음보의 말이 장단의 절반씩 나누어 박에 붙는 원형대로 붙지 않고 어긋나게 붙는 기교를 붙임새라 이른다. 흔히 쓰는 붙임새에는 엇붙임·잉어걸이·완자걸이·교대죽·도섭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원형대로 붙는 것을 대마디대장단이라 이른다. 붙임새를 쓰면 리듬이 생동적이고 다채롭게 된다. 이러한 판소리 붙임새의 용어는 음악적 문법이 비슷한 산조·시나위·농악에서도 쓰이고 있고, 또 민속춤에서도 춤사위(춤가락) 용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판소리의 선율
판소리에는 계면조·우조·평조·경드름·설렁제 등 여러 조가 쓰인다. 판소리에서 조라는 것은 선법·선율형·시김새·감정표현·발성 등 여러 음악특징으로 구분되는 선율적 특징이라 하겠다. 계면조는 육자배기토리의 민요가락 등에서 보이는 향토토리를 토대로 판소리를 선율화시킨 것이다. 계면조라는 말은 가곡에서 쓰던 용어만 빌려 쓴 것이고, 슬픈 느낌을 주기 때문에 서름제 또는 애원성이라고도 부르며, 사설의 극적 정황이 슬프고 여성적인 장면에 흔히 쓰인다. 계면조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이별가·옥중가, <심청가>에서 심청모 유언·추월만정, <흥보가>에서 가난타령, <적벽가>에서 고당상·새타령 등이 있다. 우조는 정가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정가의 선율과 꼭 같은 것은 아니다. 판소리에서 우조는 웅장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호령조라고도 부르며 사설의 극적 정서가 웅장하고 남성적이고 영웅적인 대목에 흔히 쓴다. 우조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만첩청산·신연맞이, <적벽가>에서 삼고초려와 같은 대목을 들 수 있다. 평조는 화평스럽고 명랑하고 즐거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사설의 극적 정서가 화창하고 즐거운 대목에 흔히 쓰인다. 평조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천자풀이·<적벽가>에서 장승타령 등이 있다. 경드름은 창부타령이나 도라지타령과 같은 서울민요토리를 판소리화시킨 것으로 서울토리와 비슷하여 경조·경제·경토리라고도 부른다. 경드름은 경쾌하고 서울토리의 느낌을 주기 때문에 판소리 사설의 극적 정황이 서울사람이나 한량들이 나오는 대목에 흔히 쓰인다. 경드름으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남원골 한량·이도령 춘향 달래는 대목을 들 수 있다. 설렁제는 권마성가락을 판소리화시킨 것으로, 높은 소리로 길게 빼는 선율과 도약적인 선율이 많아서 경쾌하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 덜렁제·드렁조·권마성제·중고조라고도 부른다. 사설의 극적 상황이 무사적인 인물이 거드럭거리면서 호기 있게 나오거나, 떠드는 대목에 흔히 쓰인다. 설렁제로 유명한 대목은 <춘향가>에서 군노사령, <심청가>에서 남경선인, <흥보가>에서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을 들 수 있다. 이밖에 순조 때 명창 염계달이 만들었다고 하는 추천목은 서울토리를 판소리화시킨 것이며 <춘향가>에서 네그른 내력·자진사랑가에서 보인다. 강산제는 순조 때 명창 모흥갑이 낸 소리제로 <춘향가>에서 이별가와 날 다려가오에서 보인다. 석화제는 가야금병창제와 비슷한 소리제이며 순조 때 명창 김제철·신만엽이 낸 소리제이며, <수궁가>에서 토끼 고향에 돌아오는 대목에서 볼 수 있다. 메나리조는 강원도·경상도 민요의 메나리토리를 판소리화시킨 것으로 매우 드물게 보인다. 정응민제 <심청가>에서 뺑덕이네 길소리에 보인다. 판소리는 통성이라 하여 힘차게 나오는 발성을 하되 성대를 약간 스쳐 좀 쉰 듯한 목소리를 좋은 목소리로 꼽는다. 그러나 부르는 사람마다 목소리의 음질과 발성법에 따라 광대의 목소리를 여러가지로 가르는데, 약간 걸걸한 수리성, 맑고 우렁찬 천구성, 단단한 철성 등은 좋은 목소리로 꼽으며, 가는 세성, 되바라진 양성, 발발 떠는 발발성, 콧소리 나는 비성, 깨어진 소리나는 파성 등은 좋지 않은 소리로 꼽힌다. 또 발성과 시김새에 따라 여러가지 목으로 가리는데, 공력이 없이 내는 생목, 목 안에서 내는 속목, 틔지 못한 떡목 따위는 음질과 발성에 따라 가르는 것이며, 굴려내는 방울목, 모가 나게 깎는 목, 높이 찔러 내는 찌른 목 따위는 발성과 시김새에 따라 가르는 것이다.
판소리의 종류
송만재의 <관우희>에 의하면, 판소리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 전반에는 열두 마당의 판소리가 다양한 유파를 형성하면서 불려졌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열두 마당이 여섯 마당으로 줄어들었으며 말기에는 <변강쇠타령>이 없어지면서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의 다섯 마당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전승이 끊어졌다. 판소리 열두 마당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춘향가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이 퇴기 월매의 딸 춘향과 사랑하다가 헤어진 뒤, 춘향이 남원 신임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가 옥에 갇힌 것을 이몽룡이 전라어사가 되어 구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이다. 판소리 다섯 마당 중에서 문학성과 예술성이 가장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며 청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사설의 길이도 가장 길어서 한마당을 모두 부르는데 짧은 바디는 5시간, 긴 바디는 8시간이 걸린다. <춘향가>는 1754년(영조 30) 유진한이 지은 <만화집>의 <춘향가>가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꼽힌다. 그밖에 송만재의 <관우희>, 장지완의 <광한루시>, 신위의 <관극시>, 조재삼의 <송남잡지>,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이유원의 <관극팔령> 등이 있다. 순조 때 명창 송흥록이 <춘향가>에서 옥중가를 잘 불렀고, 그의 옥중가 더늠이 오늘날까지 전하여진다. 또 순조 때 명창 염계달의 더늠으로 남원골 한량대목·돈타령·네그른 내력, 고수관의 더늠으로 자진사랑가, 모흥갑의 더늠으로 이별가·날 다려 가오, 송광록의 더늠 긴사랑가가 전해오고 있다. 철종 때 명창 박유전·이석순·박만순·이날치·김세종·장자백 등이 <춘향가>로 이름을 떨쳤고, 고종 때 명창 황호통·박기홍·정정렬 등이 <춘향가>를 잘 불렀다. 오늘날 전승되는 <춘향가> 바디에는 박봉술이 보유하고 있는 송만갑 바디, 정권진이 보유하고 있는 정응민 바디, 김여란이 보유하고 있는 정정렬 바디, 정광수가 보유하고 있는 김창환 바디, 오정숙이 보유하고 있는 김연수 바디가 있으며, 박동진도 <춘향가>를 짜서 전판 공연한 바 있다. 그밖에 많은 바디는 전승이 이미 끊어졌거나 거의 끊어지고 있다. 지금 전승되고 있는 여러 <춘향가> 바디 가운데 송만갑 바디, 정응민 바디, 김창환 바디가 다른 바디보다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춘향가>는 바디마다 짜임새가 조금씩 다르나 대개 초앞, 광한루 경치, 책방독서, 백년가약,이별가, 신연맞이, 기생점고, 십장가, 옥중가, 과거장, 어사행장, 춘향편지, 옥중상봉, 어사출도, 뒤풀이로 짜여진 경우가 많다. 특히, <춘향가>에서 이름난 소리대목은 적성가, 천자 뒤풀이, 춘향방 경치, 긴사랑가, 자진사랑가, 이별가, 신연맞이, 기생점고, 군노사령, 옥중가, 과거장, 농부가, 박석틔, 어사와 장모, 옥중상봉, 어사출도 대목을 꼽을 수 있다. <춘향가>는 화평한 장면, 슬픈 장면, 위풍당당한 장면, 우스운 장면이 고루 나뉘어 있고 진지한 대목과 우스운 대목이 고루 짜여 있다. 음악 또한 이와 같은 사설의 극의 내용에 따라서 장단과 조가 변화 있고 고르게 짜여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명창들이 대목마다 이름난 더늠을 많이 남겨놓고 있어서 음악적으로도 잘 짜여진 마당으로 꼽힌다.
심청가
<심청가>는 앞 못 보는 심봉사의 딸 심청이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동냥젖으로 자라나서 15세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몸이 팔려 임당수에 빠졌으나 하늘의 도움으로 세상에 나와 황후가 되었고, 맹인 잔치에서 아버지를 만나 눈을 뜨게 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이다. <춘향가> 다음으로 사설의 문학성과 소리의 음악성이 뛰어나고 유명한 대목이 많아서 작은 춘향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설의 길이도 <춘향가> 다음으로 길어서 한마당을 모두 부르는데 대략 4시간 가량 걸린다. <심청가>는 조선조 중기에 이미 불렸을 것으로 송만재의 <관우희>, 이유원의 <관극팔령>, 이건창의 <부심청가 2수>와 같은 조선 후기 문헌에만 보인다. 순조 때의 명창 김제철이 <심청가>를 잘 불렀는데 특히 심청이 탄생하는 대목이 그의 더늠이라 한다. 철종 때의 박유전·주상환·이날치·김창록 등과 고종 때의 명창 이창윤·전도성·이동백·김채만 등이 심청가를 잘 불렀다 한다. 오늘날 전승되는 심청가바디에는 정권진이 보유하고 있는 정응민 바디, 한애순이 보유하고 있는 김채만 바디, 오정숙이 보유하고 있는 김연수 바디가 있고, 박동진도 심청가를 짜서 전판 공연한 바 있다. 박봉술이 송만갑 바디를 일부 보유하고 있으나 전판 공연된 적은 없고, 그밖의 다른 바디들은 전승이 끊어졌거나 거의 끊어져 가고 있다. 지금 전승되고 있는 여러 심청가 바디 가운데 정응민 바디와 김채만 바디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심청가>는 바디마다 짜임새가 조금씩 다르긴 하나 흔히 초앞, 심청 탄생, 심청어미 출상, 동냥 다니는데, 장승상댁, 공양미 삼백석, 범피중류, 임당수, 용궁, 심황후 자탄가, 뺑덕어미, 황성길, 부녀상봉, 뒤풀이의 순서로 짜여진 경우가 많다. 심청가에서 이름난 소리 대목은 심봉사 통곡, 심청모 출상, 시비 따라가는데, 중타령, 후원기도, 선인 따라가는데, 범피중류, 임당수 바람부는데, 꽃타령, 망사대, 추월만정, 방아타령, 눈 뜨는 대목을 꼽을 수 있다. <심청가>는 슬픈 대목이 많아서 소리 또한 계면조로 된 슬픈 노래가 많다. 감정을 풍부하게 하여 정교한 시김새를 구사하는 대목이 많아서 목이 좋지 않은 명창은 부르기가 어렵다.
흥보가
<흥보가>는 <박타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난하고 착한 아우 흥보는 부러진 제비다리를 고쳐주고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심어 박을 타서 보물들이 나와 부자가 되고, 넉넉하고 모진 형 놀보는 제비다리를 부러뜨리고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심어 박을 타서 괴물들이 나와 망한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엮은 것이다. 사설이 우화적이기 때문에 우스운 대목이 많아서 소리 또한 가벼운 재담소리가 많다. 사설의 길이는 짧은 편이어서 한마당 모두 부르는데 대개 3시간 가량 걸린다. <흥보가>는 송만재의 <관우희>, 이유원의 <관극팔령>과 같은 조선 후기 문헌에 처음 보인다. 정조 때의 명창 권삼득이 <흥보가>를 잘하였고,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이 그의 더늠이라고 한다. 순조 때의 명창 염계달·문석준도 <흥보가>로 이름을 떨쳤던 바, 문석준은 박통 속에서 돈과 쌀을 정신없이 퍼내는 휘모리 대목을 더늠으로 전하고 있다. 철종 때에는 한송학·정창업이 <흥보가>를 잘 했고, 고종 때에는 최상준·김창환이 잘했다고 전한다. 김창환은 제비노정기를 더늠으로 내었던 바, 오늘날 제비노정기는 그의 더늠을 첫손으로 꼽고 있다. 전승되고 있는 <흥보가> 바디에는 박녹주 및 박봉술이 보유하고 있는 송만갑 바디, 정광수가 보유하고 있는 김창환 바디, 오정숙이 보유하고 있는 김연수 바디가 있으며, 박동진이 짜 부르고 있는 바디 <흥보가>는 김창환 바디에 가깝다. 그밖의 <흥보가> 바디는 거의 전승이 끊어진 상태이다. <흥보가>는 대개 초앞, 놀보심술, 흥보 쫓겨나는데, 매품팔이, 매 맞는데, 집터 잡는데, 제비노정기, 흥보 박타령, 화초장, 제비 후리러 나가는데, 놀보 박타령 등 뒤풀이로 짜인 바디가 많다. 앞과 뒤에는 재담소리가 많고 가운데에 좋은 소리가 많다. <흥보가>에서 이름난 소리 대목은 중타령, 집터 잡는데, 제비노정기, 박타령, 비단타령, 화초장,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 등을 들 수 있다. <흥보가>는 우스운 재담 대목이 많이 들어 있고 끝에 놀보 박타는 대목에는 잡가가 나오기 때문에 해학적인 마당으로 꼽힌다. 소리도 잘해야 하지만 아니리와 너름새에 능해야 <흥보가> 명창으로 제격이라 할 수 있다.
수궁가
<수궁가>는 용왕이 병이 들자 약에 쓸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하여 자라를 세상에 내보내 토끼를 꾀어 용궁으로 데려오나 토끼가 꾀를 내어 용왕을 속이고 살아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짠 것이다. <토끼타령>, <별주부타령>, <토별가>라고도 부른다. <수궁가>는 사설이 우화적인 이야기이고 등장인물끼리 말씨름하는 대목으로 되어 있어서 소리 또한 아기자기한 대목들이 많다. 그러나 왕과 신하들을 등장인물로 했기 때문에 진지한 소리들이 나와 소적벽가(小赤壁歌)라 하여 명창들은 허술히 여기지 않았다. <수궁가>는 송만재의 <관우희>, 이유원의 <관극팔령>과 같은 조선시대 후기 문헌에 처음 보인다. 순조 때의 명창 신만엽이 <수궁가>를 잘 하였고, 특히 토끼기변과 소지노화가 그의 더늠으로 전해지고 있다. 철종 때의 송우룡·김거복·김수영, 고종 때에는 김찬업·신학준·유성준이 <수궁가>를 잘 불렀다. <수궁가>의 짜임새는 초앞, 용왕득병, 도사진맥, 토끼화상, 세상풍경, 상좌다툼, 토끼와 자라, 수궁풍경, 토끼기변, 세상에 나오는데, 토끼 욕설, 뒤풀이로 짜여진 바디가 많다. 수궁가에서 이름난 소리 대목은 용왕탄식, 약성가, 토끼화상, 고고천변, 토끼와 자라, 토끼신세, 토끼기변, 가자가자, 백매주를 바삐 지나, 토끼욕설을 들 수 있다. <수궁가>는 재치있고 아기자기한 소리와 아니리로 짜서 기지와 해학적인 맛을 들여 판을 벌여야 한다.
적벽가
<적벽가>는 신재효가 개작하여 정착시킨 판소리 작품의 하나이며 <화용도>라고도 한다. 송만재의 <관우희>, 이유원의 <관극팔령>과 같은 조선조 후기 문헌에 판소리로 짜여서 불려진 것으로 보이고 있다. 조선 순조 때에는 명창 송흥록·모흥갑·방만춘·주덕기와 같은 명창들이 <적벽가>로 이름을 떨쳤다. 방만춘은 적벽강 불싸움 대목을 잘하였고, 주덕기는 자룡이 활쏘는 대목을 잘하였다고 한다. 철종 때 명창 박만순·이창운이 <적벽가>를 잘 하였고, 고종 때 박기홍·이동백·김창룡 또한 <적벽가>로 세상을 울린 명창이다. 오늘날 전승되는 <적벽가>에는 박봉술이 보유한 송만갑 바디, 정광수가 보유한 유성준 바디, 정권진이 보유한 정응민 바디가 있고 박동진이 짠 <적벽가>는 조학진 바디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 밖의 바디는 거의 전승이 끊어지고 있다. <적벽가>의 구성은 초앞, 삼고초려, 장판교 싸움, 공명·주유 격동, 군사 서름타령, 조조 군사조련, 남병산 제사, 자룡이 활쏘는 데, 적벽강 싸움, 오림산중, 군사점고, 화용도, 뒤풀이로 짜인 바디가 많다. <적벽가>에서 이름난 소리대목은 삼고초려, 고당상, 서름타령, 군사조련, 남병산 제단, 자룡이 활쏘는 데, 적벽강 싸움, 새타령, 장승타령으로 되어 있다. <적벽가>는 왕후장상이 격돌하는 대목이 많아서 엄숙한 발성을 해야 한다. 음악적 기교보다 서슬 있는 소리라고 하여 격렬한 표현력을 구사하는 광대가 <적벽가>에 제격이라 한다.
배비장전
<배비장전>은 송만재의 <관우희>에 실려있는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하나이다. 신재효(申在孝)가 지은 것으로 보이는 <오섬가(烏蟾歌)>에 <배비장전>의 한 부분인 애랑과 정비장의 이별장면, 애랑이 배비장을 조롱하는 장면 등이 나오고, 이유원(李裕元)의 <관극팔령(觀劇八令)>에 소재로 채택된 것으로 보아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 여섯 마당을 정착시킨 시기까지는 <배비장타령>이 부분적으로나마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1938년에는 <배비장전>이 창극으로 공연되었고, 최근에 판소리나 창극으로 재창조되기도 하였다. <배비장전>은 <배비장타령>이 판소리로서의 생명은 잃고 그 사설이 기록되면서 소설화하여 현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배비장전>은 빼어난 제주 기생 애랑과 새로 부임하는 제주목사를 따라온 평범한 인물인 배비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제주도로 부임하는 목사 일행이 바다에서 겪는 고난을 첫머리에 묘사한다. 애랑과 정비장의 이별 장면을 통하여 배비장과 애랑 사이에 벌어질 사건을 암시한다. 배비장이 절대로 훼절(毁節)하지 않으려 맹세하자 목사의 지시에 따라 애랑과 방자가 배비장을 유혹할 계책을 꾸민다. 결국 배비장은 애랑의 유혹에 빠져 개가죽옷을 입고 개구멍으로 애랑의 집을 찾아간다. 거기에서 배비장은 애랑과 방자의 계교에 따라 자루와 피나무궤 속에 들어가 온갖 곤욕을 당하고, 궤 속에 든 채 동헌(東軒)까지 운반되어 망신을 당한다. 주석본은 희극적 파탄이 최고조에 도달한 이 부분에서 끝나지만, 구활자본은 배비장이 현감(縣監)으로 임명되어 애랑과 함께 부임하여 선치(善治)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옹고집전
<옹고집전>은 옹고집타령이라고 하며 송만재의 <관우희>에 등장한다. 옹진 고을에 사는 옹고집은 심술 사납고 인색하며 불효한 인간으로서, 거지나 중이 오면 때려서 쫓기 일쑤였다. 이에 도술이 능통한 도사가 학대사(鶴大師)를 시켜 옹고집을 징계하고 오라 했으나 오히려 매만 맞고 돌아왔다. 화가 난 도사가 초인(草人)으로 가짜 옹고집을 만들어 옹고집의 집에 가서 진가(眞假)를 다투게 하였다. 진짜와 가짜를 가리고자 관가에 송사까지 하였으나 진짜 옹고집이 도리어 져서 집을 쫓겨나고 걸식 끝에 비관 자살하려 하는데 도사에게 구출된다. 도사에게서 받은 부적으로 가짜 옹고집을 다시 초인으로 만든 그는 크게 참회하고 독실한 불교신자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변강쇠타령
<변강쇠타령>은 송만재의 <관우희>에 언급되어 있으며 후에 신재효가 사설을 개작 정리하였으나 이선유의 <오가전집>에서는 제외되었다. <변강쇠타령>은 가루지기타령이나 횡부가(橫負歌)라고도 하며 판소리 여섯 마당 가운데 가장 이색적인 작품으로 적나라한 성의 묘사와 노골적인 음담이 전편에 깔려 있는 외설적인 작품이다. 내용은 평안도에서 태어난 옹녀와 전라도에서 태어난 변강쇠가 제각기 음란한 생활을 하여 왔다. 여자는 북쪽 여자라 남쪽으로 가고, 남자는 남쪽 남자라 북쪽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만나 곧장 결혼을 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살게 되는데, 어느 날 변강쇠는 장승을 패어 때다가 동티가 나서 죽고 만다. 옹녀는 중·초라니·풍각쟁이들에게 장사만 치러 주면 같이 살겠다고 하여 그들은 서로 덤비다가 폭사하는 것으로 되었다.
장끼타령
<장끼타령>은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하나로 조선시대에 널리 불렸으나 현재는 전승되지 않는다. 내용은 조선시대에 꿩을 의인화하여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의 유교적 사상에 젖어 있는 인간사회를 풍자하고 있는데, 추운 겨울날 굶주린 장끼가 까투리와 함께 넓은 들에 내려와 붉은 콩 한알을 발견하고, 까투리의 말리는 소리를 듣지 않고 그 콩을 꽉 찍다가 돗에 치인다는 이야기이다.
강릉매화전
판소리 열두 마당 중의 하나로 강릉매화타령이라고도 한다. 1810년대에 간행된 송만재의 <관우희>에 당시 널리 불리던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점으로 보아 1810년 이전부터 불려진 듯하다. <관우희>의 <왈자타령> <가짜신선타령> <강릉매화타령> 등은 내용이 외설스럽고 조잡하여 가까이할 수 없다 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자연도태되어 불리지 않는다. 신재효(申在孝)의 <오섬가(五蟾歌)> 1절에 “강릉 책방 골원을 매화가 속이랴고 백주에 산 사람을 거짓되이 죽었다고 활신벽겨 앞세우고 상예 뒤를 따라가며 이 사람도 건드리고 저 사람도 건드리며 자지예 방울차고 달랑달랑 노는 것이 그도 또한 굿실네라”라는 대목이 있어 그 내용이 위선적인 사람을 풍자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무숙이타령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로 <왈자타령(曰者打令)>이 무숙이타령이라는 설과 <오유란전(烏有蘭傳)>이 무숙이타령과 같다는 설 등 이설이 있으나 사설(辭說)은 전하지 않는다. 내용은 장안의 오입쟁이 왈자들이 기생을 놓고 노래와 술로 협기를 다툰다는 이야기이다.
가짜신선타령
<가짜신선타령>은 한 어리석고 못생긴 선비가 신선이 되려고 금강산에 들어가 노선사(老禪師)에게 가짜 천도(天桃)와 천일주(千日酒)를 얻어 먹고 신선이 된 줄로 착각하여 온갖 추태를 부린다는 이야기다. 현실에서 도피하여 무릉도원에 일신을 맡기려는 당시 지식인들을 풍자한 작품으로 지금은 불리지 않는다.
전승자 정보
판소리 최고(最古) 명창으로 이름이 전해지는 이는 영조-정조 때 우춘대(禹春大) 및 하은담(河殷譚)·최선달(崔先達)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자료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權三得)·송흥록·염계달·모흥갑·고수관·신만엽·김제철·황해천(黃海天)·주덕기(朱德基)·송광록·박유전·방만춘(方萬春) 등 뛰어난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 발전에 공헌하였다. 이들 명창들은 여러 가조와 장단을 확대시켰는데, 권삼득은 설렁제를, 염계달과 고수관은 경드름과 추천목을, 신만엽과 김제철은 석화제를 판소리에 짰고, 송흥록은 계면조·우조를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짰고, 진양을 판소리에 집어넣어 소리를 짰다. 또 명창들의 지역에 따른 음악적 특성 그대로 전승되어 동편제·서편제·중고제 등 여러 파가 생겨 전승하게 되었다.이 가운데 권삼득(權三得 1771∼1841)은 정조·순조 때 활약한 판소리 8명창 중의 한 사람이며 본명은 사인(士仁)이다.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에서 내언(來彦)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반집안에 태어났으나 음악적인 재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글 배우기를 싫어하고 판소리만 배우다가 집안에서 쫓겨났다 한다. 그는 판소리에서 가장 오래된 명창으로 알려진 하은담(河殷潭)과 최선달(崔先達)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는 설이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특히, 권마성(勸馬聲)소리제를 응용하여 판소리 설렁제라는 특이한 소리제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소리제는 높은 소리로 길게 질러 내는 성음인데 <흥보가>에서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과 <춘향가>에서 군노사령 나가는 대목 등 여러 대목에 쓰이고 있는 바 권마성과 같이 매우 씩씩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그의 호탕하고 씩씩한 가조(歌調)를 두고 신재효(申在孝)는 그의 <광대가(廣大歌)〉에서 “권생원(權生員) 사인(士仁)씨는 천층절벽(千層絶壁) 불끈소사 만장폭포(萬丈瀑布) 월렁궐렁 문기팔대(文起八代) 한퇴지(韓退之)”라 하여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에 비유하고 있다. 그를 가중호걸(歌中豪傑)이라 부르는 속칭도 이 때문이다. 그는 8명창 가운데 가장 선배로서 그 이전에 있었던 원초(原初)판소리와 비슷한 단순한 판소리를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후인들의 평도 그의 소리가 단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흥보가>를 특히 잘 하였고 그의 더늠인 제비 후리러 나가는 대목은 전도성(全道成)·송만갑(宋萬甲)·김창룡(金昌龍)에 의해서 방창(倣唱)되고 있다. 그리고 염계달(廉季達)은 그의 창법을 많이 모방하였다고 한다. 전라북도 완주에 그의 묘가 있으며, 묘 앞에 구멍이 패어 있는데 소리구멍이라 하여 그곳에서 소리가 들린다는 전설이 있다.송흥록(宋興祿)은 8명창 가운데 한 사람으로써, 판소리의 중시조 또는 가왕(歌王)으로 꼽히고 있다.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비전리에서 태어났으며, 판소리의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金成玉)은 그의 매부이고, 광록(光祿)은 동생이다. 그는 역대의 판소리 명창 가운데 기량이 가장 뛰어날 뿐만 아니라, 판소리에 그때까지 없었던 진양장단을 도입하여 소리를 짜고 평타령으로 일관되었던 원초적인 판소리선율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의 선율을 오늘날과 같이 발전시켰다. 계면조는 본래 남도무가(南道巫歌)나 민요에 있는 육자배기토리를 가리키는 것이며, 민요나 무가에서는 단순한 선율형태를 가지나 판소리에서는 매우 복잡한 선율이 많다. 계면조선율에 이와 같은 정교한 선율형태를 도입한 것이 송흥록으로 보이며, 그가 잘하였다는 귀신의 울음소리, 즉 귀곡성(鬼哭聲)도 따지고 보면 계면조선율의 교묘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우조는 가곡·가사에서 보이는 정가(正歌)의 선율을 판소리화한 것인데, 판소리에서 우조의 선율은 정가의 선율과 다른 판소리적인 특이한 선율이 구사된다. 이 판소리 우조선율의 특성이 송흥록에 의해서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원초의 판소리는 중중모리·중모리·자진모리장단으로 짜여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송흥록이 판소리에 음악적인 변화를 주기 위하여 느린 진양장단을 도입하였다.송흥록이 판소리의 속도영역을 확대함으로써 속도의 변화를 더욱 다채롭게 하고, 우조와 계면조로 선법적(旋法的)인 변화 및 판소리 음악의 정조(情調)의 변화를 더욱 다채롭게 하였다. 이와 같이, 장단의 변화, 조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송흥록의 판소리를 두고 당시의 사람들은 <여산폭포(廬山瀑布)>·<호풍환우(呼風喚雨)>·<천변만화(千變萬化)>라 하였으며, 신재효(申在孝)는 <광대가>에서 “송선달 흥록이는 타성주옥(唾成珠玉) 방약무인(傍若無人) 화란춘성(花爛春城) 만화방창(萬化方暢) 시중천자(詩中天子) 이태백(李太白)이라.” 하였는데, 만화방창하다는 것도 그의 변화무쌍한 판소리 기교를 두고 이른 것이라 하겠다. 기량이 출중하고 판소리발전에 크게 공헌하였기에 독보건곤(獨步乾坤)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신재효도 그를 시중천자로 꼽히는 이태백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모든 판소리에 뛰어났으나 그 중 <변강쇠타령>·<춘향가>·<적벽가>를 잘하였는데, 특히<춘향가> 중 <옥중가>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이 대목의 귀곡성이 유명하다. 또한 동편제 판소리를 확립하여 동편제 소리의 시조로도 꼽힌다. 그의 소리는 동생 광록과 수제자 박만순(朴萬順)에게 전승되었다.염계달(廉季達) 역시 8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고 충주에서 살았다. 모흥갑(牟興甲)·송흥록(宋興祿)과 동배(同輩)이다.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재질이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충청도 음성에 있는 벽절이라는 절로 들어가 10여 년 간 판소리를 수련하고 나와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헌종 때 어전(御前)에서 판소리를 하여 동지(同知)벼슬을 받았다. 김성옥(金成玉)과 더불어 중고제(中古制)판소리의 시조로 꼽히고 있는 그는 <장끼타령>과 <흥보가>를 잘하였고 권삼득(權三得)의 창법을 많이 본받았다. 경기도 향토가요조 판소리를 응용하여 여러 대목의 소리를 짜서 이를 경드름[京調]과 추천목이라고 불렀다. 경드름은 경기민요 <창부타령>·<도라지타령>과 같은 민요의 토리를 판소리화시킨 것이며, 추천목은 <한강수타령>·<오봉산타령>과 같은 민요의 토리를 판소리화시킨 것이다. 특히, 그는 <춘향가> 중에서 십장가 대목을 잘하였는데, 그의 더늠으로 <춘향가>에서 ‘남원골한량’ 대목은 경드름으로 되어 있고 <춘향가>에서 ‘네그른 내력’ 대목과 <수궁가>에서 ‘토끼 욕하는’ 대목은 추천목으로 되어 있다. 그는 판소리에 경드름을 도입한 명창으로 공이 크다.역시 8명창 중에 한 사람인 모흥갑(牟興甲)은 출생지가 경기도 안성의 죽산(竹山) 혹은 진위(振威)라고도 하며, 전라도 전주라고도 하여 확실하지 않다. 만년에는 전주에서 살았다. 송흥록(宋興祿)의 후배로 ‘고동상성’이라 하여 높은 소리를 잘 질러내어 후세사람들이 ‘설상(雪上)에 진저리치듯’ 이라는 별명을 지어 불렀다. 고종으로부터 동지(同知)의 직을 제수받은 그가 평양감사의 초청으로 평양 연광정(練光亭)에서 소리를 할 때 그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다 하며, 이때의 판소리도(圖)가 전해지고 있다. <적벽가>와 <춘향가>를 잘 불렀고, 당시 <적벽가>로는 그를 당할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더늠으로 전해지고 있는 <춘향가> ‘이별가’ 중 ‘날 데려 가오’하는 대목은 높은 소리를 계속 질러내는 그의 특징적인 고동상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신재효(申在孝)도 <광대가(廣大歌)>에서 “모동지 흥갑이는 관산만리(關山萬里) 초목추성(草木秋聲) 청천만리(靑天萬里) 학(鶴)울음 시중성인(詩中聖人) 두자미(杜子美)”라 평하였는데 학의 울음소리가 바로 고동상성을 이른 것 같다. 특히, 이 대목을 강산제(岡山制)라고 하는데 박유전(朴裕全)의 강산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의 강산제는 산조의 강산제와 음악적 특징이 일치하고 있다. 그는 말년에 이가 빠져 소리를 입술로 조정하여 불렀다. 이것이 그의 독특한 순음(脣音)더늠으로 후대의 주덕기(朱德基)에 의해서 방창(倣唱)되어 세상에 퍼졌다.고수관(高壽寬)은 조선 순조·철종 때의 8명창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충청남도 해미에서 태어났고, 말년에는 공주에서 살았다. 염계달(廉季達)의 소리를 많이 본받았으며, 목소리가 매우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딴 목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것은 남이 따를 수 없었다 하며, 그래서 ‘딴청일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더늠인 <춘향가> 중의 ‘자진사랑가’는 염계달의 소리제를 받아서 짠 추천목으로 되어 있는데 구수하기 이를 데 없다. 신재효(申在孝)도 <광대가>에서 “고동지(高同知) 수관(壽寬)이난 동아부자(同我婦子) 탑피남묘 은근문답(慇勤問答)하는 거동 근과농상(勤課農桑) 백낙천(白樂天)이라.”하여, 그의 구수하고 은근한 창법을 백낙천에 비기고 있다. 또한, 그는 유식하고 글재주가 있어 소리판에서 즉흥적인 한시를 잘 지었다 한다. 그의 더늠 ‘자진사랑가’는 송만갑(宋萬甲)·전도성(全道成)에 의하여 방창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많은 명창들이 부르고 있다.신만엽(申萬葉)도 조선 순조∼철종 때 활동한 8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순조 때 전라북도 여산군에서 태어나 고창에서 살았다. 송흥록(宋興祿)의 후배이고 김제철(金齊哲)·박유전(朴裕全) 등과는 동배라고 한다. 그는 석화제라 하여 경쾌한 소리제에 장기가 있었으며 이를 잘하였기 때문에 ‘사풍세우 신만엽(斜風細雨申萬葉)’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수궁가>에 능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토끼가 세상에 나오는 대목’을 잘하였다. 중중모리장단에 석화제로 ‘가자 어서가.’로 시작하는 소지노화(笑指蘆花)라는 대목은 경쾌하고 화창한 석화제로 되어 가야금병창으로 많이 부르고 있다. <수궁가>에서 토끼화상 대목에 나오는 특이한 성음들은 그의 더늠이라 한다. 그의 판소리가 화창하고 경쾌하기 때문에 신재효(申在孝)는 그의 <광대가>에서 “신선달(申先達) 만엽(萬葉)이는 구천은하(九天銀河) 명월백로(明月白露), 맑은 기운 취과양주(醉過楊州) 두목지(杜牧之)”라고 하였다. 이는 그 소리가 구천은하에서 떨어지는 백로와 같이 경쾌하고 화창하였음을 이른 것이다. 풍채좋고 정감적인 시를 많이 쓴 두목에 비긴 것도 신만엽의 이러한 특성 때문으로 보인다.김제철(金齊哲)도 조선 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활약한 판소리의 명창이다. 청주출신이며 전기(前期) 8명창의 한 사람이다. 중년 이후 경상남도 함양에서 살았다. <심청가>를 특히 잘하였고, 심청이 탄생하는 대목이 그의 더늠이라고 한다. 가야금병창과 비슷한 온화하고 명랑한 석화제로 소리를 하였다 하여 ‘가중처사(歌中處士)’라는 별명을 얻었다. 신재효(申在孝)는 <광대가>에서 “김선달 제철이난 담탕(淡蕩)한 산천영기(山川靈氣)명랑한 산하영자(山河影子) 천운영월(川雲嶺月) 구양수(歐陽脩)”라 하여 그의 소리를 구양수에 비교하여 명랑하고 유현한 음악성을 찬양하고 있다.황해천(黃海天)은 조선 정조·순조 때 활약한 판소리 명창이다. 김연수(金演洙)의 <창본춘향가(唱本春香歌)>에는 전라북도 김제에서 출생하였으며, 판소리 최고명창으로 알려진 하은담(河殷潭)에게 배운 것으로 되어 있고, 경종·영조 때 사람으로 되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는 권삼득(權三得)의 후배이며 송흥록(宋興祿)·염계달(廉季達)·모흥갑(牟興甲)의 선배인데 자웅성(雌雄聲)을 잘 하였다고 한다. 신재효(申在孝)의 <광대가>에 “황동지(黃同知) 해청(海淸)이난 적막공산 밝은 달에 다정하게 웅창자화(雄唱雌和) 두우제월(杜宇啼月) 맹동야(孟東野)”라 하여 자웅성과 웅창자화를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더늠은 알려진 바 없으나 자웅성을 잘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서 새소리와 같은 창법으로 음향에 맞게 소리를 잘 하였던 것 같다. 순조 때의 판소리 전기팔명창(前期八名唱)의 하나로 꼽는 사람도 있다.주덕기(朱德基)는 조선 순조에서 철종 때까지 활약한 판소리 명창이며 전기 8명창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라남도 창평출신이라고도 하고, 전라북도 전주출신이라고도 한다. 명창 상환(祥煥)은 그의 아들이다. 송흥록(宋興祿)과 모흥갑(牟興甲)의 고수(鼓手)로 있다가 명창이 될 결심을 하고 산에 들어가 밤낮으로 기도를 드리며 소리를 하였다. 이때 소리를 한마디하고 소나무 한 그루를 베어 수 천 그루의 소나무를 벤 일은 유명하다. 전주대사습에 나가 대명창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판소리를 나무를 패듯 아주 기운차게 하였기 때문에 소나무를 베며 소리한 것과 이를 관련시켜 벌목정정(伐木丁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힘찬 소리는 신재효(申在孝)의 <광대가>에 의하면 “주낭청(朱郎廳) 덕기는 둔갑장신(遁甲藏身) 무수변화(無數變化) 농락하는 수단이 신출귀몰소동파”라고 하여 소동파에 비교되고 있다. <적벽가>를 잘 불렀고, 더늠인 <적벽가> 중 조자룡의 활쏘는 대목은 박만순(朴萬順) 방창(放唱), 전도성(全道晟) 전창(傳唱)으로 전한다. 모흥갑의 유명한 입술로 내는 소리인 순음조(脣音調)의 강산제 더늠을 세상에 전하였으나, 소리제는 송흥록의 변화무쌍한 소리를 구사한 것으로 보인다. 낭청의 직계를 제수받은 어전광대로서 칭송을 받았다.철종 때에는 박만순·이날치·정창업·김세종·한송학·송우룡·정춘풍·장자백·김정근 등 많은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송흥록의 소리제는 박만순과 송우룡에게 전해졌고 김세종·장자백·정춘봉도 동편제 소리를 새로 발전시킨 명창이다. 박유전의 소리제는 이날치에게 전해졌고 따로 정창업도 서편제 소리를 발전시킨 명창이다. 김성옥의 소리제는 김정근에게 전해졌고 김정근과 한송학도 중고제 소리를 발전시킨 명창이다. 이 무렵에 신재효가 명창들에게 판소리 이론을 지도하였고 그 나름대로 여섯 마당 판소리 사설을 다듬었다.박만순(朴萬順)은 조선 말기 헌종부터 고종 때의 판소리 명창으로 전라북도 고부군(古阜郡)출신이다. 당시의 명창인 최승학(崔昇鶴)과는 동서간이다. 당시 8명창으로 꼽히던 주덕기(朱德基)에게 판소리를 잠깐 배우다가 명창 가운데 제일의 가왕(歌王)으로 치던 송흥록(宋興祿)에게 10여 년 간 판소리를 배우고 나서 수년간 수련 끝에 전주대사습에 나가서 소리한 뒤부터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송흥록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명창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순조 때의 8명창 이후로 첫손 꼽히는 명창으로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선달(先達)이 제수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양성(陽聲)으로 맑고 밝은 성음이며, 소리는 우조(羽調)를 주로 하여 짧고 진중하고 정대한 소리를 하였다고 한다. 진중한 아래 음역뿐만 아니라 매우 높은 음역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였고, 발림과 같은 것이 뛰어나 듣는 이로 하여금 심취하게 하였다 한다. 당시 그 앞에서 감히 소리로 겨룰 명창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뛰어나지 않은 대목이 없으나, 특히 <춘향가> 가운데 사랑가·옥중가와 <적벽가> 가운데 화용도(華容道)와 장판교대전(長板橋大戰)대목을 잘하였다. 그의 더늠 가운데 옥중가 중의 춘향의 몽유(夢遊)대목이 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貞烈)에 의해서 방창(倣唱)하여 전하고, <수궁가> 중의 토끼화상 그리는 대목은 그의 제자인 김찬업(金贊業)을 통해서 송만갑·전도성(全道成)·신명학(申明鶴) 등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다. 그의 다른 제자로는 고종 때의 명창인 오끗준·유공렬(劉公烈) 등이 있다.박유전(朴裕全 1835-1906)은 조선 말기 철종·고종 때 판소리의 명창이며 전라북도 보성 강산리에서 살았다. 목청이 뛰어나게 고와서, 타고난 명창의 소리인 천구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아서 선달(先達)벼슬을 받았고 오수경(烏水鏡)과 금토수를 하사받았다 한다. 판소리 선율을 세마치장단과 여러 장단을 운용하여 정연하고 변화 있는 부침새의 기교를 부려 정교하게 짜 새로운 양식을 개발하였는데, 뒤에 그의 호를 따서 강산제(江山制)라 불렀다. 그런데 이 강산이라는 말은 그가 살던 마을 강산리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흥선대원군이 그의 소리를 “제일강산(第一江山)이다.”라고 평하고 호를 강산이라 내린 데서 나온 것이라고도 한다. 섬진강 서쪽의 광주·나주·보성·장흥 등에서 불린 주로 계면조의 맑고도 높으며, 아름답고도 슬픈 기운을 띤 서편제(西便制)소리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전해질만큼 판소리 발전에 공이 크다 하겠다. 제자로 이날치(李捺致)·정재근(鄭在根)이 있는데, 이날치는 그의 소리를 계승한 뛰어난 명창이다. <적벽가>와 <심청가>를 잘하였고, 또 <춘향가> 중에서 <이별가>와 <새타령>을 뛰어나게 잘하였다. 그의 소리는 이날치·김채만(金采萬)·공창식(孔昌植)에게 전하여졌고, 다른 한편으로 그의 강산제의 소리가 정재근―정응민(鄭應珉)―정권진(鄭權鎭)에 의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이날치(李捺致 1820-1892)는 자는 경숙(敬淑)이며 후기 8명창 중의 하나로 꼽힌다. 전라남도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하였다. 명창 김창환(金昌煥)과는 이종간이다. 젊어서는 줄타기를 하였는데 날치와 같이 날쌔게 줄을 탄다고 하여 날치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수로 행사하다가 판소리에 뜻을 두어 박유전(朴裕全)문하에 들어가 수제자가 되었다. 박유전·정창업(丁昌業)이래 서편제의 제일 명창으로서, 당시 동편제의 대명창으로 알려진 박만순(朴萬順)·김세종(金世宗)과 겨루었다. 소리솜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음량이 매우 커서 그가 소리를 하면 10리 밖까지 들렸다 한다. 또, 쉰목소리와 같이 컬컬하게 나오는 소리인 수리성에 풍부한 성량으로 관중을 웃고 울리는 데 있어서는 누구도 당할 수 없었다. 박유전에게 배운 <새타령>을 노래하면 정말 새가 그의 노래를 듣고 날아들었다 한다. 모든 판소리에 능했으나 특히 <춘향가>·<심청가>를 잘하였고, <춘향가> 중 ‘망부사(望夫詞)’가 그의 더늠이었다. 박유전의 서편제 소리를 이어 김채만(金采萬) 등에게 전해주었다.고종 때에는 황호통·이창윤(李昌允)·김찬업(金贊業)·김창환·박기홍·김석창·유공렬(柳公烈)·이동백(李東伯)·송만갑·김창룡·김채만·정정렬(丁貞烈)·유성준 등 많은 명창들이 나서서 판소리 내용을 충실하게 닦았던 바, 이들 명창들에 의하여 판소리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또, 판소리의 각 파에 나타난 특징은 이들에 의하여 판을 마쳤고 또 이들에 의하여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니 황호통·김석창 등은 중고제 소리의 판을, 김찬업·박기홍·유성준은 동편제 소리의 판을, 김창환·김채만은 서편제 소리의 판을 막았다 하며, 송만갑·이동백·정정렬에 이르면 지역적 교류에 의하여 판소리 각 파의 특징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 마당 밖의 다른 마당의 전승 또한 이들에 의하여 판을 막았다.송만갑(宋萬甲 1865∼1939)은 조선 고종 때부터 일제 때까지 활약한 판소리 명창으로 당시 다섯 명창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전라남도 구례읍 봉북리(鳳北里)에서 태어났다. 순조 때 가왕(歌王)으로 칭호를 받던 흥록(興祿)의 종손이며, 철종 때 명창 우룡(雨龍)의 아들로 판소리 명문에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판소리를 공부하였고, 천재적 재질이 있어 13세 때에는 소년 명창으로 이름이 자자하였다. 아명(兒名)이 밤쇠였는데 어린 나이로 전주대사습(全州大私習)에 나가 성인들을 무색하게 하였다. 전라감사로부터 참봉직을 받았고, 원각사(圓覺社)시절에는 여러 차례 어전에서 소리를 하여 고종으로부터 감찰직(監察職)을 제수받았으며, 원각사 폐쇠 뒤에는 궁내부(宮內部)의 별순검(別巡檢)의 직을 3개월 정도 수행하였다. 어느 때 서편제(西便制)선배 명창 정창업(丁昌業)의 소리를 듣고 뜻한 바 있어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고매한 동편제(東便制)에 새로운 통속적인 소리조를 가미하여 불렀다. 이 때문에 집안에서 쫓겨나 객지로 돌아다니며 소리를 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서울에 올라와 김창환(金昌煥)과 함께 원각사 간부로 있으면서 판소리와 창극공연에 힘을 기울였다. 1933년에 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제자양성과 창극공연에 힘쓰다가 74세로 죽었다. 생전에 많은 제자를 길러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重根)·김정문(金正文)·박봉래(朴奉來)·박녹주(朴綠珠) 등 쟁쟁한 명창들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의 제자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 소리가 많이 전승되지 못하였다. 그의 소리는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나 아니리가 부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판소리교육과 더불어 많은 창극공연을 하였으며 이때 취입한 음반도 많이 남아 있다.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잘 하였고, 특히 <춘향가>·<심청가>·<적벽가>를 잘 하였다. 일제 때의 음반 중 <수궁가>의 ‘고고천변(皐皐天邊)’, <춘향가>의 이별가(離別歌) ‘날다려가오’, 단가(短歌) 중 ‘진국명산(鎭國名山)’ 등은 걸작이었다.이동백(李東伯 1867∼1950)은 본명이 종기(鍾琦)이고 아명은 동백(東白)이다. 충청남도 비인출신으로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공부하였고, 13세 때에는 김정근(金正根)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공부하고 다시 김세종(金世宗)에게 5년간 공부하였다. 20세 전후에 도만리 호리산의 용구(龍口)에서 2년간 독공(獨工)하였고, 다시 진주 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하였다. 절에서 나오자 창원부사의 부름을 받고 <새타령>을 불러 이름을 떨쳤다. 36세 이후 경상남도 창원에서 사는 동안 명창으로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46세 때 서울로 올라와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과 함께 원각사(圓覺社)에서 창극을 공연하였고, 원각사가 해산된 뒤 연흥사(延興社)·광무대(光武臺) 등에서 송만갑과 함께 창극과 판소리를 공연하였다. 1933년 송만갑·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판소리교육에 힘쓰는 한편, 창극정립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1939년 부민관에서 은퇴공연을 하자,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두달 동안이나 전국과 만주, 연해주일대까지 순회공연을 계속하였다. 그는 김세종에게 짜임새 있게 판소리를 배웠고, 성량이 풍부하고 풍채가 당당하여 거인적인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종은 그를 특히 사랑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계를 내렸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하였다.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고, 특히 <새타령>을 잘 하였는데, 그의 <새타령>은 이날치(李捺致)·박유전(朴裕全) 이후 첫손을 꼽고 있다. 제자는 많지 않으나 강장원(姜章沅)이 그의 소리 일부를 이어받았다. 그의 소리를 담은 음반이 수십 종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새타령>과 <흥보가> 중 ‘제비 후리려 나가는 대목’, <심청가> 중 ‘범피중류(泛彼中流)’ 대목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정정렬(丁貞烈 1876-1938)은 5명창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익산출생이다.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소질이 있었고 목청이 좋아 판소리에 뜻을 두고 7세에 정창업(丁昌業) 문하에 들어가 소리공부를 시작하였다. 14세 때에 정창업이 죽자 그 뒤 이날치(李捺致)로부터 배웠으나 16세 때에는 이날치도 죽어서 혼자 공부하였다. 수년 간 충청도일대의 여러 절로 돌아다니며 40세 안팎까지 공부를 계속하다가 마산에서 몇 해 동안 판소리를 지도하였다. 1926년에 50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 소리선생으로 활약하였는데, 그의 명망은 대단하였다. 그는 고종으로부터 참봉 벼슬을 제수받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춘향가>를 연마하였고, <춘향가>를 새로 짜서 정교한 음악적 특징을 가지도록 하여 이것을 발표하자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춘향가>를 배우게 되었다. 1933년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김창룡(金昌龍)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조직하여 교육과 판소리공연에 힘썼다. 특히, 창극공연에 힘써 그에 의하여 편극되어 무대에 올려진 1935년의 <춘향가>와 <심청전>은 획기적인 것이었고, 공전의 대성황을 이룬 작품이었다. 당시의 창극발전에 끼친 지대한 공은 독보적인 것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목이 탁하고 성량이 부족하여 여러 번 좌절하였으나 50세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수련을 하여 대명창이 된 것이다. 그의 음반으로 여러 대목이 남아 있는데 <춘향가>에 걸작이 많다.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에서 ‘신년맞이’이다. 그의 소리는 김여란(金如蘭)·김연수(金演洙)·이기권(李基權)·조진영(趙進榮) 등 많은 명창이 이어받았으나, 김여란의 <춘향가>가 정정렬의 바디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조선말과 일제시대에 판소리를 이어놓은 명창들로는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重根)·박봉래(朴奉來)·김정문(金正文)·정응민·공창식(孔昌植)·김봉학(金奉鶴) 등이 있었으며, 임방울(林芳蔚)·김연수(金演洙)·강장완(姜章浣)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광대노릇은 본디 남자들만이 하는 것이었으나 고종 때 신재효에 의하여 진채선(陳彩仙)이 최초 여명창이 되었고, 이어 나온 허금파(許錦坡)와 함께 세상에 이름을 떨치니, 한말과 일제시대에는 강소춘(姜笑春)·김녹주(金綠珠)·이화중선(李花中仙)·김초향(金楚香)·배설향(裵雪香)·박녹주(朴綠珠)등 수많은 여류명창들이 나왔고, 김여란(金如蘭)·김소희(金素姬)·박초월(朴初月)이 이를 이었다.20세기 초에 원각사(圓覺社)가 생기고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唱劇)을 처음 꾸며 공연한 뒤 창극이 성행하였고, 일제 때에는 협률사(協律社)·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거치는 동안 많은 창극이 공연되어 판소리 명창들이 여기에 휩쓸리게 되어 판소리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광복 뒤에는 한때 여성창극이 성행하여 판소리는 더욱 쇠미하게 되고 1960년대에는 창극도 기울어졌다. 1960년대에는 판소리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박동진이 판소리 다섯 마당의 전판 공연을 시도한 계기로, 박초월·김소희·오정숙(吳貞淑)·성우향(成又香)·박초선(朴初仙)이 판소리 전판 공연을 가졌다. 1960년대에 판소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박녹주·김연수·김여란·정광수·김소희·박동진·박초월·정권진·박봉술·한승호 등이 보유자로 인정되어 사라져가는 판소리 전수에 진력하고 있다.
연계정보
재구성판소리란 무엇인가, 최동현, 에디터사, 1994.판소리연구, 이국자, 정음사, 1987.판소리유파, 문화재관리국, 1992.판소리음악의 연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2000.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1991.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일조각, 1984.한민족음악론, 권오성, 학문사, 1999.http://www.pansoree.com/ 판소리http://www.pansori.pe.kr/ 국악공연 판소리http://www.koreartnet.com/wOOrII/sori/pansori/pansori_5madang.html 판소리 다섯마당http://www.dongchosori.co.kr/ 동초소리(오정숙)http://pansori.gochang.go.kr/ 고창 판소리 박물관http://www.chungrang.or.kr/ 판소리기능보유자 조상현http://www.kmusic.org 풍류마을http://www.ncktpa.go.kr 국립국악원http://www.koreandb.net 디지털한국학http://www.ocp.go.kr 문화재청
관련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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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해설
* 신재효1812(순조 12)-1884(고종 21). 조선 후기의 판소리 이론가·개작자·후원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 전북 고창(高敞) 출생. 어려서 한학을 배워 <사서삼경(四書三經)>, <제자백가어(諸子百家語)>에 능통하였으며, 1850년까지 치산(治産)에 솜씨를 보여 많은 가산을 모았고 가산이 넉넉해지자 판소리 명창들을 후원하는 한편, 판소리 연구에 몰두하였다. 1876년(고종 13) 기민(飢民)을 구제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으며,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陞品)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겸직하였다.그는 종래 계통없이 불러 오던 광대소리를 통일하여 <춘향가>·<심청가>·<박타령>·<가루지기타령>·<토끼타령>·<적벽가> 등 여섯 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그 대문과 어구를 실감나게 고쳐 독특한 판소리 사설문학을 이룩하였다. 특히 <박타령>·<토끼타령> 등은 창극화까지 하였으며, <광대가(廣大歌)>·<도리화가(桃李花歌)> 등의 판소리단가와 판소리 가집(歌集)인 <신오위장본(申五衛將本)> 등의 작품을 남겼다. 문하에서 김세종(金世宗)·전해종(全海宗)·진채선(陳彩仙) ·허금파(許錦波) 등 많은 명창이 나왔다.* 광대탈놀이·인형극 같은 연극이나 줄타기·땅재주 같은 곡예를 하는 사람, 또는 판소리를 업으로 하는 사람. 배우·배창(俳倡)·극자(劇子)라고도 불린다. 광대는 고려시대 탈의 뜻으로 쓰였으며 조선 전기에 탈이나 탈을 쓰고 연기하는 사람을 의미하게 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재인이란 말과 혼용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판소리를 업으로 삼은 가수와 고수를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신재효(申在孝)는 <광대가>에서 인물·사설·득음·너름새 등 네 가지를 광대가 갖추어야 할 기본요소로 꼽았다. 판소리를 부르는 광대는 창을 위주로 하는 ‘소릿광대’, 아니리와 재담을 위주로 하는 ‘아니리광대’, 용모와 발림 등 연극적인 개념을 중시하는 ‘화초광대’ 등으로 나누어 지칭하기도 하는데, 소릿광대를 가장 바람직한 광대로 평가하고, 아니리광대는 광대를 낮게 평가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국창·명창·상투제침·또랑광대와 같이 그 명성과 기예에 따라 서열을 두고 있었다고도 하는데, 창의 실력과 수준이 낮아서 겨우 한 고을에서나 행세하던 광대를 ‘또랑광대’라고 하고, 직업적으로 여러 고장으로 불려 다니던 광대를 ‘명창’이라고 했다. 그리고 ‘상투제침’은 원래 소년명창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명창과 또랑광대의 중간쯤 평가하는 기준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국창’은 명창 중에서 ‘전주대사습’이라는 경연대회에서 장원을 하거나, 궁중으로 불려가서 판소리를 하는 기회를 얻었던 사람에게 붙여준 명칭이었다. 국창에게는 감찰·통정 등의 벼슬이 주어졌다.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에는 판소리를 잘 불렀던 광대들의 이름이 특징적인 창법과 함께 시대순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이들의 출신지방을 보면 호남지방이 대부분이고 충청도·경상도출신이 약간 있고 경기도는 한명 뿐이다.* 원각사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夜珠峴]에 있었던 개화기의 사설극장. 1902년에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는데, 1906년에 문을 닫자 극장 건물이 한동안 관인구락부로 사용되다가 1908년 7월 박정동(朴晶東)·김상천(金相天)·이인직(李人稙) 등 3명이 건물을 대여받아 내부수리를 하고 원각사라는 극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전속단체를 재구성하여, 배우는 김창환(金昌煥) 등 명창 40명과 가기(歌妓) 24명을 두었다. 당대 최고의 국창(國唱) 이동백(李東伯)이 단장이었고, 요식업계의 태두였던 안순환(安淳煥)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원각사는 판소리·민속무용 등 재래의 연희를 주로 공연하였으며, 판소리를 분창(分唱)하여 창극을 만들기도 하였다. 새로운 것을 원하는 시대 추세에 따라 창작창극을 시도하였으며,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銀世界)>를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하였다. 원각사는 신연극을 공연한다고 하면서도 창극 <춘향가>·<천인봉>·<수궁가> 등을 공연하였다. 1909년 11월의 <수궁가> 공연 이후 실제로 공연활동을 끝나고 고외당으로 변모하여갔다. 즉, 국민회본부사무소로 쓰였고, 1910년 11월말 폐지되자 전속 명창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원각사는 당시로서는 좋은 시설을 갖추었으나, 국운과 함께 숱한 풍운을 겪고 결국 1914년 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극장은 개화기의 대표적 극장으로서, 전문적 극장시설을 갖춘 500여석 규모의 중극장으로 판소리를 분창하여 창극을 만들어냄으로써 근대연극의 기점을 마련하였다고 하겠다.* 협률사판소리 연구가인 박황(朴晃)이나 한말의 명창인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 등에 의하면, 협률사라는 이름은 1902년(광무 2)에 설립된 희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며, 1860년을 전후하여 판소리의 명창들이 중국 청(淸)나라의 협률창희에서 따온 것으로 주장한다. 이 단체에서 상연한 내용은 주로 판소리 ·줄타기 ·가무음곡 ·재담 ·농악 등의 연예물로서 창극은 상연되지 않았다. 이처럼 창악인들의 연예활동이 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자 자연히 대중의 연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정부에서도 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정부에서는 1902년 고종의 어극사십년 경례식(御極四十年稱慶禮式)을 대대적으로 가질 계획을 세우고, 고종의 칙허를 얻어 희대를 만드는 한편 이를 관장하는 협률사(協律司)를 두게 되었다.협률사에서는 가무녀(歌舞女)를 조직했고 한편 고종의 칙명을 받은 김창환(金唱煥)·송만갑 등은 전국의 명인(名人) ·명창(名唱)을 서울로 모았는데, 그 수가 170여 명에 이르렀으며 이들은 정부로부터 급료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한국 연예계에 처음으로 일대 변혁이 일어나는가 했으나 그 해의 콜레라 만연에 이은 농산물의 흉작, 그리고 일본·러시아 등과의 국제적 문제로 이러한 꿈은 사라지고 협률사(協律司)도 협률사(協律社)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1903년에는 경영권도 정부에서 민간의 손으로 넘어가 사설극장으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예술단체인 협률사가 연희하던 희대도 똑같이 협률사로 부르게 된 듯하며 이것이 한국 최초의 극장으로 일컬어진다. 이후 협률사는 공연장의 풍기문제 등의 이유로 1906년 정부로부터 폐지령을 받았고 따라서 예술단체의 활동도 위축되어 갔다. 그러나 당시에는 벌써 서양의 새로운 문물 바람이 점차 일면서 개방적이 되어 갔고 연희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 극장의 필요성은 더욱 증대되어 1908년을 전후해서는 원각사(圓覺社)를 비롯하여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등의 연극전용극장이 기존 건물을 개조하여 생겨났다. * 조선성악연구회1933년 5월 10일 여성 명창 김초향(金楚香)의 제안으로 송만갑(宋萬甲), 김창룡(金昌龍), 이동백(李東伯), 정정렬(丁貞烈), 한성준(韓成俊) 등 판소리 명창들이 중심이 되어 산조(散調) 명인, 경서도소리 명창, 민속무용수들을 규합하여 판소리, 남도잡가, 창극, 산조, 민속무용, 경서도소리 등 한국 전통음악의 공연과 전수를 목적으로 창립하였다. 참가한 단원은 명인·명창에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김연수(金演洙), 정광수(丁珖秀), 김준섭(金俊燮), 김초향, 박녹주, 김여란(金如蘭), 임소향(林少香), 김소희(金素嬉), 박초월(朴初月) 등이었고 명고수(名鼓手)에는 한성준, 김재선(金在先), 정원섭(丁元燮) 등이 있었다. 또 산조 명인에 강태홍(姜太弘), 박종기(朴鐘基), 한주환(韓周煥), 박상근(朴相根), 신쾌동(申快童), 정남희(丁南希) 등이, 가야금병창 명인에는 오태석(吳太石)이 있었다. 사무실은 김종익(金鍾益)의 후원으로 서울 익선동에 마련하였으며, 참가인원은 총 130여 명이었다. 총지휘는 이동백이 맡았으며, 창극의 작곡과 편곡은 정정렬이 담당하고 기획과 사무는 김연승이 맡았다.1935년에 창극단체를 결성하여 첫 작품으로 서울 동양극장에서 <춘향전>을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둔 후 전국 순회공연을 하였다. 1936년 2월에는 소장파들이 중심이 되어 직속 전용극단 창극좌를 결성, 그해 4월 창단작품으로 <흥보전>을 공연한 후 <숙영낭자전>·<별주부전>·<배비장전> 등을 공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원각사(圓覺社) 이후 주춤했던 전통음악에 대한 활동이 이들에 의해 부흥기를 맞았으나 1936년 말 운영진이 소장파로 넘어가면서 내부 의견 분열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들이 남긴 음반들은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판소리와 창극·민속기악의 보급과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관우희조선 정조 때 판소리 연구가 송만재(宋晩載)가 엮은 판소리집이다. 간행 연대를 181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판소리 열두 마당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주목되고 있다. 열두 마당은 장끼타령·변강쇠타령·왈자타령(曰者打令)·배비장타령·심청가·흥보가·수궁가·춘향가·적벽가·강릉매화타령·가짜신선타령·옹고집타령 등이다. 이 밖에 당시 판소리의 현황과 명창 등이 소개되어 있다.
관련사이트
고창 판소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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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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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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