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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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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해설

경기체가와 더불어 고려가요의 한 부분을 담당한 특정 갈래를 이르며 고려속요라고도 한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속요를 고려가사·고려가요·여요(麗謠)·장가(長歌)·별곡(別曲)·속악가사(俗樂歌詞)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다. 이는 향가나 시조처럼 당대인들이 미리 정해 부르던 이름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에 따라 이 노래묶음의 특색을 반영하는 이름을 찾아왔는데, 그 가운데 ‘고려가요’는 갈래의 명칭으로 적절하지 않고, 같은 시대의 경기체가를 포함하여 두루 일컬어야 할 용어이므로 제외된다. ‘장가’나 ‘별곡’은 노래의 특징을 살린 명칭이지만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과, 후대의 다른 갈래와 구분이 어렵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 ‘속악가사’는 <고려사〉악지(樂志) 속악조에 실려 있는 모든 노래와 <속악가사>·<악학궤범>·<시용향악보〉등에 실려 있는 노래 가운데 고려의 속악으로 쓰인 노래에 대한 총칭이다. 따라서 속악가사는 고려속요는 물론 경기체가·향가·무가·불가(佛歌)·민요 등이 모두 포함되므로 역시 적당하지 않다. 현재 전하는 속요는 <악학궤범>·<악장가사>·<시용향악보>에 실려 있는 <청산별곡>·<가시리>·<쌍화점〉등이 구비전승되어 한글로 정착된 14편(<후전진작(後殿眞勺)>을 넣으면 15편)과, <고려사〉악지·<익재소악부(益齋小樂府)〉 등에 실려 있는 <오관산(五冠山)>·<사리화(沙里花)>·<한송정(寒松亭)〉등 한역(漢譯) 노래 15편 등 모두 29편이다. 가사는 전하지 않고 노래 제목 밑에 지은이·유래·내용 등만을 간략히 적은 <서경(西京)>·<대동강〉같은 작품도 14편이 있다. 속요는 처음에 고려 이전 삼국의 속악 일부를 채택·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정치사회적인 기반이 신라 계통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지방세력을 통합한 바탕 위에서 성립되었으므로, 고려의 지배계층은 지방세력의 통합과 새로운 문화 형성을 위해 삼국시대 이래 오랜 세월을 거쳐 전승된 지방민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속요는 무엇보다 민요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했으므로 향유(享有) 계층도 자연히 민중층에 있었다고 하겠다. 고려 후기로 들어와 속요는 민중들만의 입에서 머무르지 않고 여러 경로를 통해 궁중으로 들어와 궁중의 속요로 수용·재편되었다. 충렬왕은 외모와 기예가 뛰어난 각 지방의 창기(倡妓)들을 뽑아 들였는데, 이때 각 지방에 전승·유포되던 민요가 이들을 통해 궁중으로 따라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 노래는 다시 궁중의 속악가사로 개편·재창작되어 왕과 신하들이 모이는 연회에서 불려졌다. 속요에서는 향가나 시조와 같은 정형성은 찾을 수 없으나, 전해오는 14수의 한글 표기 속요를 연장체(聯章體)와 단련체(單聯體)로 나누어볼 수 있다. 속요의 형식에서 또 다른 특이한 점은 후렴구와 반복구 및 조흥구(助興句)와 감탄사를 가진 노래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궁중의 속악가사로 채용·개편되면서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연장체형 노래에서는 단락을 나누는 구실 외에 장가화(長歌化)에 기여했고 단련체형 노래에서는 조흥(助興)의 구실을 했다. 속요의 형식에서는 또한 서사(序詞)와 결사(結詞)에 주목해야 한다. 서사는 당악정재(唐樂呈才)의 구호(口號)나 치사(致詞)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결사는 우리 시가에서 전통적인 형식에 맞추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곧 10구체 향가에서 9구 처음에 나오는 감탄사를 이었는데, 이것은 그후 조선시대 시조나 가사의 결사형식에 영향을 주었다. 율격면에서 속요는 주로 2, 3, 4음절을 음수율로 채택하고 있으나 3, 4음절이 우세하고, 음보율은 3, 4음보로 되어 있으나 3음보가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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