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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춤의 기반 구축과 현대적 양식 준비기
1960년대에 춤계는 창작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장르 세분화에 따라 현대적 춤 양식을 모색하는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60년대와 70년대가 기반을 구축해 나가는 시기였음을 반증하듯이 이 기간 동안에 뚜렷한 양식이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창작 기반 구축의 측면에서, 62년에 국립무용단이 창단되고 1970년대 중반 이후 다수의 시립무용단들이 서울, 부산, 광주 등지에서 설립되었으며, 63년부터 이화여대와 각 대학에 무용과가 더러 설치되었다. 교육과 창작 여건 확보 양면에서 실질적인 초석이 주어졌다. 춤 발표 공간의 문제는 70년대에 국립중앙극장을 비롯 전국에 걸쳐 시민회관 유형의 무대가 마련되면서 다소 해소되기 시작하고 세종문화회관과 더욱 결정적으로는 문예회관(문예진흥원 예술극장의 전신)의 건립으로 귀결되었다. 60년대에 시작된 춤의 기반 구축은 74년 문예진흥원의 설립과 76년 월간지 <춤>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국립무용단은 한국무용과 발레를 함께 추구하는 무용단으로 창단되었다. 이런 기형적인 체제는 1972년에 가서야 한국무용의 국립무용단과 발레의 국립발레단으로 분리됨으로써 해소된다. 60년대에는 창작 기반이 구축되기 시작하였을 뿐, 그 효과가 나타나려면 일정한 시일이 흘러야 하였던 것이다. 60년대에 육완순의 현대무용 교육과 현대무용단 창단은 현대무용의 발상지인 미국으로부터 현대무용을 직접 수련하고 도입한 의의를 갖는다. 신무용 시기 이래 일본을 경유해서 주로 독일 표현주의 계열의 응축된 현대무용을 받아들이고 또 현대무용의 응용폭이 좁았던 당시에 현대무용을 미국으로부터 직접 도입한 사실은 현대무용의 변화를 예고한 셈이었다. 일례로 육완순이 73년부터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를 전국적으로 발표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고 75년에 조직한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은 미래를 향한 초석이었다. 60년대에 한국무용은 신무용 시대의 분위기를 답습하고 있었다. 새로 창작된 춤과 전통 민속춤을 무대에 각색한 춤이 한 무대에서 공존하였고, 70년대에 들어와서도 전통 민속춤을 각색하는 작업은 흔하였다. 60년대 이래 춤계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연물의 빈곤을 절감하게 되며, 춤계 일각에서 시대 추세에 맞춰 특히 한국무용이 현대화되어야 한다는 각성이 일어난다. 게다가 국립무용단이 72년에 새롭게 발족해서 한국무용 단체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할 계기는 주어졌으나, 오히려 무용극이라는 양식에 매달려야 하는 한계가 있었다. 73년 홍신자가 귀국해서 올린 전위무용 공연은 어느 장르를 불문하고 무용인들에게서 논란을 일으키며 기존의 춤 관념을 동요시켰다. 당시 더러 내한한 해외 공연단들도 새로운 양식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76년 무렵 창작무용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한국무용에서 춤 언어 개발이 강조되어 관객이 공감할 춤을 새롭게 선보여야 한다는 필요성을 대변하였다. 일례로 김매자, 배정혜의 공연들은 기존의 춤사위를 벗어나고 쇄신된 구성으로 호평을 받았다. 같은 시기에 문일지는 전통춤들을 원형 그대로 올리는 작업을 창작춤과 함께 공연하였다. 신무용은 이 시기에 이르러 퇴조하기 시작하며, 무용극이나 무용시가 주도하던 춤계에 새로운 양식이 출현할 조짐이 보였다. 춤 언어가 개발되지 않고 따라서 양식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통춤을 다수의 한국무용가들이 주목하였으며 이후 한국무용은 창작에 유용한 전통적 언어부터 연마하고 조탁하여 새창작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통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전통춤의 미적 특질에 눈뜨고 또 권위 있는 전거로 받아들이는 새 태도가 싹트게 된다. 60년대부터 무형문화재 제도에 힘입어 전통 민속춤과 탈춤을 발굴 정리한 작업도 새로운 태도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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