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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신무용 시대
1926년부터 1945년 일제 시대가 끝나는 시점까지를 신무용 시대라 한다. 신무용 시대를 여는 결정적 계기는 일본인 이시이 바쿠(石井漠)가 26년 3월 서울에서 올린 공연이었다. 일본 현대무용의 개척자로 평가되는 이시이의 서울 공연은 <수인(囚人)>(반라의 이시이가 끈으로 결박된 양손을 풀고 해방의 환희를 묘사한 독무)과 <등반(登攀)>(무리한 등산의 무의미성을 환기한 2인무) 등 모두 11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이시이의 서울 공연을 계기로 신무용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고, 이후 이런 추세를 다진 사람은 최승희(崔承喜) 였다. 최승희는 이시이의 서울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 그의 제자가 되어 일본 동경에서 현대무용을 수련하게 된다. 이후 조택원(趙澤元)도 이시이에게 가서 현대무용을 배웠다. 그리고 1916년-1926년 사이 덴카스 곡예단에서 활동한 배구자(裵龜子)도 레뷰걸이 아닌 창작자로서의 길을 추구하여 1928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창작춤인 <아리랑> 등 몇 점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한국에서 신무용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시점은 최승희가 귀국하여 서울의 경성공회당에서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진 1930년 2월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완전 매진을 기록한 이 공연에서 그녀는 <오리엔탈>과 같은 서정적이며 서구적인 춤뿐만 아니라 <해방을 구하는 사람>과 같은 당시 한국 상황을 암시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조택원은 32년에 귀국하여 제1회 무용발표회를 34년에 열었다. 그리고 박외선은 동경에서 현대무용 발표회를 열었다. 신무용 시대를 수놓은 인물은 배구자, 최승희, 조택원이었으며, 소수의 그 외 무용가들이 신무용을 배웠다. 당시는 일제 치하였으며 국내에 무대 공연춤에 전념하는 무용인들이 소수였고, 더욱이 배구자는 35년 서울에 동양극장을 연 후에는 춤 활동을 그만 두다시피 하였다. 최승희는 31년에 와세다대학 유학생 안막과 결혼하고 33년 봄에 이시이에게로 돌아가 주로 일본과 해외에서 활동하였다. 이 무렵 최승희는 일본에 잠시 들른 한성준에게서 잠시 한국춤을 익혔다. 34년 가을 최승희는 동경에서 무용 발표회를 가져 대호평을 받았으며, 일본에서 계속 발표회를 갖다가 37년부터 근 3년 동안 미국, 남미, 유럽 등지를 순회 공연하였다. 조택원도 37년부터 1년간 유럽을 시찰하며 공연하였다. 최승희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와 이전 인기를 계속 유지하였다. 40년대에 들어와 조택원과 최승희는 일본군 위문 공연을 다수 가져 생애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그외에 김민자, 조용자 등이 이 시기에 신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신무용 시대에 한성준은 한평생 한국의 춤 현장에서 전통춤을 발굴하여 집대성하였으며, 특히 무대 공연 춤을 서구식 신무용 일변도로 인식하는 풍조가 수정되도록 <승무> <살풀이> <태평무> <한량무> 등 전통 춤 유산을 근대적 양식으로 개발하였다. 신무용은 새로운 무대 형식과 관람 방식이 요구되던 근대 초기에 무용가의 자율적 창작, 춤 작품의 완결성 그리고 춤의 독립성을 바탕으로 옥내 무대에서 공연된 신식 예술 춤이었다. 이를 위해 새 시대 정신에 어울리는 새로운 움직임 방식이 개발될 필요가 있었는데, 당시 무용가들은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견지하면서 현대무용을 바탕으로 한 신무용과 전통춤을 무대에 현대화한 신무용을 모색하였다. 전반적으로 신무용은 이 두 방향을 절충한 소품 공연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사실은 신무용의 작품 호흡이 길지 않았음을 반증하고 줄거리도 단편적 사실에 대한 인상을 재현하고 묘사하기에 치중한 편이었다. 신무용에서 삶의 단면에 대한 인상을 대체로 서정적으로 묘사하되 호흡이 짧은 작품을 무용시로 분류하는데, 우리 무용계에서는 1980년대 초엽까지 드물지 않게 창작되었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45년 이후 최승희와 조택원이 남북 양쪽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싶이 신무용 시대는 80년대 초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김채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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