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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지식 예술지식백과 (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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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용가

옛 글에 말로 다하지 못해서 시를 쓰고, 시로도 다하지 못해서 노래를 하고, 노래로도 다하지 못해서 춤을 춘다고 하였다. 이처럼 춤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감정표현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장르로 인식되었다. 전통시대의 춤이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형성된 시기는 개화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9년 서울 아현동 등지에 사설공연장인 무동연회장(舞童演戱場)이 세워져 공연했고, 이 때 사람들이 운집하여 장내 정리를 위해 경찰이 출동 할 정도였다고 한다. 새로운 무대공간의 출현은 새로운 춤을 이끌어 내었다. 1910년대 일제 강점기에 위태로운 처지가 된 궁중무는 이왕직아악부에서 김천흥, 성경린, 김보남 등에게 전수되었다. 궁중무의 계승자이며 교육자인 김천흥은 당시의 명고수이자 명무로 유명했던 한성준(1874~1941)을 만나 그에게 <살풀이>나 <승무> 등을 배우기도 하였다. 한성준은 근대춤이 형성되던 시기의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는 한평생 현장에서 전통춤을 발굴해서 집대성하였으며, 특히 서구식 일변도로 근대춤을 인식하는 풍조가 수정되도록 한국 전통춤의 유산을 근대적 유산으로 개발하였다. 대표적인 춤은 <승무>, <살풀이>, <태평무>, <한량무>, <훈령무>, <학무> 등이 있다. 1920년대는 한국춤의 큰 전환기이다. 1926년 3월, 일본의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1886~1962)가 경성공회당에서 사흘간 11개의 춤소품을 공연하였는데, 신무용이라는 새로운 개념과 양식이 출현할 계기를 제공하고 최승희와 조택원 등 한국인들이 춤에 투신하여 신무용의 기틀을 조성하도록 한 시발점이라는 무용사적 의의를 갖는다. 그 후 신무용은 무용가의 ‘자율적 창작’, ‘춤의 독자성’, ‘춤의 작품으로서의 완결성’을 바탕으로 무대에서 공연되는 신식예술춤으로 개념화된다. 배구자는 최초의 신무용 창작품을 제시하였으며, 최승희(1911~?)는 서구식 현대무용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고 현대무용의 기법으로 한국풍의 춤을 창작하고 공연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934년 동경에서의 첫 무용발표회에서 <검무>, <승무>, <에헤라 노아라> 등 15편의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한국적 분위기의 춤, 서정적인 춤, 시대상황을 반영한 춤으로 나눠 공연했다. 이 공연을 계기로 최승희는 국제적 무용가로 활동하게 되어, 1935년 한 해 동안 20곳 이상의 도시에서 공연하며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조택원(1907~1976)은 신무용의 선구자로서 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춤 예술의 환경 개선을 위해 헌신하였다. <승무의 인상>, <만종>, <포엠>, <학> 등의 작품이 있으며, 그의 작품은 한국의 흥과 멋에 바탕을 둔 시적 정서의 세계를 지향하였다. 그가 1930년대 말에 창작하여 발표한 <춘향전>과 <부여회상곡>의 무용조곡 양식은 그 후 한국에서 정착된 무용극의 선구적 양식이었다. 신무용시대 이래 우리 창작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춤이 고답적이며 낭만적 세계에 안주하게 유도한 무용시와 같은 춤 개념은 신무용이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근대적인 움직임 메소드(method)의 개발이 부진하였던 점과 춤으로 하여금 낭만적 세계에 치중하도록 한 점은 신무용의 한계였다. 해방공간 5년 동안 춤계는 문제를 제기하고 각성을 촉구하면서 기반을 세우는 데 주력하였으나 최승희 등 다수 무용가들의 월북, 조택원의 출국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단절되었다. 1945년 9월에 조선무용건설본부가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단체로 결성되었다. 박용호, 정지수, 장추화, 김민자, 한동인, 진수방 등 40여 무용인이 모여 식민지 잔재 청산과 춤의 토대 확립을 목적으로 건설하였다. 문철민은 해방 직후 춤계에는 남성 현대무용가 3인, 발레무용가 3인, 교육무용가 1인 그리고 여성 현대무용가 6인, 여성 발레리나 1인 그리고 조선무용가 2인이 있었고 그 문하생이 수십 명 있다고 밝혔다. 해방공간에서 조택원과 최승희를 제외하고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한 무용가로는 함귀봉, 장추화, 정인방, 한동인, 김보남, 조용자, 김막인, 진수방, 정지수, 이석예, 박용호, 김해성, 김윤학 등이다. 1950년대 춤계에서는 장르 구분이 조금씩 진전되고 있었으나 정착된 편은 아니었으며 현대 무용은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상대적으로 한국무용과 발레가 활발한 편이었다. 1950년대에 김천흥, 김보남, 이매방, 강선영, 김백봉, 송범, 권려성, 김진걸, 이인범, 김문숙, 주리, 임성남, 조광, 파조 외에 다수의 무용가들이 무용연구소를 열어 제자를 양성하며 공연을 병행하였다. 최승희와 동서지간인 김백봉은 1954년 제1회 발표회를 서울에서 갖는다. <부채춤>, <칼춤>, <화관무>를 공연하였는데, 조동화는 “민속무용에 대한 절망에서 예기치 않았던 한국무용사의 맥명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호평을 했다. 현재 해외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부채춤’은 이렇게 만들어 진 것이다. 당시의 춤 교육의 대부분은 무용연구소에서 이루어졌으며, 각 지역에서는 권번 출신과 민속 연희자들이 춤 교육을 주도하였다. 1953년 가을부터 박외선은 이화여대 체육과 무용전공 교수로 재임하였으며, 김천흥과 김보남이 이화여대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쳤다. 1960년대 춤계에서는 무용계가 안고있는 영세성을 탈피하고자 국립무용단을 건설하였다. 1962년 소공동의 중앙공보관에서 결단식을 가졌으며, 단장은 임성남, 부단장은 김백봉, 송범이고, 단원은 강선영, 권려성, 김문숙, 김진걸, 이월영, 이인범, 정인방, 조용자, 주리, 진수방 등 13명 이었다. 창단공연은 임성남 안무의 <백의 환상>, <쌍곡선>과 송범 안무의 <영은 살아있다>였으며, 이 단체는 차후에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으로 이원화된다. 1968년에는 멕시코올림픽 파견 한국민속예술단을 구성하여 우리 무용이 세계무대로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인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 조택원을 중심으로 송범, 김백봉, 김문숙이 안무지도를 맡았으며, 공연 작품은 <화관무>, <부채춤>, <검무>, <승무>, <무당춤>, <선의 유동>, <연가>, <농악무> 등이었다. 1970년대는 국립무용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송범은 국립무용단에서 <별의 전설>,<왕자호동>, <춘향전> 등을 안무하면서 무용극을 본격적으로 시도한다. 그는 국립무용단을 통해 국수호, 정재만, 조흥동 등 춤계의 남성 리더를 길러냈으며, 박정목, 손병우, 차효영, 양성옥, 최정임, 이문옥, 김향금 등을 무용수로 키웠다. 한국 창작무용이 등장한 시기도 1970년대이며, 1977년 배정혜의 <타고남은 재>와 김매자의 <비단길>이 초기 창작춤이다. 문일지의 서울시립무용단과 한국무용아카데미, 김매자의 창무회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한국무용에서 새로 시도될 창작은 이전의 신무용이 직면했던 한계를 타개할 해법으로 여겼으며, 1979년에 창설된 대한민국무용제는 한국무용 분야 창작춤에 대해 새로이 자성할 계기를 조성하였다. 1980년대는 창작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서울의 공간사랑과 창무춤터를 중심으로 활성화된 소극장 운동은 창작춤 인구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매자, 문일지, 배정혜, 김현자는 한국 창작춤을 이끌어가는 ‘4두 마차’로 평가되었으며, 김숙자, 국수호와 채상묵, 김근희도 활발히 활동하였다. 또한 1887년 이후 제2의 창작춤 세대라 할 수 있는 윤덕경, 김영희, 강미리 등이 주목할 만한 작품을 발표한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김숙자가 이끄는 한울무용단, 리을무용단과 독립된 오은희, 김말애와 춤타래무용단, 박재희와 청주 새암무용단, 이청자가 이끌던 인천시립무용단, 인천 중심의 이은주무용단, 장유경의 다움무용단, 경희대 출신의 정은혜, 창무회 제2새대의 중요 멤버였던 김영희가 무트댄스를 발족시켰고, 한양대를 근거로 김운미가 무용단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한다. 1990년대 한국 창작춤은 1980년대의 발전기와 달리 ‘주제의 심도’, ‘작품의 스케일’, ‘동참 한국 무용인의 수’에서 상당한 폭과 깊이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21세기 한국춤의 과제를 꼽는다면, 보편화된 서구의 미학적 원리에 의해 가려졌던 우리 춤의 독자적인 원리와 특질을 실제화 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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