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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1945년 창작동요

1930년대에는 1931년 박태준의 두 번째 창작동요집인 <양양범버궁>을 통하여 여러 편의 동요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현제명은 1932년 <현제명 작곡집 제1집>을 통하여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로 시작하는 <가을>, “해는 저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로 시작하는 <고향생각> 등을 발표하였고, 같은 해 강신명도 <강신명 동요 99곡>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933년 홍난파는 <조선동요 100곡집 하권>을 통하여 50편의 동요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에는 “개굴 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로 시작하는 <개구리>, “알송 달송 무지개 고은 무지개…”로 시작하는 <무지개>, “도라지 캐러 간 바구니 속에 나리꽃 메꽃이 웬일인가요…”로 시작하는 <여름>,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으로 시작하는 <햇빛은 쨍쨍> 등이 있다. 또한 이흥렬은 이은상의 동요극 <꽃동산>의 노랫말을 주제로 하여 20여 편의 동요를 작곡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1933년 <꽃동산>이란 동요 작곡집을 출판하였다. 여기에는 “나비 나비 흰나비…”로 시작하는 <나비노래>, “보셔요 꽃동산에 봄이 왔어요…”로 시작하는 <꽃동산> 등이 수록되었다. 김성태는 구전으로 불려 오던 <새야새야 파랑새야>를 오선으로 채보하는 한편, “방울새야 방울새야 쪼로롱 방울새야…”로 시작하는 <방울새>(김영일 작사)를 비롯하여, <산새>, <뱅글뱅글돌아라>(윤석중 작사), <강아지래요>(김성도 작사) 등 15곡을 작곡하여 등사판으로 된 <동요집>을 발간하였다. 강신명은 1936년 <아동가요곡선 300곡집>을 발간하는 등, 동요 작곡과 함께 보급에도 힘을 쏟았는데, 이 책은 그때까지 창작된 한국 동요를 집대성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권태호의 “나리나리 개나리…로 시작하는 <봄나들이>(윤석중 작사), “하얀 눈 하얀눈 어째서 하얀가…”로 시작하는 <눈꽃새>(모기윤 작사), 김대현의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로 시작하는 <자전거>(목일신 작사), 김성도의 “따따따 따따따 주목 손으로…”로 시작하는 <어린음악대>(김성도 작사)와 “서산넘어 햇님이 숨바꼭질 할 때면…”으로 시작하는 <아기별>(윤태웅 작사), 박태현의 “넓고 넓은 밤하늘엔 누가 누가 잠자나…”로 시작하는 <누가 누가 잠자나>(목일신 작사),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서늘한 바람…”으로 시작하는 <산바람 강바람>(윤석중 작사), “얘들아 나오너라 달따러 가자…”로 시작하는 <달 따러 가자>(윤석중 작사), 이일래의 “산토끼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로 <산토끼>(이일래 작사) 등 주옥같은 명작 동요들이 30년대에 출현하였다. 1930년대에는 창작뿐만 아니라 보급면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여전히 일본창가를 가르쳤지만, 교회나 사회단체가 중심이 되어 동요 보급에 앞장을 섰고, 방송에서도 동요를 보급하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양악문화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한 교회는 동요를 보급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음악가들은 거의 기독교 교인이었으며, 교회는 중요한 음악 활동의 장이었다. 교회의 주일학교에서는 학교의 음악교육 기능까지 담당을 하였는데, 학교에서는 일본창가만 가르쳤지만, 교회에서는 찬송가와 동요를 가르치고 불렀고 또 어린이 성가대를 조직하여 동요를 보급하였다. 동요 작곡가들의 상당수가 주일학교와 어린이성가대에서 활동을 했고 또 이곳 출신이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그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한편 당시 동요 보급에 기여한 사회단체로는 윤극영 중심의 ‘색동회’, 정인섭 중심의 ‘녹양회’, 유기홍을 중심으로 한 ‘녹성동요회’ 그리고 ‘경성 꾀고리회’ 등이 있었다. 이들 단체들은 신작 동요 작곡에서부터 순회연주·음반취입·방송출연 등 보급에 이르기까지 동요 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1927년부터 이 땅에 처음으로 전파를 발사하기 시작한 경성방송국은 1933년부터 창작 동요를 방송하기 시작하였고 얼마 후 평양방송국에서도 동요를 방송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는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으로 말미암아 수난을 맞게 된다. 특히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학교의 음악교육은 전쟁수행의 도구로써 전락을 하였고,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전시가요와 군가 등 전쟁과 관련된 노래만을 부르도록 강요가 되었다. 더 이상 새로운 동요가 창작되지 못했고, 기존에 만들어진 동요들도 부를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 ‘암흑기’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뿌리채 잘린 것이 아니라 지하에서나마 동면(冬眠)의 상태로, 새로운 시대를 대비한 새로운 싹을 준비하고 있었다. 민경찬(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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