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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연극의 극작가

극작가가 한국연극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서구 연극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20세기 이후로 보아야 하겠다. 그 이전에도 소학지희(笑謔之戱)의 구성자나 구전하는 판소리를 기록한 신재효 등을 선구적 극작가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들이 독창적인 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했다고는 할 수 없어서 아직 개별적 극작가로 보기에는 미흡하다. 1908년 이인직이 <은세계>를 원각사에서 공연하였으나, 희곡문학에 대한 개념이 적었던지 작품은 신소설로만 발표되었다. 1911년 임성구의 ‘혁신단’ 이래 신파극이 도입되면서 많은 작품들이 공연되었으나, 이 역시 극작가의 개념이 희박하여 대강의 줄거리를 갖고 배우 각자가 구찌다데(口建. 정해진 대본 없이 배우의 임기응변에 따라 즉흥적으로 대사를 말함)식으로 공연하였다. 최초로 지상에 발표된 작품은 1912년 조일재의 <병자삼인>이었으나, 이 작품은 그 뛰어난 소극성(笑劇性)으로 번안물로 간주되고 있고 조일재 역시 신소설 작가로 간주되고 있다. 결국 1917년 이광수가 <규한>을 발표하여 창작 희곡의 장을 열었으나, 그는 널리 알려진 근대 소설가이다. 결국 1910년대에 희곡을 발표했던 윤백남, 최승만, 유지영 등을 최초의 극작가로 간주해야 하겠다. 특히 윤백남은 연극계의 선구자로, 사진결혼의 병폐를 알린 <운명>은 당대에 공연까지 되면서 인기를 누리었다. 1920년대에 가면서 보다 많은 극작가들이 등장한다. 초반 다양한 근대 사조와 유학생의 생활을 그린 조명희의 <김영일의 사>가 굉장한 인기를 끌었으나, 조명희는 역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1922년 김영보가 최초의 희곡집 <황야에서>를 냈으나, 수록된 다섯 작품들은 대개가 외국작품의 번안물인 것 같다. 1920년대를 대표하는 극작가로는 아무래도 김우진, 김정진, 김영팔 등을 꼽겠다. 박승희는 ‘토월회’를 주도하여 1920년대 가장 연극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인물이지만, 극작가 보다는 연출가로 꼽아야겠다. 김우진의 <이영녀>나 김정진의 <기적 불 때>같은 작품은 사실주의극의 수용을 알리는 작품이었으며, 모더니즘 역시 김우진의 <난파>나 김정진의 <십오분간>에서 수용되었다. 한편 김영팔은 <싸움>이나 <부음> 및 <곱창칼>등을 발표하여 프로 희곡을 개척한 공로가 크다. 1930년대의 대표 극작가로는 유치진과 송영을 꼽겠으며, 이외에도 채만식, 이광래, 김영수, 함세덕, 서항석, 박영호, 이무영, 임선규 등이 활약하였다. 유치진은 1930년대 ‘극예술연구회’를 주도하면서, <토막>이나 <소> 등의 의식 있는 농촌 희곡을 쓰고 사실적으로 연출함으로써 한국 사실주의 연극을 완성하였다. 실로 유치진은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극작가일뿐더러, 이후 한국연극을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극예술연구회’를 통하여 이광래, 이무영, 함세덕 등을 발굴 등장시켰다. 한편 송영은 1930년대 프로 희곡을 주도했다는 의의가 큰데, <아편쟁이>, <호신술>, <신임이사장> 등을 발표하였다. 채만식은 소설가이면서도 <제향날>, <당랑의 전설>, <농촌 스케치> 등의 역사와 사고의 깊이를 가진 희곡들을 발표했으며, 함세덕은 <산허구리>나 <동승> 등으로 심리적 사실주의를 개척하였다. 임선규는 대중희곡을 대표하는 작가로, 동양극장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대중극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1937년 만주사변 발발 이래로 일본은 전국을 군국주의로 몰고 갔으며, 국민연극만이 상연될 수 있었다. 해방기에는 좌우 이념을 강조하는 희곡들이 부각되었으며 신고송, 김사량, 이기영, 함세덕 등이 좌익을, 유치진이나 오영진 등이 우익을 대표하는 극작가였다. 특히 함세덕의 <고목>과 오영진의 <살아있는 이중생각하>는 각 진영을 대표하면서도 예술성을 갖춘 수작이었다. 1950년대에는 자연히 6·25전쟁과 그 상처를 다룬 희곡이 주류를 이룬다. 기성의 유치진, 김영수, 김진수를 비롯하여 새로이 신인 작가들이 등단하였으니 차범석, 임희재, 하유상, 주평 등을 꼽겠다. 특히 차범석은 <나는 살아야 한다>, <불모지>, <산불> 등을 발표하면서, 시대의 대표작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차범석과 ‘제작극회’ 동인이었던 김자림이나 박현숙도 1960년을 전후하여 등단하면서, 여성극작가의 시대를 열었던 것도 의의가 깊다. 1960년대 이후에는 더욱 다양한 극작가들이 등장하며, 모더니즘의 추구도 본격화 된다. 이근삼은 1960년 사상계에 <원고지>로 등단했으며, 반사실주의적 연극 기법을 본격화한다. 이후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 <국물 있사옵니다>, <유랑극단> 등등의 작품을 계속해서 내놓으며, 우리 연극에 취약했던 반사실주의적 연극의 대부로 자리 잡는다. 박조열은 1963년 <관광지대>로 등단하여, <모가지가 긴 두 사람의 대화>나 <오장군의 발톱> 등으로 반사실주의를 계승하고, <토끼와 포수>에서는 특유의 희극성을 불어넣었다. 이재현은 1965년 희곡 <바꼬지>로 분단현실을 주목하고 등단하여, 그 회향의식이나 포로수용소 연작 등에 주력하였다. 오태석은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웨딩드레스>로 등단하며, 앞으로 이 반사실주의 극작가 계열에 선두주자가 된다. 윤대성 역시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출발>로 당선하여, 한국 연극적 전통을 현대극에 접목하거나 날카로운 사회 비판과 개인 존재와 중산층 가정을 다루는 등 다양한 문제의식을 선보였다. <격랑>으로 등장한 노경식은 철저하게 사실주의를 고수하며, 6·25 문제와 강인한 여성상을 선보였다. 1970년대에는 이강백과 이현화 및 이반 등이 등단했으며, 1960년대의 연장선상에서 다양한 극작이 시도되었다. 이강백은 우화적 기법이 뛰어났으며, 특히 이현화는 그 포스트모던적 선구성으로 인해 희곡들이 난해하다. 1980년대에는 마당극이 저항담론으로 등장하여, 공동 창작이 많았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사회는 소위 해체화와 국제화를 겪으며, 새로운 극작가들이 활약한다. 이윤택, 김광림, 조광화, 박근형, 장진 등이 주목받는 작가군으로, 새로운 밀레니엄을 개척하고 있다. 이미원(연극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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