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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100]대한민국을 이끄는 원동력 IT

[한국문화100]대한민국을 이끄는 원동력 IT IT, 정보통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의 하나이다. 한국의 IT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월등한 기술력으로 세계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속도와 응집력으로 성장하여 이제는 일상의 한 부분이 된 한국의 IT를 알아본다. IT대본 내레이션 대한민국은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제 우리는 K씨의 생활 안에서 전통과 현대를 넘어 대한민국이 품고 있는 미래 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K씨는 스마트폰을 통해 버스의 예정 도착 시간을 확인합니다. 필요한 문서들 역시 어디서나 쉽게 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거리 어느 곳에서든 원하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고 커피 주문도 네트워크 안에서 자유롭게 진행됩니다. 스마트폰, 인터넷, 네트워크 등 우리 사회를 바꾸는 기술. 우리는 이것을 IT,? Information Technology, 정보통신기술이라고 부릅니다. 자막 IT,Information Technology, 정보통신기술 내레이션 정보를 주고받는 것은 물론 개발, 저장, 처리, 관리하는데 필요한 모든 기술이 정보통신기술, IT입니다. IT산업은 대한민국 미래 가능성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정보의 변화와 융합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있는 IT산업 분야에서 대한민국은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이원석 / 연세대학교 컴퓨터과학과 교수 IT활용강국의 입지는 계속 살려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 지금처럼 단편적 요소, 데이터나 시스템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문화차원으로 승화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활용강국으로 계속 남게 되면 전 세계에서 새로 나오는 기술들은 다 우리나라에 먼저 오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먼저 적용이 되고 제일 먼저 접하게 되어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내레이션 반도체, 소프트웨어, 이동통신기술, 복합전자기기 등 대한민국의 IT산업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세계 어느 곳보다 빠르고 높은 기술력과 보급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실제 일상생활에서 IT는 보다 쉽고 밀접하게 우리의 생활 속으로 녹아들고 있습니다. 스마트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IT산업은 사람들의 삶을 보다 혁신적으로 바꿔놓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 반도체 시장 점유율 등 많은 IT관련 지표에서 독주 체제를 굳히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IT기술력은 이미 세계 정상 수준이며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기업의 IT제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IT기술이 가진 가능성은 무한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는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만 등장하던 가상현실이 이제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습니다. 놀라운 속도와 응집력으로 세계의 트렌드 중심에 있는 대한민국의 IT산업. 더욱 성장시키고 발전을 이뤄야 하는 우리의 중요한 미래 가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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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한국문화100]신성한 경계 금줄

한국인의 일생과 함께 했던 금줄. 부정을 막거나 신성한 대상의 경계를 나타내는 금줄의 가치를 재조명해본다. 제목 : 신성한 경계 금줄 내레이션 부정한 것을 금기한다는 뜻으로 걸쳐 놓은 새끼줄. 대문이나 길어귀, 신성한 대상물에 우리민족은 새끼줄을 매달아 경계를 표시하고 금줄이라 불렀다. 지역에 따라 그 형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왼 방향 새끼를 꼬아 용도에 따라 상징적인 물건을 꽂았다. 인터뷰 김창호 /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금줄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금줄을 친다고 이야기 하지요. 금줄을 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냐면 우리가 사는 보편적인 공간에 아주 특별한 공간이 생겼을 때 그 공간을 보편적인 공간으로부터 분리해내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내레이션 악운이나 음습한 기운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는 목적을 가진 금줄은 마을의 기원을 비는 서낭당이나 신성한 대상물에 주로 설치한다. 신성한 경계라는 주술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금줄을 친 당산나무를 범접하면 몸이 상한다거나 금줄을 함부로 제거하면 악귀를 만난다는 등의 금기가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금줄은 그 자체로 신성한 대상물이기 때문에 소원을 기원하거나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한 용도로도 활용된다. 특히,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대문에 매달던 새끼줄의 형태가 금줄의 대표적인 사용 모습이다. 인터뷰 강호식 / 짚풀생활사박물관 아기를 낳으면 금줄이라고 해서 대문위에다 사람 머리 안 걸릴 정도로 매달아요. 아들을 낳게 되면 고추가 들어가고 종이 백지, 숯, 솔가지를 넣고. 딸을 낳게 되면 고추를 안 넣고 솔가지하고 숯하고 이렇게 세 가지(종이)만 꼈다고 해요. 인터뷰 인병선 / 짚풀생활사박물관장 아이한테 만일 부정한 것이 들어오면 아이에게 해로우니까 그것을 막는다는 개념도 있었지만 또 하나는 우리 집에 아이가 태어났다 손자, 손녀가 태어났다는 것을 마을에 알리고 그럼으로써 마을사람들이 축하도 해주지만 근신하는 것이지요. 함부로 들락거리지 않게 하는 경계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내레이션 금줄은 사회적 규약이며 약속이다. 우리민족 스스로가 창출해 냈던 자율적 공공질서였다. 지켜야 할 것, 침범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사회 구성원 스스로의 약속.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금줄이 가진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계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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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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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민족기원의 상징 단군

[한국문화100] 민족 기원의 상징 단군 한민족의 시조이자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과 홍익인간 정신에 대해 알아본다. 단군대본 내레이션우리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 고조선.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던 시기, 부족들을 통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한 인물이 바로 한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단군이다. 자막고조선(기원전2333년) 요동과 한반도 서북구 지역에 존재한 최초의 국가단군 우리민족의 시조 내레이션단군과 고조선에 관한 첫 기록은 고려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찾을 수 있으며 자막단군신화가 기록된 최초의 사서 삼국유사단군왕검이 아사달을 도읍으로 조선을 개국했다 내레이션특히, 고조선의 건국에는 우리 민족 시조 신화인 단군 신화가 포함되어 있다. 아주 오랜 옛날, 하늘의 신인 환인에게는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환웅은 아버지 환인에게 ‘하늘에서 살기보다 인간세계로 내려가서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고 이에 환인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라는 홍익인간 정신을 당부하며 자막홍익인간 홍 크다(규모가 거대한 모습) 성장 생산성 경쟁력 자유익 돕는다 더한다 이롭게 한가 빼앗음 착취 억압 방관사람 사이 관계 인간세상 공동체 내레이션인간세상 다스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백산 자락으로 내려와 사람들과 함께 살던 환웅에게 어느 날,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빌게 된다. 곰과 호랑이의 정성을 갸륵하게 여긴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당부한다. 성질이 급한 호랑이는 약속한 기일을 참지 못하고 굴 밖으로 뛰쳐나와 사람이 되지 못했지만 환웅의 말을 믿고 잘 참은 곰은 결국 아름다운 여인이 된다. 사람들은 곰에서 변한 여자를 웅녀라고 불렀고 웅녀는 환웅과 결혼하여 건강한 아들을 낳게 된다. 이 아이가 고조선의 첫 번째 임금인 단군이다. 인터뷰윤명철 / 고조선단군학회장 동국대학교 교수일부에서는 곰과 호랑이의 존재 특히 곰이 웅녀로 변신한 다음에 환웅과 결혼했기 때문에 이것을 곰 토테미즘(자연물을 집단의 상징으로 삼는 형태)이라든지 아니면 신화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신화와 토테미즘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당시 곰과 연관되어 있던 특정한 집단일수도 있고요. 아니면 곰은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의 곰이 아니라 원래 우리 말, 특히 알타이어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단어가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 중앙아시아 전체에 퍼져있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바로 가미라고 불리는데요. 이 가미라는 것은 알타이어에서 무당을 뜻합니다. 감, 검, 금, 고마, 개마 이렇게 나타납니다. 이때 곰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의미의 곰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무당을 뜻하면서도 주로 밝음과 상대되는 어둠과 연관된 하늘에 대비되는 땅과 연관된 단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민족의 여러 개 지명, 산명, 인명 등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이라는 것은 생물학적 의미의 곰 일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우리 알타이어 문화권에서 가지고 있는 감계언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한 개 집단과 땅 지역과 농경문화를 관리하는 지모신의 고마, 개마, 검 집단의 결혼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자막참성단(사적 136호) 인천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 내레이션사적 제136호 참성단. 강화도 화도면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께서 제천의 대례를 행하고 뜻을 드높였던 곳이다. 그러한 뜻이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어, 단군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를 건국한 것을 기리는 매년 10월3일 개천절에는 여전히 중요한 제천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자막 단기 4347년 개천대제 2014년 10월 3일 마니산 참성단 인터뷰이상복 / 강화군수1년 동안에 많은 고생을 해서 곡식도 잘 재배를 했고 또 여러 가지 보람 있는 일도 있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감사의 뜻도 하늘에 올리는 뿐만 아니라 내레이션각지의 단군성전에서도 개천절에는 어김없이 민족의 시조 단군을 기리는 행사를 거행하며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 홍익인간,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단군 신화 속의 이념은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최고 이념으로 윤리의식과 사상적 전통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인토뷰김창환 / 국학원 사무총장우리나라 국조 단군이 나라를 건국할 때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한 것이 홍익인간입니다. 홍익인간은 말 그대로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너와 내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이고 또 인간과 자연이 하나라는 사상입니다. 우리가 지금 물질문명이나 경쟁 속에 사는 우리 사회에서는 너와 내가 분리 되어 있고 너와 내가 경쟁을 해서 이겨야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홍익인간 사상은 나뿐만 아니고 상대방, 인간뿐만 아니고 자연 모두가 행복하고 이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런 사상입니다. 내레이션단군신화에는 다른 나라의 신화에서와 달리 신들 혹은 인간과의 대립, 갈등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처럼 홍익인간의 이념에는 조화와 평화를 중시하는 세계관이 담겨있다. 단군. 단군과 그의 정신은 단순히 부정확한 역사와 과장된 신화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 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적 역할을 해왔다. 단군의 의미와 정신은 끊임없이 기억해야 할 우리 민족의 출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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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대한민국 국화, 무궁화

대한민국의 나라꽃[국화(國花)]이며, 예부터 한반도를 부르는 ‘근역(槿域)’의 유래이기도 하다. 한국문화100 무궁화편 대본 대한민국의 국화, 무궁화 내레이션 옛날 옛날에 장미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어린왕자가 있었습니다. 그 행성 옆에는 저 어린공주가 외롭고 쓸쓸하게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함께할 친구를 찾았죠. 자막 안녕, 무궁화 내레이션 아무도 찾지 않는 행성이지만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어요. 궁금해진 저는 그 친구에게 말을 걸었지요. 넌 누구니? 안녕, 난 한국의 국화 무궁화라고 해. 오, 그래? 그럼 넌 어떤 꽃이니? 나는 한국인과 무려 오천년을 함께한 민족의 꽃으로 고조선 이전인 신시시대부터 한화로 불리며 한국인과 함께해왔지. 자막 무궁화는 고조선 이전인 신시시대부터 한화로 불린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내레이션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내 품종은 수 백 종으로 배우 다양해. 대표적으로 배달계, 홍단심계, 백단심계 등이 있지. 자막 무궁화의 품종은 수 백 여종으로 매우 다양함 대표적으로 배달계, 홍단심계, 백단심계가 있음 내레이션 이름만으로는 잘 모르겠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니? 물론이지. 자막 배달계 흰색을 좋아하는 배달민족을 닮았다해서 배달계로 불리며 단심이 없는 순백의 무궁화 내레이션 우선 배달계 무궁화는 흰색을 좋아하는 배달민족을 닮았다고 해서 배달계라고 불려. 그리고 무궁화 중에 품종 수가 가장 많은 홍단심계는 붉은색 계통의 꽃잎과 단심으로 가지고 있어서 홍단심계로 불리지. 자막 홍단심계 붉은색 계통의 꽃임에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으며 무궁화 중에 품종수가 가장 많음 내레이션 또 백단심계는 흰 꽃잎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는 무궁화야. 자막 흰 꽃잎에 가운데 붉은 단심이 있음 재래종과 도입종의 교잡에서 선발한 무궁화 내레이션 아 그럼 넌 백단심계 무궁화구나 오, 똑똑한데? 아 그리고 꽃잎에 무늬가 있는 아사달계나 외국도입품종인 청단심계 무궁화도 있어 자막 청단심계 아사달계 아사달계는 꽃잎에 무늬가 있는 무궁화이며 청단심계는 외국도입품종이다. 내레이션 또한 나는 황실이나 귀족들에 의해서 국화가 정해진 다른 나라들과 달리 민중들에 의해서 나라꽃으로 정해졌단다. 오, 멋있다. 근데 왜 난 너를 한 번도 보지 못 했을까? 그건 한국인들이 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사실 나는 일제 강점기 시대에 거의 멸종될 뻔 했었어 일본인들이 민족정신을 말살 시킨다고 나를 보기만 해도 눈병이나고 진드기가 많이 꼬이는 꽃으로 매도했거든. 그 바람에 현대의 한국인들은 나에 대해 오해를 갖게 되었지 아, 그랬구나. 자막 일제강점기시대 때 무궁화는 일본의 민족정신 말살에 의해 거의 멸종 될 뻔 했다. 진드기가 많은 꽃, 눈병을 옮는 꽃 내레이션 하지만 이제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제정할 만큼 나에 대해 관심이 많아져서 괜찮아. 그런데 왜 하필 8월 8일이야? 그 이유는 8월에 내가 제일 만개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숫자 8을 옆으로 보면 무한대 기호가 되지? 응, 그렇네. 그 기호는 끝없이 반복되고 무궁하다는 뜻으로 내 이름의 뜻과도 같아 그리고 나는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걸 100일 동안 매일 반복해 이러한 나의 영원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국인의 정신에 반영되어 있지. 너 정말 대단한 꽃이구나. 그런데 해가 지면 널 다시 볼 수 없는 거야? 아니야, 한국에 가면 날 다시 볼 수 있어 아 한국? 한국은 어디에 있어? 저기 있는 별 보여? 안녕, 무궁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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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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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9

[한국문화100]떡, 그 속에 담긴 한국인의 다양한 이야기

한국의 전통음식인 떡에 대한 소개영상 한국문화 100 떡, 그 속에 담긴 한국인의 다양한 이야기 나레이션 한국의 거리에서는 떡집을 쉽게 찾아볼수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음식인 떡은 예로부터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즐겨먹던 친숙한 음식입니다. 요즘도 명절, 결혼식, 생일 등 다양한 행사에서 떡을 찾고 있는데요 왜 한국인들은 이토록 떡을 찾는 것 일까요? 쌀 농사를 주로 짓던 옛 선조들은 남은 쌀 재료와 잡곡을 섞어서 떡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정확히 언제부터 떡을 만들어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발굴 된 떡시루 등을 놓고 볼 때 청동기 또는 초기 철기시대부터 먹지 않았을까 짐작이 됩니다. 한국인들에게 떡은 오랜기간동안 많은 사랑을 받는 전통음식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인공 조미료가 가미된 자극적인 음식과는 달리 쌀, 콩, 팥 등의 천연 재료만으로 만들어지는 웰빙 음식인 떡은 지금까지도 건강식으로 한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먹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부터 떡은 크고 작은 행사에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음식이었습니다. 특히 결혼과 같은 집안의 경사에 떡은 필수품이었는데요 행사별 떡의 자세한 의미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인터뷰 혼례 때는 찰떡(찹쌀떡)을 가지고 인절미를 비롯한 여러 가지 떡을 만들어 이바지로 보내고 있어요. 그 우수한 떡의 세계화를 위해서 우리가 좀 더 노력하여 우수한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 속에 꽃피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백일 때는 하얀색으로 떡을 만들죠. 그건 맵쌀가루로 물을 반죽한 후 시루에 안쳐서 만드는데, 아이가 순수하게 무럭무럭 자라라는 의미로 만들고... 또 나쁜 것을 막아주고 건강하게 잘 자라라는 의미로 수수팥떡을 열 살까지 해서 먹습니다. 나레이션 과거에는 직접 집에서 떡을 만들어 이웃과 나누어 먹는 풍습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화가 되면서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웰빙 열풍을 타고 직접 떡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데요, 집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떡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인터뷰 이것은 단자라고 하는 떡이에요. 단자라는 것은 안에 소가 들어간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삶는 떡입니다. 경단은 소가 없는 것을 말하고 이렇게 소가 들어간 것을 단자라고 합니다. (단자는)어린아이 생일과 어르신들 생신 상에 많이 올려요. 이렇게 소를 넣고 바람을 빼줘야 해요, 바람이 안 빠지면 삶을 때 터집니다. 잘 안 터지게 꼭꼭 주물러서 동그랗게 돌려준 다음에 삶으면 됩니다. 자막 - 물이 펄펄 끓을 때 단지를 넣어준다. - 단지가 서로 달라붙지 않게 가끔 저어준다. - 물위에 단지가 뜨면 (약 6~7분 정도) 건져낸다. - 건져낸 단지는 완전히 식을 때까지 찬물에 헹구어낸다, - 찬물에 헹궈낸 단지는 자연 건조 시킨다. 이때 설탕을 조금 뿌려주면 수분이 빨리 제거된다. 인터뷰 이제는 삶은 단지에 고물을 묻히는 작업입니다. 자막 - 카스테라가루, 거피 팥, 녹차 가루 등 식성과 기호에 따라 다양한 고물을 만들어 묻히면 된다. -대추와 해바라기 씨 등으로 마무리해주면 끝. 나레이션 자 이제는 여러분도 집에서 맛있는 떡을 만들어 볼 수 있겠죠? 최근 한류열풍으로 인해 k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떡을 찾고 배우려는 외국인들이 참 많아 졌는데요, 우리 전통음식인 떡에 대한 외국인들이 반응이 상당이 흥미롭습니다. 인터뷰 매우 흥미롭고, 전통적입니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배우게 돼서 즐겁습니다. 우리 떡,한과가 크고 푸짐한 것 보다는 한입에 쏙들어가는 것, 고물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그냥 먹을 수 있는 것, 이처럼 더 기능적인 식품이 들어 가야되고, 아름다워야 되고, 또 좀 두고 먹어도 굳지 않아야 되고, 이런 점들이 더 보완이 된다면 정말 훌륭한 떡, 한과가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이)떡을 하면서 내가 먹는 떡이 아니라 나누어 먹는 떡으로, 항상 가족을 생각하고 내가 좋은 일이 있을 때에 동네사람이나 직장동료들과 나누어 먹는 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아마 떡은 사랑이고 나눔이고 우리민족성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레이션 이처럼 몸에도 좋고 맛도 좋은 떡은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즐길 수 있는 웰빙 식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우수한 떡의 세계화를 위해서 우리가 좀 더 노력하여 우수한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 속에 꽃피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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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소통과 헌신의 지도자, 세종대왕

자막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릉 na : 지난 5월 15일, 세종대왕 탄신 617돌 숭모제전이 경기도 여주 세종대왕릉에서 봉행되었다. 숭모제전은 조선을 탁월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글창제는 물론 국방, 과학, 문화 등 수많은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종대왕의 위업과 애민정신을 기리고 추모하는 행사이다. int : 박종국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회장 세종대왕의 교육 정신을 계승하고 이어가고자 하는 취지에서 정부에서는 1982년도에 세종대왕 탄신일을 법정 기념일(스승의날)로 정했습니다. 세종대왕의 정신과 교훈을 이어받아 교육을 시키는 것에는 기본적인 바탕에 그분의 신의와 믿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거짓말 하지 않고 신뢰를 지키면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심정, 즉 마음이 고르면 정치와 행정 모두 조금의 문제 없이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종대왕은 신하들에게 직언도 서슴없이 하셨는데 na : 세종은 결코 ’고분고분한’ 왕이 아니었다.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 임금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추진력이 강한 군주였다. 목표가 일단 정해지면 끈질기게 구성원들을 설득하고 다독이며, 또 어떤 때는 위협까지 하면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결단을 내리는데 있어 끊임없이 신하들과 의논하고 토론했고, ’소통하지 않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다’라고 보았던 세종은 설정된 목표에 왜 도달해야 하는지, 지금 변화하지 않으면 조만간 어떤 파국을 맞게 되는지를, 상세하고 명확하게 일깨워가면서 함께 나아갔다. 이것이 찬란한 조선시대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리더십의 요체였다. int : 박현모 / 여주대학교 교수,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대부분 정치가나 관료들, 또 어떤 기업이나 조직의 장만 해도 내가 잘해서 너희에게 베풀어 줄게 이런 생각을 하지, 더불어서 목표를 정하고 그들의 수준을 끌어올려서 함께 갈려고는 하지 않거든요. 아시다시피 한글창제, 문자란 권력을 백성들에게 준 거잖아요. 그건 굉장한 불편함을 지도자가 감내하는 거거든요. 문자라는 권력을 주고, 또 해시계 물시계와 같은 시간이라는 중요한 정보를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거 거든요. 본인은 왕 스스로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수준을 확 끌어 올려서 함께 나아가도록 하는, 그런 일종의 모험인데 그 점에서 굉장히 우리가 요즘 배워야 할 요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na :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책을 보며 정사를 돌보기에 힘썼던 세종은 재위 중반부가 되면서 온몸은 망가지고 갖가지 질병으로 힘들어하면서도 그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설득하고 추진하고, 확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말 뿐인 지도자가 아닌 몸으로써 결과로써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는 정치를 해내었다. int : 박현모 / 여주대학교 교수,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 외국인들도 세종에게 굉장히 공감하는 코드들이 있는데, 지도자가 결정할 때 바로 눈앞에 보이는 엘리트들이 아니고, 가장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면서 결정을 내리는 것들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사람이 반응을 보이고 그것이 말로 휴머니즘에 대표적인 사례다. 이것은 단지 한민족의 문제가 아니고, 글로벌하게 다 통하는 리더십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조치를 하고 그걸 제도화해서 경국대전에 반영되도록 한 그런 휴머니즘적인 리더십, 리더십의 지평을 좀 확 넓히면 굉장히 사람들로 하여금 신이 나게 하는 그런 리더십의 사례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na : 취미이자 특기가 공부였고, 의젓하고 조심하며 부지런한 성격의 소유자 세종. 성격이 다정다감해서 부모 형제에게 효제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겸손하면서도 공경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 왕이라고 자신의 지위를 들어가니 않고 겸손으로 백성을 섬겼던 왕 소통과 인내가 부재한 이 시대에 사회 계층의 각각의 지도자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을 일깨워 또 다른 세종시대가 열리길 바래본다. 자막 세종대왕 업적 1397년(태조 6년, 1세) 4월 10일(양력 5월15일)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하다. 1408년(태종 8년,12세) 충녕군에 책봉되고 심온의 딸(소헌왕후)과 혼인하다. 1412년(태종12년,16세) 충녕대군에 진봉되다. 1418년(태종18년,22세) 6월 왕세자로 책봉되다. 1418년(태종18년,22세) 8월 10일(양력 9월 18일) 조선 제4대 임금으로 등극하다. 1419년(세종 1년,23세) 이종무가 227척의 병선을 이끌고 대마도를 정벌하다. 1420년(세종 2년,24세)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키다. 집현전의 기구를 확장하여 궁중에 설치하다. 1421년(세종 3년,25세) 주자소에서 금속활자 「경지자」를 완성하여 인쇄술을 개량하다. 1423년(세종 5년,27세) 금속화폐 「조선통보」를 주조하다. 1424년(세종 6년,28세) 사죄(死罪) 삼복법(三覆法:삼심제)을 정하여 죄인의 억울함을 줄이다. 불교의 종파를 선종, 교종 양종 35사로 통합하다. 악기도감을 설치하고 악기를 제조하다. 1426년(세종 8년,30세) 젊은 학자를 뽑아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하게 하다. 1430년(세종12년,34세) 새로운 세법인 공법(貢法)의 실시 여부를 각도의 수령과 백성들에게 물어 찬반의 숫자를 조사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론조사) 관노비(官奴婢)의 출산휴가에 대한 법을 정하다. 1433년(세종15년,37세) 압록강 이북 여진족을 토벌하고 4군을 설치하여, 국경을 이룩하다. 정초,이천 등의 「혼천의」를 제작하다. 1434년(세종16년,38세) 장영실이 제작한 「자격루」를 보루각에 설치하여 사용하다. 조판 주조의 법을 개량하고, 새 활자 「갑인자」를 만들다. 「앙부일구」를 혜정교와 종묘 앞에 설치하다. 1437년(세종19년,41세) 이천 등이 파저강 야인(여진족)을 정벌하고 6진을 설치하여 국경이 동북으로 두만강에 이르게 하다. 1441년(세종23년,45세) 「측우기」를 제작하고, 「수표」를 세우다. 1443년(세종25년,47세)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언문청을 설치하다. 1445년(세종27년,49세) 화포를 개량하여 화포의 사정거리가 2배 이상 늘어나다. 「용비어천가」,「의방유취」를 편찬하다. 1446년(세종28년,50세) 소헌왕후가 승하하여 영릉(서울 내곡동)에 장사하다. 훈민정음을 반포하다.「훈민정음 해례본」을 완성하다. 1447년(세종29년,51세) 「치화평」, 「취풍형」, 「여민락」등의 악보를 완성하다. 「석보상절」을 간행하고,「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하다. 서울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을 개축하다. 1448년(세종30년,52세) 경복궁 안에 내불당을 건립하다.「동국정운」을 간행하다. 1449년(세종31년,53세) 두만강 유역의 6진을 모두 개척하다. 1450년(세종32년,54세) 2월 17일(양력 4월 8일) 영응대군 집 동쪽별궁에서 승하하시어, 소헌왕후가 안장된 영릉(서울 내곡동) 서실에 합장하다. 1469년(예종 1년) 영릉을 서울 내곡동에서 경기 여주군 능서면 위치에 천장하다. 자막 우리 모두가 소통과 헌신의 리더십을 일깨워 이 시대에 또 다른 세종시대를 열어 나가길 소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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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3

[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한국문화100]마을 공동의 문화공간 정자나무 예로부터 마을의 휴식과 신앙 또는 회합이 이루어졌던 정자나무의 가치를 재조명해본다. 정자나무편 대본 내레이션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의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정작, 사람들은 서로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지 오래입니다. 혹시,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고 계신가요?혹시, 마을주민들과 서로 인사하며 지내시나요?혹시, 마을주민들과 모여서 어울린 적이 있으신가요? 사람은 넘쳐나도 삭막하기만한 현대의 도시. 서로가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만한 공간과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마을사람들이 정을 나누던 공간이 있었습니다. 마을 초입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람들이 모여 마을 일을 의논하거나 쉬기도 했던 오래된 고목. 우리 조상들은 편안한 그늘을 제공해주던 큰 나무를 정자나무라 부르며 사랑방처럼 함께 머물렀습니다. 정자나무는 한결같은 포근함으로 어른들에게는 휴식을 아이들에게는 놀이공간을 제공하였습니다. 정자나무의 넉넉한 규모와 수령처럼 정자나무와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습니다. 인터뷰김판조그전에는 집이 초가삼간이잖아요. 늘어진 초가집인데 더워서 못살아. 그러니까 점심을 먹으면 다 나온거예요. 다 나와서 오후 세시정도 되어 조금 서늘해지면 그때 일터로 나갔는데 꽉차버려요, 여기가. 이렇게 올라가서 저렇게 늘어진 가지에다가 훈주(줄타기)도 타고 여기 나뭇가지에다가 그네도 매어놓고 그네도 타고 그랬어요. 어르신들이 나뭇가지 찢어진다고 못하게 했지. 내레이션현대의 도시들이 들어나고 사람들이 각자 바빠지면서 정자나무는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습니다. 하지만 다시금, 늘 정이 넘쳤던 정자나무의 모습을 기억하고 따뜻하며 푸근했던 그 순기능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름지기재단과 서울디자인재단이 공동으로 기획하는 마을정자나무프로젝트입니다. 자막마을정자나무 가꾸기 프로젝트, 아름지기재단, 서울디자인재단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350세 느티나무 인터뷰장영석 / 아름지기재단 사무국장그동안 먹고 사는 문제, 급속히 산업화되고 경제적인 부분들을 쫓다가 결국은 다시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전통에서 힌트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자나무만 하더라도 그냥 단순히 오래된 나무일뿐이지만 사람들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아래 같이 모여서 사람 살만한 동네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되거든요. 요즘 만들어지는 그 어떤 최신식의 건물이나 현대적인 공간보다도 사람들에게 더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곳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자나무 하나하나를 고쳐가는 것이 단지 자연보호 운동이 아니고 더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김순희이런 공간이 생기니까 동네도 아름답고 공기도 좋은데 환경이 깨끗해지니까 살기 좋고 보기 좋지요. 박지훈주변에 자주 왔는데요. 정비된 후에 풍경도 더 괜찮아 진 것 같고 포근한 기분이 들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내레이션정자나무는 단순히 마을의 큰 나무가 아니라 사람, 자연, 문화가 어우러지던 마을의 상징적인 소통 공간이었습니다. 사람사이의 단절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요즘, 정자나무가 가지는 정의 가치는 우리가 다시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인터뷰방영자안락하고 시원하고 굉장히 정서적으로 좋네요. 이혜숙(혼잡한)도심 속에 있는 느낌이 안 들고 편안하고 어느 시골에 와있는 그런 느낌이 드네요. 내레이션마을 공동의 문화 공간 정자나무,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할 우리의 문화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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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한민족의 성산, 백두산

우리나라 최고 높은 산, 정상에 위치한 천지는 한민족의 성지이다.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한 한민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에 대해 알아보자. 백두산나레이션 높이 약 2,750m 총 면적 8천평방 킬로미터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백두산이다. 백색의 부석이 얹혀 있는 모습이 마치 흰머리와 같다 하여 백두산이라 부른다. 이민부/한국교원대 지리학과 교수Q. 백두산이란?백두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2744m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북아시아 대륙에서도 가장 높은 산지이고 특이하게도 화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깨끗하게 잘 만들어진 층층이 쌓인 성층화산으로 이루어져 있고, 화산채의 크기가 용암이 흘러내린 면적까지 하면 2만2천평 정도에 달하며 한반도의 10분의 1에 이르는 거대한 화산재입니다. 자막백두산 봄백두산의 봄은 6월 즈음에 돼서야 찾아온다. 장대한 백두 폭포로부터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해발 2000미터, 백두산의 고산화원에 냉랭한 찬바람을 이겨내고 백두산의 영기를 받은 꽃들이 피어오른다. 자막백두산 여름백두산의 연평균 기온은 영하7.3도고 최저 기온은 영하44도에 달한다. 7월 중 잠시나마 짧은 여름이 찾아온다. 수면 10미터 깊이 있는 돌이 마치 잡힐 듯 천지의 물은 맑다. 자막백두산 가을한반도에서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9월 초, 백두산에는 일찌감치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 가을이 시작되는 것이다. 곱게 물든 가을풍경은 백두산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이점수/ 사진작가Q. 백두산 등산 당시 모습?처음 백두산을 올랐을 때 웅장함과 장엄함의 기상적인 백두산의 느낌은 숨이 멈출 정도로 감개무량했습니다. 그리고 또 (백두산의 매력으로는) 가을에 백두산을 촬영 하다보면 온도가 내려가고 날씨가 추워지면 눈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10월이나 9월 하순에 백두산 등반 시 가을과 겨울이 공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막백두산 겨울눈으로 뒤덮인 백두산의 설경이 장관인 이때. 바로 백두산의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계곡 위로 두껍게 쌓인 눈은 이듬해 7월까지도 녹지 않는다. 하지만 한겨울에도 50도가 높은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백두산 온천의 신기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일찍이 한민족의 발상지였으며,숭배되어 왔던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수난을 같이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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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조선 최고의 의학전서, 동의보감

현재까지도 인용되는 한의학의 대표서적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우리 민족의 의학서로 역사적의의가 높으며 의학지식과 치료법에 관한 백과사전이다. 유네스코 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동의보감의 가치를 알아보고 동의보감의 탄생과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 동의보감 대본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염병이 번지며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때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조대왕은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의학 서적을 제작하게 명하였다. 선조대왕은 태의인 신하 허준을 부르시고 “의학서를 편찬하라” 이와 같이 하교하셨다. 이러한 임금의 뜻을 받들어 허준은 왕실이 가지고 있던 여러 의학서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며 의서를 완성했으니, 이 책이 바로 동의보감이다. 인터뷰 김요한/ 산의학박물관 학예연구사 Q. 동의보감이랑 무엇인가? 동의보감은 의학서적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단순한 의학 서적이 아니라 그 시대를 집대성한 백과사전인데요, 동의는 중국이 북의와 남의로 나뉘어서 큰 양대 산맥으로 이루고 있었는데 이것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동의라는 제 3의 길을 간다는 의미를 띄며, 또 보감이라는 것은 감이라는 글자가 백과사전처럼 명확하게 객관적인 진실 된 내용만 담긴 주로 역사책이나 법전에 쓰이는 단어인데요, 그렇게 해서 이 둘이 합친 것이 동의보감으로, 길게 말하면 중국과는 또 다른 한의학적 길을 가는 백과사전이라는 뜻의 이름을 의미합니다. 나래이션 동의보감은 실제로 환자를 치료하면서 경험한 의학 정보를 정리한 것은 물론이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의학 서적을 하나로 모아 집대성한 ‘동양 의학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일반인들을 위한 의학 서적이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의학서적 최초, 세계 기록 유산으로 동의보감이 등재되었다. 세계기록유산 동의보감, 어떻게 구성되어있을까 ? 인터뷰 김쾌정/ 허준박물관장 Q. 동의보감은 어떻게 구성 되어있나요? 동의보감은 25권 25책으로 구성되었으며 크게 5가지로 구분되어있습니다.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동의보감에는 1212가지 방대한 약재가 등장하고 그 가운데서 637가지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중심으로 향약명이라고 해서 한글기록으로 일반서민들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제작되어있습니다. 나래이션 동의보감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4권으로 구성된 내경편은 인체 내부의 구조와 문제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으며 외형편은 몸의 겉에서 관찰되는 부위의 기능과 질병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잡병편에는 질병의 원인과 증상 및 이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이며. 탕액편은 약재 채취와 약을 달이는 내용 등, 또한 백성들을 위한 처방이 담겨 있다. 약재의 효능을 기술할 때 우리 땅에서 나는 향약명을 함께 써서 백성들 또한 약초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침구편에는 침과 뜸을 만드는 법, 혈 자리 찾는 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목차 2권까지 포함해 동의보감은 모두 25권 25책으로 완성된 종합 의학 서적이다.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어떻게 활용 되었을까? 동의보감은 처음 목활자로 만들었으나 전하지 않고 이후 목판본으로 출간된 것이 전하고 있다. 글을 잘 쓰는 이가 판목위에 글자본를 작성하고 전문 각수가 글자를 새기게 된다. 글자새김이 끝나면 활판에 먹물을 묻혀 글자를 찍어내는데 방대한 양으로 동의보감은 편찬을마치고도 판각과 인쇄에만 3년이 걸렸다 당시 동의보감이 전국으로 널리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발달된 목판인쇄문화가 있어서 일 것이다. 나레이션 동의보감은 병이 발생하기 전 신체의 조화를 중시여기는 ‘양생’에 중심사상을 두고 있다. 동의보감의 한 대목을 살펴보자. 첫째, 하루의 금기는 저녁에 배부르게 먹지 말것 둘째, 한달의 금기는 그믐에 술을 많이 먹지 말것 셋째, 한해의 금기는 겨울에 멀리 가지 말 것 이 기록은 반드시 하지 말아야 금기사항이다. 이와 같이 동의보감에는 조선시대에도 예방차원의 양생법을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의보감에서 사람의 몸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신형장부도이다. 신형장부도는 살아 있는 사람의 체내에서 정기신의흐름과 오장육부의 운행을 그린 일종의 개념도인 것이다. 동의보감 신형장부도는 자연과 사람의 조화, 오장육부건강을 설명하고 있다. 허준은 오장육부를 건강하게 할 수 있는 예방법을 기록해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게 했다. 얼굴은 자주 만져주면 혈압, 동맥경화 등의 치료를 도와주는 효과가 있다. 귀는 신장과 관계가 깊다. 장수하기 위해서는 귀를 자주 만지는 것이 좋다. 이러한 예방법등은 인체에 저항력이 충분하다면 병이 생길 수 없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동의보감은 인체 내적인 조화와 균형을 중요하게 여겼고, 간편한 민간요법으로 처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의보감. 동아시아 최고의 의학백서! 독창적이고 명료한 기록, 동의보감에 담긴 건강한 삶과 생명을 이야기는 선조들이 후대에 남겨준 귀중한 기록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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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드넓은 영토를 개척한 광개토대왕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장 시켰던 광개토대왕에 대해 알아본다. ------------------------------------------------------------------------------------------- Na 이곳은 충북 충주에 위치한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전시관에는 고구려가 만주부터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던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비석, 충주 고구려비이다. int 박경애 / 충주 문화관광 해설사 한반도의 유일한 (고구려) 석비라는 사실 만으로도 굉장히 큰 역사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비 비문에 나오는 내용을 통해서 그때 당시에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넘어서 이곳 충주지역까지 진출했었던 확실한 증거자료입니다. Na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의 기록이 남아 있는 충주 고구려비, Na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까지 그 기초를 닦아 놓은 왕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장수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이다. Na 어느 나라나 어느 민족이나 자랑할 만한 왕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여러 가지 업적 가운데 나라를 키우고 영토를 확장하는 왕만큼 존경받는 왕이 없을 것이다. Na 그래서인지, 광개토대왕을 가리키는 완전한 이름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인데, 이 이름은 땅을 넓게 차지하고 나라를 잘 다스린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int 고운기 /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는 주로 중국 쪽 나라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광개토대왕비에는 그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와의 관계 그리고 또 바다 건너 일본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보면은 광개토대왕은 북쪽으로는 중국에 여러 나라들과 활발한 외교전을 벌였는가 하면 또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면서 남진정책의 시발점도 바로 광개토대왕 때 부터 이루어졌고, 광개토대왕은 동서남북을 통틀어서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한 확장시켜 나갔던 그런 왕이었고, 이런 기록들이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전해집니다. Na 중국 지린 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경기도 구리시에서는 후손들에게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과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고자 실제 크기의 광개토대왕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그 비문의 내용을 일부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Na ‘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Na 왕위에 올라 20여년의 기간 동안 나라를 부국하게 만들기 위해 쉴 틈없이 달렸던 광개토대왕은 39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게 된다. int 고운기 /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고구려의) 국경이 확대가 되고, 또 그 확대된 국경 속에서 나라가 온전히 이어나갈 수 있게끔 그 틀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 언제 드러나냐면 그의 아들인 장수왕 때 드러나요. 장수왕은 왕위에 무려 70년을 넘게 있었어요. 그리고 이름도 장수왕이에요. 장수왕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고구려가 있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정말로 잘 물려받았던 것이 뭐냐면, 이렇게 큰 나라를 지키고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전쟁만 가지고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무력에 의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70년을 고구려를 끌고 갔거든요. 그것이야말로 사실 우리가 고구려의 역사 속에서 특히 5세기에 광개토대왕에게 배워야 하는 가장 훌륭한 역사적 교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죠. Na 우리민족을 일컫는 말 중에 배달의 민족이라는 말이 있다. 배달의 뜻은 고구려의 기상과 뜻을 널리 펼쳤던 우리 민족을 높게 나타내는 말이다. 단순히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주변국가와 백성을 아우르는 통솔력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장시켰던 광개토대왕, 그는 서양의 정복 왕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비견되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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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0

[한국문화100] 세계화 된 국제공인스포츠, 태권도

대표적인 한민족 고유의 무술로, 우리나라에서 창시되어 세계화된 국제공인스포츠이다. 우리 고유 무술 태권도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대본)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된 투기 스포츠 신체 단련과 정신적 무장을 통한 올바른 인간화를 중시 또 다른 대한민국의 국기 태권도다. 무기 없이 손과 발을 이용해 공격과 방어하는 무도, 태권도다 조선, 중국, 일본의 최고의 무예를 집대성한 동아시아 무예사의 보고, 무예도보 통지. 무예도보통지에서 권법은 무기가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키울 수 있는 능력을 보고 하였다. 조선적 권법을 체계화한 무예도보통지는 오늘날 맨손무예의 원형이 되었고, 이후 발차기 등의 동작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며 태권도로 발전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인터뷰 강규진/ 태권도진흥재단 교육부담당관 태권도의 란? 태권도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국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심신 수련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무예이며, 태권도는 무기 없이 손과 발을 이용해 공격과 방어하는 무도이다. 우리민족의 기상이 넘치는 태권도의 힘과 기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자. 태권도의 태권도 3대 기본 구성이란? 기본발차기 태권도에서 중시되는 기본 구성을 알아보자. 품새는 혼자서 상대를 가상하고 한 자리에서 두 동작이상을 순간적으로 행하여 힘과 유연성 등 호흡과 동작의 완급을 발전시키는 동작이다 겨루기는 품새를 통해 익힌 공격방어의 기술을 응용하여 실제로 상대편과 대결하는 기술이다. 마지막으로 격파는 손과 발 등의 공격 및 방어의 부위를 각종 보조 기구를 통하여 강화 단련함으로써 파괴력을 기르는 것으로 품새 겨루기와 함께 태권도를 구성하고 있다. 태권도의 국제화? 태권도가 특유의 장점으로는 대한민국의 문화가 태권도 속에 담겨있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태권도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사범에 대한 존경심, 상대에 대한 이해(존중), 스스로 몸과 마음을 수련할 수 있다는 점이 있고, 또 하나의 이유로는 가족 스포츠로 할머니, 할아버지, 손자 등 가족끼리 함께 할 수 있는 스포츠로 세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오게 된 것입니다. - 오늘날 태권도가 세계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수많은 태권도인들의 분투가 밑받침되었다.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단체를 하나로 통합했으며, 세계태권도연맹을 중심으로 태권도는 전 세계에 크게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1980년 국제 올림픽위원회 프로그램 위원회에서 태권도가 공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1994년 9월 4일. 파리 IOC 제 103차 총회에서 여든 다섯명의 IOC 위원의 전원 찬성으로 마침내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 하계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가 세계로 전파 된지 불과 40년 만에 지구촌 스포츠로서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또한 1967년 최초로 태권도를 주제로 문화콘텐츠가 제작되었고, 무도에서 무예로 스포츠로 다시 세계의 문화로 무한한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세계 속 한류 상징이 된 우리의 태권도. 국가와 인종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예절과 자신감을 주는 스포츠이자 앞으로도 널리 알려야 할 문화유산이다.

제작
문화포털
등록일
2015-10-20

[한국문화100]한반도의 평양은 역사상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역사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평양이 가지는 의미와 배경 주요 사건들에 대해 알아본다. ----------------------------------------------------------------------------------------------- 평양편 여러분, 안녕하세요!한국문화100 평양편 소개를 맡은 역사 교사 문인식입니다. 반갑습니다.여러분들은 평양이라고 하면 주로 뭐가 떠오르시나요?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아마 이런 북한의 정치인들이 떠오를 겁니다.이들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평양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는데요.사실 대한민국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는인구 천만의 도시 서울도 아니고, 백제의 도시 공주도 아니고,천년 고도의 도시 경주도 아닌, 바로 평양입니다.이 평양에 대해서 자세하게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느끼시기에 평양이란 말이 어렵게 느껴지실 수 있겠지만,우리 고유어인 '부루나'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부루'라는 말은 평평하다는 뜻이고요, '나'라는 말은 땅이라는 뜻이에요.합쳐서 말하면 평평한 땅이라는 거죠.여러분들이 실제로 평양에 가보면, 산도 없이 드넓은 평야가 있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그렇게 넓은 평야는 남한에서는 '호남평야' 밖에 비견될 곳이 없어요.이렇게 넓은 땅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습니다.대동강이 흐르기 때문에 땅은 한결 더 비옥해지고 사람들이 살기 좋아지는 것이죠.저 먼 구석기 시대에서부터 이곳에서(평양에서) 사람들은 살았답니다.유명한 구석기 유적인 평남상원검은모루동굴이 바로 평양 근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이 유적에서는 신기하게도 물소, 원숭이와 같은 뼈들이 나오는데요.이 당시에 한반도가 훨씬 더 따뜻했음을 보여주는 유적 유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제 시대가 흘러 최초의 문명 최초의 우리나라 국가가 탄생하게 되죠.바로 어디입니까, 여러분 단군할아버지 아시죠?그렇습니다. 고조선입니다. 고조선의 수도 또한 평양이었습니다.이 고조선의 수도를 왕검성이라고 하는데요.왕검성의 위치가 만주라고 하기도 하고, 그리고 평양에 있기도 하고,이동했다고 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학설이 존재합니다.근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단군 조선 이후에 위만 조선일 때수도 왕검성은 확실히 평양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고조선은 이 왕검성, 평양을 거점으로 해서 중국의 한과남쪽의 진과의 중계 무역을 통해 이득을 얻기도 했죠.그러나 중국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한무제의 침략에 의해결국 고조선은 왕검성이 함락하게 되면서 멸망하게 됩니다. 시대가 흘러 삼국시대에 가보겠습니다.북쪽에 고구려, 남쪽에 백제, 신라가 있는 삼국시대 평양은 누구 땅이었을까요?그렇습니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가 평양의 주인이었죠.원래 고구려의 수도는 압록강이 흐르는 국내성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장수왕의 남진정책과 맞물리게 되면서고구려는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게 되죠.본격적으로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겠다는 겁니다.고구려는 평양을 수도로 했을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는데요.북으로는 부여와 숙신을 정복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찍어 눌러 충주까지 밀어내는 등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게 바로 평양 시기였습니다. 이렇게 전성기를 부가하던 고구려, 하지만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그 당대에 최고의 외교가였던 신라의 김춘추가 배를 타고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게 되죠.그래서 당 태종을 만나 담판을 짓습니다.신라와 당이 손잡은 거죠. 이렇게 결성된 나당 연합군은 660년 의자왕이 이끌던 백제를 멸망시키고,668년 평양성으로 다가오게 됩니다.결국 나당연합군과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분열로 인해서 고구려는 멸망하게 됩니다.이렇게 잠시 잊혔던 도시 평양은 고려 때 다시금 주목받습니다.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죠.고구려가 이룩했던 그 넓은 땅을 회복하고 싶었던 고려는 북진정책을 추진하게 되고,북진정책의 거점으로서 평양을 선택하게 됩니다.실제로 고려의 많은 왕들은 개경이 아니라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싶어 했어요.그리고 진취적인 기상을 가졌던 묘청은 수도를 아예 서경으로 옮기자는 운동을 벌였습니다.이게 정말 유명한 서경천도운동인데요.나중에 일제강점기 때에 민족사학자였던 신채호는 서경천도운동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한민족의 역사상 일천 년대에 제일 가는 대사건이다.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수도가 평양으로 옮겨지고 더욱더 진취적으로 나아갔다면우리 천년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겠나 하는 그런 아쉬움에서 이런 말을 했던 게 아닌가 싶네요. 태조 이성계에 의해서 조선이 건국되고 200년이 흐른 뒤1592년 4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웬 배들이 가득 메워서 부산으로 건너옵니다.그렇습니다. 임진왜란의 시작이죠. 약 15만이 넘는 일본군은 약 20일 만에 한성을 함락시킵니다.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서 평양까지 차지하게 되죠.이렇게 빼앗긴 평양은 1593년 1월에 명나라가 참전해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게 됩니다.북쪽에 만주를 통일했던 여진족의 후손 후금은 또한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통해평양을 침입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평양은 전쟁터가 됩니다.제가 이렇게만 말하면 마치 무슨 평양이 전쟁터인 거처럼그렇게 생각하지겠지만 꼭 그렇지마는 않습니다.평양은 원래부터 비옥한 땅이 있었고, 그리고 중국의 사절단이 오가는 중요한 길목이었어요.그래서 풍족하고 문화적으로도 발전되었으며 없는 게 없는 아주 발달된 도시였습니다.그래서 조선시대 관리들이 가고 싶은 곳 3개를 꼽으라고 하면그중에 한 곳에 평양이 꼭 뽑혔다고 하네요. 여러분들은 우리나라가 최강 대국 미국과 전쟁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조선 때 미국과 전쟁을 치렀던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신미양요인데요.이 신미양요의 발단이 되는 사건이 바로 평양에서 발생했습니다.역사 공부 조금 하신 분들은 알 텐데요.바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입니다.대동강 물을 거슬러 상선, 미국의 제너럴 셔먼 호가 쭉쭉 쭉 올라갔습니다.드디어 평양까지 갔죠. 평양까지 간 제너럴 셔먼 호 무엇을 요구했을까요?통상, 거래, 사고팔기 이런 걸 원했어요.그런데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는 그런 게 불가능했어요. 왜 그랬을까요?그 당시에 우리나라의 지배자가 누구였냐면, 쇄국정책의 아이콘 바로 흥선대원군이었어요.당연히 거래 같은 게 될 리가 없었죠. 그래서 여기서 갈등이 빚어지는데요.이 갈등 속에서 제너럴 셔먼 호의 공격에 의해 평양 백성들이 죽게 되면서뿔난 관군들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게 되고그리고 잡힌 선원들을 성난 군중들이 막 몽둥이로 때려죽이면서 여기서 사건이 터집니다.나중에 미국은 이것을 빌미로 쳐들어오게 되는데요.이것이 바로 강화도를 배경으로 벌어진 신미양요에요. 1910년 일제에 의해서 조선은 합방되게 됩니다. 강제적으로 합방되고 말았죠.일제강점기에 물산장려운동이라는 독립운동의 종류 중에 하나가 바로 평양에서 펼쳐지게 됩니다.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맞서서 우리 것으로 만 살자, 내 살림 내 것으로 라는 구호를 앞세워 가지고국산품 애용, 근검절약 등을 통해 우리의 토종기업 등을 육성시키고자 하는 물산장려운동이평양에 살고 있던 조만식에 의해 진행되게 됩니다.이러한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기는 평양에서도 이렇게 있었네요. 8월 15일 우리 민족이 그렇게 염원하던 광복을 맞이하게 됐습니다.하지만 기쁨도 잠시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발생하게 됩니다.그래서 평양은 우리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가깝지만 먼 곳이 되었죠.언젠가 우리 발로 가서 우리 눈으로 평양을 직접 보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하면서평양에 대한 소개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이상 역사교사 문인식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작
문화포털
등록일
20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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