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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실험극장

단체명
실험극장
장르
극단
개요

1960년대 동인제 극단들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극단. ‘실험성’과 ‘소극장 운동’을 표방하고 나와 <수업>, <에쿠우스>, <아일랜드> 등의 화제작을 선보였다. 동인제 극단의 아마추어리즘에서 전문적 직업극단으로의 변신 과정이 비교적 성공적이었던 단체이다. 1960년 실험극장 창단 발기총회를 가질 당시 조직은 다음과 같다. 간사위 : 유인목, 이기하. 이진형. 최덕수, 허구, 황운철 운영위 : 총무 - 서동철, 재정- 김양원, 섭외 - 김의경 기획위 : 문예- 이순재, 연출 - 최진하, 무대 - 고천산

해설

실험극장의 활동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960년 창단부터 1975년 운니동에 소극장을 마련할 때까지를 제1기, 1993년 초 운니동 실험소극장 폐관 때까지의 18년 동안을 제2기,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제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를 동인제 시대라고 한다면 제2기는 직업 극단으로서의 성격을 확고하게 다지는 시기다. 제3기에는 잦은 이동과 공연실패, 김동훈 대표의 타계, 윤호진 등 핵심단원들의 이탈 등으로 소강상태에 있다가 최근 이한승 대표 체제로 개편, 활발한 창작극 공연을 올림으로써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기성 연극계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지며 창단했던 실험극장의 창립공연은 이오네스코의 <수업>(허규 연출, 동국대 소극장)이었다. 실험극장 창립에 대한 관심은 그대로 그들의 창립 공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는데, 세간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다음의 기사를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 관객이나 평자가 가릴 것 없이 두 눈에 불을 붙이고 연극 아닌 그 어떤 것을 보기 위하여 잔뜩 벼르고 있었다. 이 땅에서 처음 행해지는 실험, 反劇을 티 없는 정열을 가진 젊은 연극인들이 시도한다는 사실에 기대와 호기심을 함께 걸어야만 했다. (……) - <서울신문>, 1960년 11월 3일 이후 1961년 4월 동국대 중강당에서 공연된 <다리에서의 조망>(아더 밀러 작, 이기하 연출)으로 실험극장은 다시 한번 주목을 받게 된다. 김정옥은 1961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그들의 벅찬 실험정신이 헛된 구호에 그치지 않고 무대 위에 구성화하는 기회를 포착”했다며 실험극장의 학구적인 실험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이때부터 실험극장은 일약 연극계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내건 이념이나 극단 운용 방식을 기성극계에 뿌리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1962년 4월 드라마센터가 설립되면서 실험극장의 많은 동인들이 드라마센터로 자리를 옮겼고 실험극장은 해산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다행히 실험극장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도 강했던 최덕수, 황운진, 허규, 유달훈, 김의경 등과 마침 군대에서 제대한 이순재, 정해창, 사상완,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이낙훈, 그리고 새로 가담한 김현영, 신명순 등이 모임으로써 창립 당시보다 더욱 강팀으로 극단을 다잡을 수가 있었다. 또한 때마침 극단 산하가 연극의 대중화를 주장하면서 직업 극단을 표방하고 나서자 실험극장 동인 가운데 상당수가 자리를 옮겼다. 이기하, 이순재, 오현경, 김정옥, 이낙훈, 고천산, 김의경, 허규 등 이들의 대부분이 실험극장의 중심인물들이었다. 이들을 떠나보내는 환송 공연으로 기획된 것이 제11회 <안티고네>(장 아누이 작/ 허규 연출)였다. 그러나 이 공연을 계기로 김의경, 허규 등은 산하에서 다시 실험극장으로 복귀했다. 1964년에는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 기념공연 페스티벌에 <리어왕>(허규 연출)으로 참가했다. 이 공연은 실험극장 창단 이래 처음, 그리고 연극사상 처음으로 많은 관객을 동원(7,328명)했다. 이 공연으로 제1회 동아연극상 대상과 남우주연상(이낙훈), 남우조연상(함현진)을 받았다. 1966년에는 단원 보충문제가 거론되어 TV, 라디오에서 활약하는 기성 연기자들 중에서 김성원, 안은숙, 우소연, 사미자가, 작가로는 이재현이 보강되었다. 1967년으로 접어들면서 실험극장은 상업적인 경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마르셀 빠뇰의 멜로드라마 <화니>를 레퍼토리로 선정한 것이다. 흥행의 저조에서 오는 적자의 폭을 메우려는 의도에서 강행했던 이 공연의 성공으로 극단은 상당한 흑자를 올렸으며, 그간의 결손을 메우고도 남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1969년도에 가서는 기업적 가능성을 타진하고 공공연하게 전문극단으로의 전환을 내걸기에 이르렀다. <휘가로의 결혼>(보마르셰 작)과 <맹진사댁경사>(오영진 작)가 국립극장사상 최초로 많은 관객을 동원했고 실험극장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실험극장에 대한 연극계의 기대가 커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70년에는 실험극장 창단 10주년을 맞아 오영진의 <허생전>을 공연했으며 관객동원에서 다시 기록을 경신했다. 그러나 1970년을 넘어서면서 연기자들도 TV에 시간을 빼앗기고 연극에 전념하기가 어려워졌다. 어쩔 수 없이 한동안 침체기를 맞아야 했고, 극단 운영도 잠시 마비상태에 빠져버렸다. 극단 대표도 그동안 실험극장을 이끌어 오던 김의경에서 이낙훈으로 바뀌었고, 다시 김동훈으로 바뀌었다. 실험극장이 운니동에 새 둥지를 튼 것은 1975년의 일이다. 덕성여대 옆 150석 규모의 전용극장을 가짐으로써 창단 15년 만에 극장 중심의 극단으로, 그리고 본격적인 직업 극단으로의 변모를 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윤호진, 정진수, 김영렬 등 신진 연출가들이

가담하면서 극단에 활기를 더해 주었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공연으로는 <에쿠우스>, <아일랜드>, <그린줄리아>,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 <신의 아그네스> 등이 있다. 극장 개관기념 공연으로 올린 <에쿠우스>는 신극 사상 최초로 2만 명 이상이라는 경이적인 관객동원을 기록했고, 무려 3개월 연속 공연 기록을 세웠다. 이 공연과 함께 실험극장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유민영은 다음과 같이 이 공연이 갖는 의의를 설명한다. (……) 이 작품은 예상외로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켜서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는데, 그 첫째가 공연의 장기체제 수립이었다. 종래에는 대체로 한 극단이 1주일 내외 공연하고 막을 내리는 단기공연이 관례화(?)되어 있어서 작품의 완성도가 낮을 수밖에 없었고 수익성도 떨어졌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 두 번째로 실험극장의 <에쿠우스> 공연이 본격 소극장 시대를 열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소극장 시대라는 것은 실험작업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세한 극단들이 너도나도 소극장을 선호해서 소품중심으로 공연방식을 굳혀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 세 번째로는 실험극장이 관객확대에 절대적 기여를 한 것이다 (……) - <실험극장 40년사>, 유민영 이 작품은 1976년 3월과 6월, 그리고 1977년에는 부산, 대구, 명동 코리아 극장 개관기념으로 올려졌다. 그리하여 <에쿠우스>는 총 2백 49회 공연에 6만 4천 명이라는 관객 동원을 기록하여 한국 연극사상 최장의 공연 기간, 최고의 관객 동원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후에도 실험극장은 <아일랜드>, <신의 아그네스>, <그린 줄리아> 등 사회성이 강한 외국의 걸작 희곡들을 완성도 있게 무대에 올린다. 특히 <아일랜드>는 작품의 진지함과 뛰어난 무대적 형상화로 독서신문이 선정한 ‘77년의 최우수 연극’으로 꼽히기도 했다. 1978년에는 창단 18주년 기념공연이자 62회 정기공연으로 김동훈의 모노드라마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를 올린다. 이 작품은 까페 떼아뜨르에서 3년간 총 130회 공연을 기록하고 지방순회공연까지 가졌다. 1983년 8월 15일 막을 올린 <신의 아그네스>는 윤소정, 이정희, 윤석화 등이 출연하면서 전회 매진 기록을 수립, 극단 재정의 돌파구를 연다. 소극장 무대에서 두 달 열흘 만에 1만 5천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3차 연장공연까지 갖는다. 1975년 개관한 실험소극장은 1989년 4개월여 전면 보수작업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개축기념공연으로 해롤드 핀터의 <마지막 한 잔을 위하여>를 올렸으며, 또 김아라 연출로 <에쿠우스>,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윤호진의 새로운 연출로 <신의 아그네스>를 공연했다. 이 두 작품은 조재현, 최민식, 신애라와 같은 신인 연기자들을 스타덤에 올려놓았으며 관객 동원에서도 성공했다. 그런데 1992년, 고궁복원이라는 서울시의 도시계획이 세워지면서 운니동 실험 소극장은 폐관되고 말았다. 한국극단 사상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가진 실험극장의 연극사적 의의는 우선은 본격적인 동인제 극단시대를 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험극장 창단 이후 민중, 산하, 자유, 광장, 가교, 여인극장 등이 속속 등장하여 타성에 젖어 있는 연극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또 장 아누이, 막스 프리쉬, 마르셀 빠뇰, 보마르세, 카프카, 피터 쉐퍼 등 유럽 작가들의 작품을 폭넓게 소개함으로써 번역극의 폭을 넓혔으며, 이근삼, 김의경, 이재현, 신명순, 오태석 등 신진 극작가들을 발굴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에쿠우스> 공연의 성공을 계기로 수십 년 동안 관행처럼 굳어져 온 단기공연 체제를 혁파하고 장기 공연체제를 확립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작품의 완성도면에서뿐만 아니라 공연 수익에도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점에서 본격 직업극단의 기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에쿠우스

<에쿠우스>는 1976년 3월과 6월, 그리고 1977년에는 부산, 대구, 명동 코리아 극장 개관기념으로 올려져, 총 2백 49회 공연에 6만 4천 명이라는 관객 동원을 기록하여 한국 연극사상 최장의 공연 기간, 최고의 관객 동원이라는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헤스터 판사가 정신과 의사인 다이사트를 찾아와 말 6마리의 눈을 찔러 멀게 한 소년 알런의 치료를 부탁한다. 다이사트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여 알런을 받아들인다. 알런이 병원으로 오던 날 밤 다이사트는 자신이 제사장이 되어 아이들을 희생물로 제사를 치르는 악몽을 꾼다. 의혹을 갖고 치료를 시작하지만 알런의 분노와 두려움에 찬 반응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알런의 악몽에 의혹을 느낀 다이사트는 가정방문을 통해 알런의 배후에 광신도인 어머니와, 무기력하지만 동시에 위엄을 갖춘 아버지가 있음을 확인한다.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알런은 다이사트를 신뢰하기 시작하고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집착이 생겨나지만, 감출 수 없는 분노의 예민함으로 다이사트와 한판 전투를 벌인다. 다이사트는 집요한 추적으로 알런과 말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그 베일을 하나씩 벗겨 나가지만 자신만의 실존적 고뇌에 한발씩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된다. (……) 극단 실험극장이 지난 9월 5일부터 전용소극장(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호평 속에 공연 중인 피터 쉐퍼 작 <에쿠우스> 공연이 중단됐다. 서울시는 21일 극단 실험극장이 네 차례나 연장공연을 하면서도 한번도 연장공연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공연을 중지시킨 것이다. 연극이 연장공연 중에 중단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카페 테아트르 폐관과 함께 한창 뻗어나던 소극장 운동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 <에쿠우스>는 그동안 신극사 처음으로 유료관객 1만 명을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에쿠우스>만큼 인기가 있었던 연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예술극장에서 ‘5일간’이란 시간의 제약 속에 공연을 했기 때문에 한창 연극이 선전돼 관객이 들어올 만하면 공연을 끝내야 했었다. 극단 실험극장이 1971년 예술극장에서 <해믈리트>를 공연, 9천 9백 84명의 관객을 모았고, 동랑레퍼토리극단의 <초분>이 드라마센터의 세 번째 공연에서 9천 8백 20명을 동원했다. 실험극장은 지난 15일 하오 3시 제86회 공연때 1만 번째로 입장한 서시현양에게 기념패와 실험극장의 모든 공연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영구 초대권을 주고 이날 입장한 1백 46명에게 실험극장의 다음 공연 초대권을 1장씩 증정했다. (……) - <한국일보>, 1975년 11월 22일 (……) 반나체 공연장면이 문제되어 작년 11월 20일 갑작스럽게 공연이 중단된 실험극장 <에쿠우스>가 1백 29일 만에 오는 30일부터 다시 공연하게 되었다. 외설을 예술로 승화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관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당국에 의해 제재를 받았던 <에쿠우스>는 실험극장이 3월 17일 예륜에 희곡과 무대공연의 재심의를 요청한 끝에 지난 20일 공연허가가 다시 나온 것. 부분적인 삭제를 하고 93회 공연을 하게 될 에쿠우스는 그동안 1만 2천 8백 43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최장기 공연기록을 세웠던 연극이다. 그동안 갑작스런 공연중단으로 예매권을 구입했던 관객들은 1천여 명이 예매권을 환불해가는 소동을 벌였는데 아직도 환불 안된 예매권이 5백 50여 장이나 남아 있다고. 재공연될 에쿠우스는 중단전과 똑같은 스태프, 캐스트로 구성되어있다. (……) - <경향신문>, 1976년 3월 23일 (……) 원래 이 작품을 쓸 때 작자는 쇠꼬챙이로 26마리의 말의 눈을 뽑았다는 어느 영국 10대 소년의 기괴한 행동의 실화를 이야기로 얻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몸서리처지는 행동의 배후, 즉 소년의 심층의식 깊이 숨어있는 동기를 작자는 단순한 이상 행동이 아닌 현대인의(아니면 문명인의) 자연과 본능에 대한 뿌리깊은 갈등으로까지 확대시켰다는 데 작품의 의미가 있다. 여기서 소년에게 비춰진 말의 의미는 어떤 초월적 존재로서, 정신적 불모에 대립되는 생의 황홀함의 한 상징으로서 빛을 나타낸다. 그러나 의사가 그 점을 소년의 의식 깊은 곳에서 찾아냈을 때 그는 소년을 정상으로 돌려주는 만족감 대신에 오히려 정상으로 되돌아 갈 소년이 필경 잃고야 말 그 생의 충실한 의미를 깨닫고 심한 연민과 절망감에 빠진다. 그것은 비록 다루는 방식은 전혀 다르지만 <걸리버 여행기>에서 주인공이 말의 나라에서 인간의 나라로 들어왔을 때 느낀 심한 자기혐오에 비길 만한 것이다. (……) - <여성동아>, 여석기, 1975년 11월호 (……) 이 공연을 성공시킨 요인을 몇 가지 헤아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연출가(김영렬)의 작품 해석이 정확했기 때문에 이 극작품의 핵심적

인 부분이 무대 위에서 소멸하지 않았다. 둘째, 협소한 무대 공간의 난관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연출가는 최소한도로 동작선을 압축하면서 그 약점을 최대한의 밀도 있는 마임과 동작으로 극복하였고, 스피디한 장면 전환과 축소된 조명은 무대의 고착감을 해결하여 활력있는 유동감을 주었다. 셋째, 현재와 과거의 시간적 동시성과 상황적 공존성을 표현하는 작업에서 연출가는 무대 외면성의 전환과 인물들의 심리적 변화를 자연스럽게 융합시켜 팽팽한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넷째, 소년의 무의식의 세계를 추적하는 정신과 의사의 추적과정이 클라이막스로 고조되는 템포가 정확하게 배려되었고, 1막 종결 부분의 마상의 격정 장면, 2막의 영화관 관람 장면, 소녀 질과의 로맨스 장면, 말의 눈을 찌르는 광란의 장면 등에 충분한 액센트를 부여하여 연극 전체의 리듬감이 두드러지게 잘 살아 있었다. 다섯째, 알런 역의 강태기, 질 역의 정경임, 프랑크 역의 이한승, 다이사트 역의 김동훈과 이승호, 마(馬) 역들 등 연기진들의 탄력있는 앙상블의 조화, 특히 행동의 근원과 그 경로를 표현해야 하는 어려운 역할을 참신하고 박력있는 연기로서 해낸 배우 강태기의 탄생은 이 공연이 거둔 큰 수확의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 - ‘70년대 한국연극-문제작을 말한다’, 이태주, <연극평론> (……) <에쿠우스>의 감동은 단순히 무엇을 다루었는가 하는 작품의 주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하는 주제 전달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철사와 금속편으로 엮은 말의 가면을 쓴 배우, 알런과 마틴의 대화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고 박력있게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방법, 무대 위에 회전대를 마련해서 스피드와 극적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점 등이 감탄 조건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실험의 <에쿠우스>는 알런 역의 강태기가 보여준 잘 맞는 연기로 상당한 수준의 감동을 가능케 했다. 얼굴 모습, 몸매 등 외적인 조건도 알런에 적합했고 대사, 동작 등이 상당히 단단했다. 말의 분장과 연기, 스피디한 진행 등이 좋았고 마틴 역의 이승호의 연기도 차분한 인상을 줬으나 조연 연기자들의 뒷받침이 약간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 - <일간스포츠>, 구히서, 1975년 9월 11일

아일랜드

남아프리카에서 백인들로부터 멸시받는 흑인들의 아픔을 리얼하게 표현하여 섬, 감방, 죄수등 인간의 극한 상황을 소재로 극중극〈안티고네〉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 자유, 정의, 진실 등을 표출시킨 작품이다. 오랜 감옥생활에 찌들어 온 윈스톤과 존이 고된 작업을 끝내고 감방에서 죄수 연예회에서 공연할 안티고네를 연습한다. 그들은 극한 생활 속에 처했으면서도 따뜻한 인간애로써 서로 아끼고 존엄한 인간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던 중 존의 형기가 감해져서 석 달 후 석방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윈스톤과 석 달 후 자유를 누리게 되는 존... 여기서부터 윈스톤의 갈등은 시작된다. 자신이 누구이며 왜 여기에 왔는지? 그러나 이러한 절망은 안티고네 속에서 자기를 찾아 승화된 윈스톤을 만든다. (……)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 중인 <아일랜드>가 20일로 2백회를 맞아 한국신극사에 또 하나의 기록을 남겼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실험극장은 21일 오후 5시 기념공연과 자축연을 실험소극장에서 가진다. 1977년 11월 25일 막을 올린 <아일랜드>는 2백회 공연 동안 2만 3천 5백명의 관객이 관람했고 각계의 숱한 찬사를 받았다. <아일랜드>는 30일까지 서울공연을 끝내고 5월 6일부터 6월 11일까지 대전·대구·부산·제주에서 지방공연을 가진다. (……) - <조선일보>, 1978년 4월 20일 (……) 불필요한 군더더기와 잔재주와 억지스럽게 과장해 보이려는 치기를 부리지 않고 되도록 정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작품을 해석하고 형상화해 나가는 두 연기자의 열연이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감동을 밑받침하고 있다. 움직임과 멈춤, 대화와 침묵이 국면국면의 변화에 따라 긴밀하게 조화, 표현되고, 섬세한 부분들의 조화있는 진전을 통해서 이 작품은 극중극인 <안티고네의 재판>으로 승화한다. (……) 크레온왕에 대한 안티고네의 거부는 동시에 두 죄수가 현실적인 사회적 상황에 대해 저항하고 있는 타당한 논리를 제시해주며, 감옥생활의 개체성을 역사와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여기서 이들의 삶은 단순한 개체적 삶을 넘어서서 사회적, 공중적 삶으로 발전하다. 그들의 저항은 단순한 불평이나 불만 그리고 영웅주의 따위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가 누릴 수 있는 또 당연히 누려야 하는 본질적으로 절실한 요구에서 터져나오는 행위들이다. (……) 때로는 진실을 옹호했다는 이유 때문에 감옥으로 가야하는 사람들의 역설적인 모순과 그 모순을 죽음으로써 극복하려는 위대한 삶을 설득력있게 펼쳐 보이고 있는 이 <아일랜드>는 오늘을 사는 모든 우리들에게 폭넓은 공감과 연대의식을 넓혀주고 있다. (……) - <공간>, 서연호, 1977년 12월호

망나니

<망나니>(윤대성 작/연출)는 1960년대 들어와서 시작된 전통적 탈놀이의 재건운동과 그 현대적 계승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룩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연극사적인 의의를 갖는다. 마당귀신인 고석할미는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죽음이야말로 삶의 고통과 고난을 잊게 하는 안식임을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노승은 삶은 희망을 향해 가고 있으며 희망이야말로 인생의 본질을 이루는 삶의 태도라고 주장한다. 두 노인은 이러한 논쟁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내기를 건다. 두 노인은 한 나무꾼 아이를 4백년 전으로 거슬려 보내면서 과거의 인간으로 변신시키기 위해 가면을 씌운다. 아이가 일단 탈을 얼굴에 쓰자 벗겨지지 않는다. 아이는 조선조 중기의 어느 양반집 종인 마당쇠로 환생된다. 양반인 주인은 정여립난의 공모자로 모함되어 사형을 받게 되고, 그 부인 역시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낳은 직후 남편의 뒤를 이어 사약을 받게 된다. 양반의 후예는 피천수라는 이름으로 마당쇠와 여종인 용녀에 의해 성장한다. 마당쇠와 용녀부부는 피천수를 안전하게 기르기 위해 가문과 신분을 속이고 전국을 돌아다닌다. 피천수는 퇴기의 딸인 계영과 부부가 되고 눈먼 딸을 낳게 된다. 천수는 일찍이 용녀를 잃고 마당쇠와 가족을 거느리고 임진왜란을 피해 부모가 그러했듯이 여러 고장을 방랑한다. 어느날 피천수는 도적의 누명을 쓰고 관군에 잡히게 된다. 피천수는 누명을 벗는 조건으로 망나니가 되며, 계영은 명나라 장수 조문룡의 첩으로 끌려 간다. 망나니가 된 천수는 날이 갈수록 직업에 대한 갈등이 망각되면서 칼질에 익숙해진다. 한편 계영은 첩이 된 것을 괴로워하다 조문룡을 죽이게 되고 관군에 잡히게 된다. 계영의 사형 집행날, 천수는 아내를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해지자 눈먼 딸을 아비에게 부탁하고 아내 뒤를 따라 자결한다.

사람의 아들

이문열의 동명 소설 <사람의 아들>을 극화한 작품이다. 1981년에는 유현묵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 실험극장 20주년 기념공연 작품인 <사람의 아들>(이문열 원작·각색, 윤호진 연출)은 소설이 갖지 못한 신학문답의 치열한 내면성과 그 내면이 분열된 두 유형, 곧 사변과 회의의 지성 및 행동과 실천의 개혁정신을 대표하는 두 인간상 때문에 우선 주제면에서 얄팍한 무대감성밖에 모르는 관객들을 압도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신흥종교 교주와 신도 사이의 대립과 갈등처럼 보이는 극적 구조 속에 좌절한 니체의 초인사상마저 풍기는 이 무신론적 종교극은 돌아오는 도중에 죽는 방황의 탕아를 살인사건의 수사선상에 내세우면서 반성서적 논리로 자라가는 악마의 제자격인 사회개혁자의 행적을 서사극 형식으로 전개한다. 이런 주제와 연극 형태들은 한국 연극의 세계성으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는 것들이라 생각된다. - <동아일보>, 이상일, 1980년 4월

실비명

정복근 작, 윤호진 연출의 작품이다.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들떠있는 은옥에게 어느날 순영이 찾아와 아들 정우의 생사를 모르는 어미의 심정을 토로한다. 은옥의 딸인 현이와 순영의 아들인 정우는 한때 연인사이였으나 노동운동을 하던 이들이 어느날 현이가 투옥되어 성고문을 참지 못하고 주모자인 정우를 실토하게 되자 정우는 엉뚱하게도 간첩죄로 체포되어 실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순영은 아들 정우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유언비어만 난무할 뿐 모든 사실이 은폐된 채 무마되어 버리고 결국 순영은 경찰서에서 미친 노인으로 취급받고 쫓겨난다. 얼마 후 현이는 광식의 도움으로 출감하게 되고 추행을 당한 딸의 결점을 무마하기 위해 은옥은 강제적으로 가난한 고학생 광식과 결혼시키려 한다. 그러나 광식의 진정한 마음을 모르는 현이는 광식에게 온갖 모욕을 주며 비난한다. 광식은 대학시절부터 운동권 학생들을 밀고하여 장학금을 받았고 졸업 후 구사대란 비난을 받으며 좋은 조건으로 현이의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기업체에 입사하게 된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현이는 이러한 광식을 미워하고 결혼에 대해 증오하고 있으나 광식은 현이가 경찰서에 있을 때부터 출감한 날까지 온갖 노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결국 정우의 실종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현이와 시대의 모순 속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광식, 이 젊은이들의 고뇌하는 모습을 보며 은옥은 괴로워하고, 그리고 순영은 아들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슬픈 나날을 보내면서도 정우가 더 좋은 세상을 불러오려고 이 세상을 떠났을 거라며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다. (……) 이번 연극제에서는 관객의 관심을 끌거나 시사성 있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표현에 있어 연극 고유의 형식미나 상상력을 살리는 공연들이 눈에 띄었다. 소극장에서 공연된 작품들인 <칠산리>, <실비명>, <오구> 등이 그것이다. (……) 폭행당한 운동권 학생과 그 가족들의 심리적 고통을 그린 <실비명>은 여성적인 관점의 섬세함을 지니기는 했지만 극중 인물들을 그리는 작가의 정치의식의 수준이 고르지 못했다. 연출자는 블라인드의 이색적 사용을 통해 극중 인물의 내면의식, 과거회상 등을 보여주었으나 장면전환의 논리가 산만한 감이 있다. (……) - <월간조선>, 김방옥, 1989년 11월호

김영렬

서울예술대학 연극영화과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공연영상예술학과에서 공연예술을 전공하였다. 1967년 드라마센터 조명실장과 극단 실험극장 제작실장 및 연출가로 활동하였으며, 1978년부터 2001년까지 KBS-TV 제작단에서 PD로 재직하면서 제작 국장을 역임하였다. <장수만세>, <쇼 비디오 자키>, <문화가 산책> 등 코미디, 드라마, 국악, 교양 등 다양한 분야의 TV 프로그램을 제작하였으며, 뮤지컬 <동키호테>, <영산제> 등을 연출하였다. 계원조형예술대학 겸임교수와 안양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인덕대학 ‘연기 연출론’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KBS 퇴사 후 월드이벤트 TV 편성제작 국장으로 활동하였고 현재 ㈜아이앤유니버셜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와 (사)비디오저널리스트협회 이사를 겸하고 있다. 2001년 독일 뒤셀도르프 박물관 개관 기념 공연과, 2002년 일본 코리안 SUPER EXPO 공연을 연출하였다. 저서로는 <철학쪽에서 온 연극>이 있으며, 1990년 우수프로그램 연출상 등을 수상하였다 · 대표작품 <심판> <에쿠우스> <맹진사댁 경사> <그 여자 사람 잡네> <죽음의 덫>

윤호진 (1948~ )

1948년 당진 출생. 1980년에 동국대학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후 1984년 미국 뉴욕대학교 대학원 공연학과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다. 1970년에 극단 실험극장에 입단하여 소극장 연극운동가로 활동하였고 1976년 <그린 줄리아>를 연출하였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극단 실험극장 대표, 1991년 한국연극연출가협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뮤지컬 전문극단 <에이콤>을 창단하여 대형 창작 뮤지컬을 제작 및 연출하고 있다. 1978년과 1981년에 동아연극상 대상, 1978년과 1982년에 동아연극상 연출상 등을 수상하였다. · 대표작품 <아일랜드> <사람의 아들> <호모 세파라투스> <들소> <신의 아그네스> <매스터 해롤드> <실비명>

김동훈(1939~1996 )

1939년 출생. 1960년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단국대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과를 수료하였다. 1960년 극단 실험극장 창단 동인으로 출발하여 1973년부터 1996년 3월 21일 타계하기 전까지 극단 실험극장의 대표로 일하였다. 1983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1984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예총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연기와 연출을 병행하였고 한국연극영화상, 동아연극상, 대한민국 예술상 등 다수 수상하였다. &#8226; 대표작품 출연: <수업> <포기와 베스> <화니> <휘가로의 결혼>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 <에쿠우스> 연출: <휘가로의 결혼> <티타임의 정사> <신화 1900> <삼시랑> <화니> <셸리 발렌타인

리뷰

실험극장 정관 전문 1. 우리는 능력 있고 열성 있는 연극인의 실험도구가 될 것을 맹세하며 실험극장을 결성한다. 2. 우리는 연극을 위해서 자기 희생조차 감수할 동인으로 구성한다. 3. 우리의 목적은 연극을 통한 실험무대의 구축과, 이념에 찬 연극을 이 땅에 수립하는 데 있다. 4. 우리는 우리 자신의 회비로써 실험극장을 키워 간다. 5. 우리의 기본적 운영방법은 아래와 같다. a. 연극의 모든 부문에 일반 이론을 지향하여 작품의 무대화를 중심으로 실험적이며 구체적인 지식 경험을 추구한다. b. 무대수법, 연출수법의 구도목표를 계획한다. c. 실험무대를 통하여 동인 각자는 자기 재능을 발견 육성한다. d. 상연작품은 동인작품에 우선권을 주고, 외국작품인 경우, 희곡작법상 또는 무대 이론상의 시도적 작품을 선택한다. e. 실험무대 외에 대외적 발표를 정기적으로 진행시킨다. 1960년 10월 당시 대학극 활동을 하던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전문극·실험극을 공연할 목적으로 창단되었다. 창작극의 정립과 전문화에 주력하면서 의욕적이고 꾸준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창단 20주년을 맞은 1980년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중극장 ‘운형극장’을 마련하여 공연장이 부족한 한국 연극계에 또 하나의 기여를 했다. 각종 연극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주요 공연작품에 오영진 작 <맹진사댁 경사>, <동천홍>, 이어령 작 <무익조>, 셰익스피어 작 <리어왕>, 이오네스코 작 <수업>, 밀러 작 <다리 위의 조망>, <세일즈 맨의 죽음>, 셰퍼 작 <에쿠우스>, 후가드 작 <아일랜드> 및 미국 순회 공연작품 이재현 작 <이중섭> 등이 있다. - 1981년 제5차 제3세계 연극제 및 회의 프로그램

관련도서

<한국의 소극장과 연극운동>, 정호순, 연극과인간, 2002 <실험극장 40년사>, 2001 <한국연극운동사>, 유민영, 태학사, 2001 <우리연극100년>, 서연호 이상우, 현암사, 2000 <실험극장 10년지>, 1970 ‘실험극장-극단사②’, 유민영, <한국연극> 3호 ‘실험극장의 이념주의’, 차범석, <예술세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1990 ‘한국동인제극단연구 - 극단신협과 극단실험극장을 중심으로’, 윤호진, 동국대 대학원 석사논문,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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