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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시대의 국문학 문헌
조선이 건국되면서 문학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대립양상을 보였다. 정도전·권근 등은 건국과 문학의 이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왕조의 위업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음에 반해, 길재·원천석 등은 은거하면서 고려 왕조를 회고하며 그에 대한 절의를 표방하고 세태를 개탄하는 작품을 창작했다. 건국 당시의 일시적인 혼란을 극복하고 지배질서를 확립한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국문문학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이는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건국시조들의 영웅적인 행적을 찬양한 왕조서사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석가모니의 일생을 다룬 불교서사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훈민정음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국문문학이라는 데 그 의의가 자못 크다. 유교에 입각하여 행실을 가다듬는 데 필요한 책을 만들고 불교의 경전을 번역하여 간행하는 사이에 국문문장의 실용성과 문학으로서의 가능성이 입증되었다. 한문학도 새롭게 정비되었다. 서거정은 <동문선(東文選)>·<동인시화(東人詩話)>를 편찬하여 신라시대 이래의 시문을 집대성하여 비평했고, 성현은 <용재총화>를 지어 사장파(詞章派) 문학의 전통을 이룩했다. 이들 사장파와 대조적인 면모를 보인 것이 김종직에서 김일손으로 이어지는 도학파(道學派) 또는 사림파(士林派) 문인들이다. 서경덕·이황은 도학과 문학의 원리를 아울러 탐구함으로써 문학의 사상적 깊이를 더했다. 방외인의 성격을 지닌 김시습은 이단적·반항적인 시를 짓고 <금오신화>와 같은 소설을 창작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문학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전쟁과 참상과 후유증을 절실하게 표현하는 작품들이 등장하였고, 한문학은 전통적 규범과 격식을 떨쳐버리려는 방향과 회복하고자 하는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권필과 허균은 전자의 입장에서, 이정구·신흠·이식·장유 같은 한문사대가는 후자의 입장에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박지원을 비롯한 실학파는 현실로 관심을 돌려 생동하는 문체를 창안했고, 정약용은 민요풍의 한시를 짓고자 했으며, 신위는 개성적인 표현으로 한시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한시의 소재를 이 땅의 풍속과 현실에서 찾으려는 움직임이 확산되어 <해동악부(海東樂府)>가 거듭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위항인(委巷人)이라 일컬어지는 중인·서리·시정인들이 한문학 창작에 적극 참여했다. 정내교·장혼·조수삼을 위시한 위항인들은 시사(詩社)를 결성하고 시 창작에 열의를 보였으며 자기들의 한시를 풍요(風謠)라 하고 이를 후대에 널리 알리기 위해 <소대풍요 (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풍요삼선(風謠三選)> 등을 편찬했다. 문학관 및 문학사상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허균은 도학의 굴레를 벗어나 자연스러운 감정을 담은 문학을 주장했고, 김만중은 모방에 치우치는 한문학보다 나무꾼과 빨래터의 아낙네가 부르는 민요가 오히려 더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홍만종은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하여 국문시가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고, 홍대용은 천기론(天機論)을 내세워 새로운 문학론을 전개했다. 박지원은 현실을 비판하는 방법을 문학에서 찾았으며, 정약용은 조선시(朝鮮詩)를 주창했다. 시조의 창작과 연행에 위항인들이 적극 참여함으로써 담당층이 확대되었다. 위항인 출신의 가객들은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 등의 가단을 형성하여 시조창법을 개발하고 시조집을 편찬했다.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을 비롯하여 김수장의 <해동가요(海東歌謠)>, 안민영의 <가곡원류(歌曲原流)>등의 시조집은 그때까지 구비전승되어오던 작품과 문헌상에 기록된 작품 및 동시대 작가들의 새로운 창작품을 집대성하여 시조문학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야담은 역사적인 내용을 지닌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인데, 유몽인의 <어우야담 (於于野談)>이 나온 후로 작자 미상의 <청구야담(靑丘野談)>, 이희준의 <계서야담(溪西野談)>, 이원명의 <동야휘집(東野彙輯)> 등에서 야담이 거듭 수록·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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