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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100]조선시대의 지식인의 상징, 퇴계 이황

제작
문화포털
재생시간
6:9
등록일
2015-10-20

조선시대 학자인 퇴계선생의 업적을 알아보자

---대본---

자막)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퇴계의 업적을 귀감 삼아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나레이션
청렴결백한 공직자이자 우수한 교육자, 그리고 성리학을 발전시킨 사상가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비인 퇴계이황.

퇴계 이황의 업적은 6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퇴계의 여러 업적중 가장 두드러 지는 것은 학자로서의 모습이다.

중국의 주자 이후에 동양에서 최고의 학자가 퇴계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가 이처럼 많은 이들에 존경의 대상이 된 이유는 그가 학문을 연구한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 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퇴계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공직자로서의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가 벼슬을 79번이나 사퇴했다는 이야기는 후세에 많은 귀감이 되는 좋은 일화다.

또한 도산서원을 비롯한 서원건립에 힘을 써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는데, 출세를 하기 위해 학문을 닦는 안 좋은 학습 풍토를 개선하는데 퇴계 선생이 일조를 한 것이다.

-인터뷰
퇴계 선생이 살아 계실 당시에는 벼슬을 한다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과거 공부를 해서 벼슬 정승판서가 되면 부귀영화가 다 따라왔어요.
그런데 퇴계 선생은 임금이 벼슬을 주면 사양했습니다.
그 횟수가 70번이 넘습니다.
명종이란 임금이 퇴계 선생을 모시려고 했는데 안 오시니깐 화공을 보내서 도산서원을 그리게 했어요.
퇴계 선생이 도산을 기술한 도산기라는 글이 있는데 그 것을 (그림에)쓰게 하고, 그 다음에 신하들을 시켜서 ‘명현부지탄’이라 ‘어진선비를 불러도 안오는 것을 탄식하노라’ 하는 시를 만들어서 임금이 자기 침실의 병풍에 쳐놓고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퇴계 선생 이후에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대가 퇴계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많은 학자가 나오고 풍속이 순화해지고 도덕적인 수준이 높아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퇴계 선생이 직접 기른 제자들 중에는 나라에 기둥이 되는 명신들이 많았습니다.   
 

자막
퇴계이황(1501~1570)


나레이션
그는 올바른 교육 문화를 위해서 손수 교과서를 만들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수립하였다.

또 항상 모범적인 태도로 바람직한 선비상을 보여 제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육자 이기도 했다.

그는 2000여편이 넘는 시를 남긴 문학자이자 효와 예법을 중시하고 실행한 인격자이며 성리학을 알린 사상가 등 다양한 방면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자막

매화시
28년동안 매화에 관하여 지은 시를 모아 놓은 책이다.
매화를 사랑한 퇴계 선생은 75제 107수에 달하는 많은 시를 남겼다.

무불경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조심하고 공경하여야 한다는 뜻.


도산십이곡
퇴계선생이 도산의 산수를 소요하여 읊은 시조

성학십도
유교철학의 주요체계 10가지를 도식으로 나타낸 것으로 68세떄에 작성하여 선조대왕께 보냄.

퇴계선생서절요
퇴계선생의 중요한 서간(용건을 알리는 메모)을 모아놓은 책

퇴계선생언행록
퇴계선생의 평소 언행을 기록해 둔 책으로 1613년 도산서원에서 간행함


나레이션
특히 성리학의 심성론을 발전시키고 수양론의 실천방법을 규명하는 등 조선시대 도학의 기본틀을 정립하였는데 큰 공을 세웠다.

유학의 철학적인 부분을 성리학이라고 부른다.

공자 시절 성현의 가르침들은 많았지만 이가 학문적으로 체계화 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13세기 송나라때와서 주자를 중심으로 학문적인 체계를 이루게 되는데 이를 성리학 이라고 부른다.

이 성리학을 발전시키고 널리 알린 대학자가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자막
주자(1130~1200)
중국 송대의 유학자. 주자학(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

도산서당
퇴계선생이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직접 머무르면서 제자를 가르치던 곳


인터뷰
사실 퇴계 선생은 조선의 유학자이기에 앞서 일본,독일,영국 등에 알려진 세계적인 유학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퇴계 선생이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알려지지 않은 이유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의 역사를 당생과 당파의 역사로 매도한 것 때문입니다.
성리학, 주자학, 유학이 폄하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일본과 독일 같은 곳에서 퇴계학 연구가 아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레이션
지금도 일본과 독일 등에서는 퇴계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퇴계의 업적을 귀감 삼아 현재 우리의 삶 속에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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