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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丙申, 그때는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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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1.04.

새해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 우리는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며 새로운 한 발을 더 디디며 각오를 다지곤 한다.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필요한 ‘과거’의 힘. 2016년 병신년 새해 벽두에, 오히려 과거를 되돌아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 속 丙申, 그때는 어떠했을까?

역사 속 丙申, 그때는 어떠했을까?
- 후삼국 통일, 팔만대장경 판각, 정조즉위까지...
부흥과 개혁의 문을 두드린 병신년 역사 -



새해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 우리는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며 새로운 한 발을 더 디디며 각오를 다지곤 한다.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필요한 ‘과거’의 힘. 2016년 병신년 새해 벽두에, 오히려 과거를 되돌아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는 천간(天干)이 ‘병(丙)’, 지지(地支)가 ‘신(申)’인 해로, 육십갑자(六十甲子)로 헤아렸을 때 서른세 번째 해다. 어감이 주는 도발적인 느낌과는 달리, 굵직한 정신적 문화적 유산을 남긴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병신(丙申)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육십갑자의 서른세 번째 해, 후삼국 통일을 이루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병신년은 936(丙申)년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다. 고려를 세운 것은 918년이나, 이후에도 명목상의 존재를 유지하던 신라와 지금의 전남 지역에서 발흥한 후백제가 후삼국을 형성해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935년 신라의 귀부(歸附)를 받은 고려는 936년 9월,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후백제 정벌에 나섰다. 당시 후백제는 견훤(甄萱)의 장남 신검(神劍)이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한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건 곁에는 유폐지에서 탈출해 고려에 귀순한 견훤이 있었고, 고려군은 후백제군 5천7백여 급(級)을 참수하고 탄령(炭嶺)을 넘어 신검과 양검, 용검 등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마침내 후삼국 통일을 달성한다.


 

 

호국의 염원 담은 인류의 문화유산, 팔만대장경 판본



 
팔만대장경 일제 강점기에 조사한 바로는 81,258장이라고 전하는데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국보 제32호 ⓒ 문화재청 국가기록유산


고려는 이후 1392년까지 474년 동안 왕조를 유지하며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오늘날 우리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대표적 유산이 바로 팔만대장경인데, 팔만대장경의 역사 속에 기록된 또 하나의 전환기가 ‘병신년’이다.


대장경이 최초로 제작된 것은 현종 재위 연간(1011~1029년)이다. 그런데 이 대장경은 안타깝게도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거란이 침입했을 때 부처님의 가호에 힘입어 외적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아 조판했던 대장경이, 결국 전란 속에 불타버린 것이다. 만일 여기서 끝났다면 오늘날 우리의 팔만대장경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몽고의 침입을 피해 강도(江都:지금의 강화)로 도읍을 옮긴 고려 왕조는 1236년(丙申)년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새로운 대장경 판각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몽고의 침입을 격퇴하려는 민족적인 염원을 담아서 말이다. 16년에 걸친 대장정 끝에 1251년 완성된 이 대장경은 최초의 대장경(初彫大藏經)과 구별해 재조대장경(再彫大藏經)이라 부른다.


‘팔만대장경’이란 이름은 대장경 매수가 8만여 판이기도 하려니와 8만4천 번뇌에 대치하는 8만4천 법문(法門)이 수록되어 있다는 데서 연유한다. 규모도 대단하지만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하나가 오탈자 없이 고르고 정밀하게 판각되어 가장 완벽한 대장경으로 평가된다. 1996년 유네스코가 세계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백성에게 시간을 돌려준 세종과 중종의 물시계



 

보루각 자격루. 현재 전하는 자격루는 쇠구슬이 굴러 시각을 알려주는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만 남아 있다.

국보 제 229호 ⓒ 공공누리-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중종 재위 연간인 1536년(丙申),창덕궁에 보루각(報漏閣)을 짓고 새로운 물시계 자격루(自擊漏)를 설치하였다. 최초의 자격루는 1434년 세종대왕이 장영실에게 명을 내려 경복궁에 설치한 것이나, 중종 조에 이를 본받아 하나 더 제작한 것이다. 최초의 자격루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됨으로써 오늘날 자격루의 모습을 일부나마 전해 주는 것이 이 자격루다.


역법(曆法)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천체 현상을 관찰하고 농경에 필요한 절기를 백성들에게 올바로 알리는’ ‘관상수시(觀象授時)’는 농경사회에서 지배자가 해야 할 중요한 의무이자 특권이고 통치수단이었다. 즉, 물시계 자격루의 제작은 중세 사회에서 시간을 장악하고 농사를 통제하던 지도자의 상징인 셈이다.


그런데 종래에는 중국의 표준에 의존해왔던 것을, 세종 대에 우리 실정에 맞게 정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제작된 각종 천문관측 기구, 자격루, 앙부일귀 등 시계들이 모두 이러한 노력의 소산이다. 온 백성에게 표준 시각을 공유케 하려는 세종의 의지는 이후에도 계승되어 다양한 유형의 시계를 출현시켰다. 이를 통해 우리의 과학기술도 한 단계 더 발전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개혁적 리더십으로 문예부흥 일군 정조대왕



 

수원 팔달문 야경.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화성(수원)으로 옮기면서 축성한 계획도시 화성의 남문.

서쪽에 위치한 팔달산(八達山)에서 딴 이름이다. 보물 402호. ⓒ 문화재청 홈페이지


1776년(丙申) 3월, 조선조에 새로운 리더십을 선보일 젊은 임금이 왕위에 올랐다. 재위 25년 동안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일군 ‘개혁군주’ 정조다. 조선 후기 영조 정조 연간은 이전의 사대부 신권 중심의 붕당정치를 벗어나 국정 주도권이 군주에게 집중된, 전에 없던 강력한 왕권 탄생의 시기로 평가된다. 이는 영조 정조 조에 정치 운영의 근간으로 삼은 탕평책이 있기에 가능했다. 영조가 탕평을 궤도에 올렸다면, 정조는 정책으로서의 탕평의 목표(지향점)를 한층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그 방법도 보다 세련되게 격상시킨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1798년에 지은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자처했다. 정조 자신은 달이고, 달은 언제나 세상에 똑같이 비출 뿐이라는 뜻이다. 정조 스스로 탕평을 통해 각 인재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해 주는 군주, 그들로부터 달과 물의 거리만큼이나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군주로서의 리더십을 제시하고 있었다.


2009년 공개된 <정조어찰첩>은, 군주의 정치 이상에 공감하는 인물이라면-설사 그가 정적(政敵)일지라도-적극 포섭, 그를 통해 정파 내 여론을 조성하고 국정을 주도했던 정조의 준론 탕평의 진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정조 표준 영정. 조선 중기 부흥기를 이루었던 정조. ⓒ 수원화성박물관

 

정조 대에 기용된 지식인들의 활약상 또한 이러한 탕평책의 결과다. 수원 화성 건설에서 새로운 축성 기술을 선보인 정약용, 서얼 출신으로 규장각 검서관에 등용, 대학자로 이름을 전한 이덕무, 박제가 등이 대표적이다. 정조는 붕당이나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 있고 군주의 의리(義理)에 부합하는 인재에게 출사의 길을 열어주었다. 1781년 초계문신제를 통해 기용한 유능한 인재 등용이 그것이다.


정조의 탕평책에 나타난 리더십의 역사적 의미는 신해통공(辛亥通共)과 격쟁(擊錚), 상언(上言)등에서 보이듯 백성을 살리려는 데 있다. 신해통공은 결과적으로 시전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일반 영세 상인층을 보호하는 정책으로, 자유로운 상업 발달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상언은 관원부터 공사천 노비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글로써 국왕에게 청원하는 문서를 말한다. 격쟁은 억울한 백성이 국왕의 거둥 때 직접 징을 쳐서 하소연하게 하는 제도로, 글조차 쓸 수 없던 최하층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정조 연간에는 상언이 3천여 건, 격쟁이1천3백여 건에 달할 정도로 국왕-백성 간의 자유로운 소통이 허용되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만한 이 같은 제도는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곤 했는데, 정조는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하소연하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그들에게는 죄가 없고 그렇게 만든 자들이 죄인이라고 하였다. 리더의 역할에 대한 정조의 생각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새로운 미래를 준비한 대한제국의 전야


1896년(丙申) 2월, 조선 제 26대 국왕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열강의 이권 침탈과 특히 일본의 내정간섭이 날로 심해지는 상황에서,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에 무참하게 시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아관파천을 단행한 것이다. 고종은 이듬해인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치고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기에 이른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부흥 혹은 도약의 계기가 되었던 역사의 장면 장면이 의미가 있는 것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인 ‘사람’들의 자취가 아닐까 한다. 지난함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했던 그들의 의지에 기대어 새해의 각오를 다져보자.

 


* 참고문헌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국역 동국통감>
<한국 美의 재발견 권2-과학문화>김인덕, 서성호, 오상학, 오영선 지음 솔출판사  2004,
<정조의 비밀 어찰, 정조가 그의 시대를 말하다>박철상, 백승호, 장유승 외 7인 지음 푸른역사2011
사진: 문화재청, 공공누리-국립중앙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 작성자 : 문화포털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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