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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문화유산 문화재/유물 (전)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傳 光州 聖居寺址 五層石塔)
    지역 : 광주남구 관리자(관리단체) : 광주시

    광주공원 안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 이 부근은 성거사(聖居寺)터라고 전해진다. 이 광주공원은 원래 성거산(聖居山)이라 불렀는데, 산의 모양이 거북처럼 생겼으므로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등위치에는 성거사를 세우고 거북의 목 부근에는 5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2단 기단 양식에서 기단을 1단만 두는 고려시대로의 양식변화를 보여준다. 또 지붕돌 추녀와 몸돌의 알맞은 비례감과, 위로 오르면서 줄어드는 비율이 크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게 보이면서도 안정감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1층 몸돌에서 나타난다. 즉 몸돌 전체를 아래위 2단으로 나누어 5개의 돌을 맞추고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고려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특색이다. 또한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각 귀퉁이는 아래위 모두 약간씩 치켜올려진 상태이다. 1961년 해체하여 보수할 때 2층 몸돌에서 사리공(舍利孔)과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이 석탑의 연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1층 몸돌과 3층 몸돌은 보수할 당시에 보충한 것이다.

    제공기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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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문화유산 문화재/유물 (전)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傳 龜尾 江洛寺址 三層石塔)
    지역 : 경북김천시 관리자(관리단체) : 직지사

    강락사라고 전해지는 옛 절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68년 경북 선산군 군청 앞뜰에 옮겨 복원하였고, 1980년 10월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을 탑신(塔身)을 세우고 머리장식을 얹은 구조이다.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면의 중앙에도 기둥 하나씩을 조각해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기 한 돌로 짜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각 층 모두 5단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하였고, 빗물을 받는 낙수면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1980년 탑을 옮겨 세울 때, 같은 시기의 석탑을 모방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지붕돌의 치켜 오른 정도나, 밑면의 받침수, 각 부의 세부적인 양식으로 보아 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보인다.

    제공기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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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문화유산 문화재/유물 1950년대 낙하산 블라우스
    지역 : 서울용산구 관리자(관리단체) : 신***

    제공기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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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문화유산 문화재/유물 1960년대 신생활복
    지역 : 서울용산구 관리자(관리단체) : 신***

    제공기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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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문화유산 문화재/유물 20공신회맹축 - 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 - 保社功臣錄勳後)
    지역 : 경기성남시 관리자(관리단체)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서인이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에 파훈(罷勳)된 5명의 공신을 복훈(復勳)한 것을 계기로 제작된 것이다. 이 회맹축은 먼저 1680년(숙종 6) 8월에 있었던 보사공신회맹(保社功臣會盟) 시의 회맹문(會盟文)을 쓰고 회맹에 참여한 본공신과 자손의 군호, 공신호, 직함, 성명이 기록된 명단을 싣고 있다. 이어서 신병(身病), 재상(在喪), 발병(廢病), 연유(年幼), 변장재외(邊將在外), 피적(被謫) 등 참여하지 못한 명단을 사유별로 수록하고 ‘康熙十九年 八月日’이라 썼다. 마지막으로 1694년(甲戌) 6월 20일의「復勳時告宗廟祭祝文」에 이어 ‘康熙三十三年十月日’이라는 년기를 적고 좌편에 세필(細筆)로 ‘己巳罷勳甲戌复勳’이라 쓴 후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를 날인(捺印)하였다. 이 “이십공신회맹축”은 왕실이나 충훈부(忠勳府)에서 보관할 목적으로 최고의 재질로 거대하게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에 걸쳐 한자 한자에 정성들여 쓴 글씨와 선명한 주사란, 고급 재질, 장대한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후기 기록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겠다. 또한 현존하는 완전한 상태의 회맹축이 희소하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제공기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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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문화유산 문화재/유물 25의용단(25義勇壇)
    지역 : 부산수영구 관리자(관리단체) : 부산광역시 수영구

    임진왜란 때 수영성을 지키며 왜적과 장렬히 싸우다 순절한 25명의 의로운 충절을 기리고 있는 제단이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좌수사로 있던 박홍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때 수병(守兵)과 성민(城民) 25인이 성문 밖의 선서바위에 모여 피로써 맹세한 후, 바다와 육지에서 적을 상대로 7년간 대항하였다. 이러한 사연은 광해군 원년(1609) 지방민들의 청원으로 알려지게 되어, 동래부사 이안눌이 이 때의 일들을 모아『정방록』을 만들고, 이들의 집 문에 ‘의용(義勇)’이라는 두 글자를 써붙여 그 뜻을 기리도록 하였다. 순조 때에는 동래부사 오한원이 이들의 후손들에게 역(役)의 의무를 면제시키고 글을 지어 포상하였다. 철종 4년(1853) 경상좌수사 장인식이 비를 세우고, ‘의용단’이라 이름하였으며, 제실·의용단을 설치하여 음력 3월과 9월 말정일(末丁日) 두 차례에 걸쳐 제향을 봉행하였다. 제사는 원래 경상좌수사가 주관하였으나 고종 31년(1894) 관제개혁으로 좌수영이 폐지되면서 수영면의 면장이 이를 맡아하였고, 일제시대에 일본 면장이 부임한 이후에는 수영기로회에서 주관하였다. 현재는 수영고적민속보존회와 수영향우회에서 주재하여 음력 9월 말정일에만 제향을 봉행한다.

    제공기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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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문화유산 문화재/유물 3·1 독립선언서(2016-1)(3·1 獨立宣言書(2016-1))
    지역 : 서울서초구 관리자(관리단체) :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3·1 독립운동에 맞추어 민족대표 33인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글이다. 손병희, 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하였다. 처음에는 건의서 형식으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기로 발의되었으나, 건의서는 민족자결의 의미가 없고 강력한 독립의 의지와 그 당위성을 내외에 선포할 독립선언서로 해야 한다는 최린(崔麟)의 주장을 따라 이 선언서를 작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용은 기(독립 선언의 배경과 취지, 독립 선언의 정당성), 승(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민족적 피해, 독립의 필요성, 독립의 신념), 전(우리의 자세, 우리의 소임, 일본의 각성 촉구, 독립의 의의), 결(우리의 할 일, 우리 민족의 결의)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동 강령은 공약 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에 맞추어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밝힌 선언서이다. 이 선언서는 전국적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선언서라는 점에서 등록 가치가 있다.

    제공기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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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문화유산 문화재/유물 3·1 독립선언서(2016-2)(3·1 獨立宣言書(2016-2))
    지역 : 서울강동구 관리자(관리단체) : 이***

    『3·1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에 있었던 3·1 독립운동에 맞추어 민족대표 33인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글이다. 손병희, 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하였다. 처음에는 건의서 형식으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기로 발의되었으나, 건의서는 민족자결의 의미가 없고 강력한 독립의 의지와 그 당위성을 내외에 선포할 독립선언서로 해야 한다는 최린(崔麟)의 주장을 따라 이 선언서를 작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용은 기(독립 선언의 배경과 취지, 독립 선언의 정당성), 승(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민족적 피해, 독립의 필요성, 독립의 신념), 전(우리의 자세, 우리의 소임, 일본의 각성 촉구, 독립의 의의), 결(우리의 할 일, 우리 민족의 결의)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동 강령은 공약 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에 맞추어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밝힌 선언서이다. 이 선언서는 전국적 만세시위운동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선언서라는 점에서 등록 가치가 있다.

    제공기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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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문화유산 문화재/유물 4.3삼진의거 발상지 성구사일원(4.3三鎭義擧 發祥地 誠久祠一圓)
    지역 : 경남창원시 관리자(관리단체) : 초계변씨종중

    성구사는 초계 변씨 문중의 사우(祠宇)로서 고려시대의 두문동 72인 중의 한 분인 문하평리공 변민과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시 순직한 병조판서공 변연수와 변립 부자, 세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상량문과 편액에 의하면 성구사는 1895년에 건립되었다. 이 성구사는 세 충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우 정면에 ‘一’자 모양의 목조건물 도산서당이 있고, 도산서당 전면 좌우편에 동재인 일신재와 서재인 존양재를 두었다. 그리고 솟을대문, 내삼문, 외삼문이 배치되어 있다. 성구사의 강당에 해당되는 도산서당은 1914년에 건립되었으며, 동·서재 기능의 일신재와 존양재는 1915년에 준공되었다. 도산서당과 일신재·존양재는 건립 이후 이 지방에 근대적 학교가 설립되기까지 교육기관의 역할을 해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1919년 4월 3일 진동·진전 일대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났을 때(4.3 삼진의거) 성구사 일원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등 거사를 모의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성구사는 1895년 건축된 조선조 건축양식의 목조건축물로서 그 보존가치가 높다. 또한 성구사 일원은 학교가 설립되기 이전 유생들의 교육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진동·진전 일대에서 일어났던 4·3 삼진의거 발상지로서 역사적 의미가 높은 곳이다.

    제공기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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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문화유산 문화재/유물 4·19 혁명 부상자 명단(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
    지역 : 서울성북구 관리자(관리단체) : 고***

    ‘4·19 혁명 부상자 명단 (고려대학교 4·18 학생 의거)‘은 4?19 혁명 하루 전에 일어난 ‘4?18 고려대 데모’를 중심으로 시위에 참가한 고려대학교 학생 부상자 명단 초안 2종과 이를 정리한 정서본 (1종)이다. 초안(1)은 부상자 명단이 학과?학년?번호?이름?장소?맞은 정도 항목에 따라 작성한 것으로 필체와 필기도구가 다양하여 작성자가 여러 명인 것으로 보인다. 부상 장소는 안암동, 천일극장 앞, 국회의사당, 종로3가, 동대문경찰서 앞 등이며, 맞은 정도는 “곤봉 엇개(어깨) 맞다”, “깡패에 다리 부상 7일 치료”, “머리 터지다”, “천일백화점 근처에서 깡패의 몽둥이로 후두부를 맞고 失神(실신)”등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기재되어 있다. 초안(2)는 1면 위에 ‘4월 18일 부상자 명단’이라고 쓰여 있는데, 같은 필체로 보아 한 사람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서본은 ‘4.19 의거 시 부상한 학생’이라는 제목으로 초안 내용을 수정 또는 보완해 재정리한 것이다. 해당 유물은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까지 시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은 상황과 폭행 장소, 부상 정도 등 정황을 상세하게 알 수 있기 때문에 4.19 혁명을 이해하는 역사적 가치가 큰 자료다.

    제공기관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