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주년 8.15 광복절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 문화 PD가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올해는 광복 80주년입니다.
Q. 독립운동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인가요?
A.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김구 선생님이 생각이 나고 또 한용운 선생님도 생각이 납니다.
A. 저는 유관순 열사와 윤봉길 의사가 먼저 생각이 납니다.
Q. 혹시 박재혁이라는 분을 아시나요?
A.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Q.지금 이 거리가 박재혁 거리인데 알고 계셨나요?
A. 아니요, 자주 돌아다니는 동네인데 전혀 몰랐습니다.
100년 전, 불꽃이 되어 사라진 독립운동가 박재혁
1895년 5월 17일,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난 박재혁.
어린 시절부터 강렬한 민족의식을 지닌 그는, 학창 시절부터 일제에 맞섰다.
부산 공립상업학교(현 개성고)에 진학해 학우들과 함께 일제가 금지한 역사서를 몰래 등사해 배포했고, 이 사건으로 일제 경찰의 감시망에 오르게 된다.
졸업 후 홀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상업 활동에 뛰어든 그는 무역을 하며 중국과 동남아를 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항일 운동가들과 뜻을 함께하게 된다. 이후 상하이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며 조국 해방을 위한 싸움에 몸을 던질 것을 결심한다.
김원봉의 지시로 부산경찰서 폭파 임무를 맡게 된 박재혁.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귀국을 한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거사 준비를 마친 그는 홀어머니와 여동생의 걱정을 뒤로한 채, 집을 나섰다.
1920.09.14 부산일보 호외 - "강력한 폭발로 유혈과 파편이 사방에 흩어졌다."
경찰서장은 사망했고, 박재혁도 중상을 입은 채 체포됐다.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한이 없다."
박재혁은 왜놈의 손에 사형당하느니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싶다며, 옥중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1921년 5월, 대구형무소.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의열단 "정의의사를 맹렬히 실행한다"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 폭탄 의열은 의열단의 첫 번째 투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건 단 두 장의 사진 뿐, 그의 이름과 활동이 역사 속에서 조명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은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딸이었으며, 어떤 이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던 이들의 이름 없는 헌신 위에 세워졌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이름들. 그리고 끝내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얼굴들. 우리는 지금,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AI 신기술로 그들의 모습을 다시 그리고자 합니다.
박재혁 1857~1922
부산 출신으로 1920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해 9월 고서적 상인으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리고,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에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본 콘텐츠 일부는 생성형 AI를(Chat GPT, Haiuo AI, Imagefx) 활용하여 제작되었습니다.
사용 음원
Longing(그리움) by 이호석, 공유마당 제공, CC BY
국악 배경음악 #139 by 주식회사 아이티앤, 공유마당 제공, CC BY
국악 배경음악 #128 by 주식회사 아이티앤, 공유마당 제공, CC BY
SE_01_10_자연다큐멘터리 인트로 by 주식회사 아이티앤, 공유마당 제공, CC BY
사용 폰트
감탄로드돋움체
전주완판본체
아산 이순신체
조선일보명조체, 조선100년체, 에스코어드림, 고운바탕
문화PD 이소민
문화체육관광부 / KCISA 한국문화정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