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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인화국화문대접(7664) 분청사기인화국화문대접(7664)
분청사기인화국화문대접(7664)
문양설명
이 분청사기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인화(印花)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인화기법은 일정한 무늬의 도장을 찍고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백토를 넣는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상감기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13세기경부터 퇴락한 상감 청자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인화문양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성글게 표현되다가 세종 말기에서 세조 연간에 촘촘해지면서 도자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세조 때는 인화분청의 절정기를 이룬다. 인화 분청자의 소재로는 작은 국화문이 주종을 이루며 나비, 커다란 꽃도 인화 문양으로 표현되었다. 인화 분청자는 문양과 구도가 자유분방하지 않고 정형화된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분청자에 비해 특히 왕실용과 관청용이 많다. 대접 내면에 국화문을 인화하여 두르고 그 아래위로 3줄의 선을 둘렀다. 국화는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소나무와 국화를 벗하면서 살았다는 일화로 인해 군자의 맑은 아취와 높은 절개를 지닌 꽃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은군자(隱君子: 속세를 떠나 숨어 사는 군자), 은일화(隱逸花: 속세를 떠나 숨어있는 꽃)라는 별명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또한 늦은 서리를 견디면서 그 청초한 모습을 잃지 않는 국화의 생태는 길상 또는 상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영초(齡草: 나이든 식물), 옹초(翁草: 나이든 식물), 천대견초(千代見草: 천대에 걸쳐서 볼 수 있는 식물)라고도 하여 장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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