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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자인화문발(7355) 크게보기 분청자인화문발(7355) 크게보기
분청자인화문발(7355)
문양설명
이 분청사기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인화(印花)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인화기법은 일정한 무늬의 도장을 찍고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백토를 넣는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상감기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13세기경부터 퇴락한 상감 청자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인화문양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성글게 표현되다가 세종 말기에서 세조 연간에 촘촘해지면서 도자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세조 때는 인화분청의 절정기를 이룬다. 인화 분청자의 소재로는 작은 국화문이 주종을 이루며 나비, 커다란 꽃도 인화 문양으로 표현되었다. 인화 분청자는 문양과 구도가 자유분방하지 않고 정형화된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분청자에 비해 특히 왕실용과 관청용이 많다. 이 분청자는 대접 안바닥에 ‘내섬(內贍)’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술과 안주, 왜인(倭人)·여진인(女眞人)에게 주는 음식물과 직포(織布)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내섬시(內贍寺)를 가리킨다. 발 외면 구연부에 덩굴문대를 돌렸고 몸체에는 국화문을 인화하였다. 내면 바닥에는 “내섬(內贍)”자가 적혀있고 그 주위로 국화문이 인화되었다. 다시 그 바깥으로 연꽃봉오리가 시문되었다. 덩굴은 한자 표기로 당초(唐草)라 표기하는데, 당초는 ‘당(唐)나라 풍의 덩굴무늬’를 가리킨다. 당초라고 하는 용어는 원래 겨우살이덩굴(인동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인동초(忍冬草)는 한국을 비롯한 중국 등지의 산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겨우살이 덩굴식물이다. 이 덩굴은 겨울을 견뎌낼 뿐만 아니라 덩굴을 이루면서 끊임없이 뻗어나가기 때문에 장수와 대(代)를 이음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도자기에는 청화(靑畵) 또는 철화(鐵畵), 진사(辰砂), 상감(象嵌) 등 시문기법으로 묘사한 회화풍의 덩굴문이 성행되어 소박한 민화적 장식 의장 문양의 성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덩굴문은 그 상징성보다는 대량생산에 적합하고 회화적인 구성으로서의 발전가능성으로 분청사기에서 가장 많이 시문되었다. 국화는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소나무와 국화를 벗하면서 살았다는 일화로 인해 군자의 맑은 아취와 높은 절개를 지닌 꽃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은군자(隱君子: 속세를 떠나 숨어 사는 군자), 은일화(隱逸花: 속세를 떠나 숨어있는 꽃)라는 별명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또한 늦은 서리를 견디면서 그 청초한 모습을 잃지 않는 국화의 생태는 길상 또는 상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영초(齡草: 나이든 식물), 옹초(翁草: 나이든 식물), 천대견초(千代見草: 천대에 걸쳐서 볼 수 있는 식물)라고도 하여 장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연꽃은 옛날부터 생명의 창조, 번영의 상징으로 애호되었는데 그 이유는 연꽃의 강한 생명력 때문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연꽃을 청결, 순결의 상징물로 여겼는데 그것은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지만 더러운 연못에 물들지 않는 속성에 기인하고 있다. 연꽃의 이런 속성을 불교의 교리와 연결시켜 초탈(超脫), 보리(菩提), 정화(淨化) 등 관념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또 연꽃은 환생을 상징한다. 우리 판소리 심청가에서도 심청은 인당수에 빠졌다가 큰 연꽃 속에서 환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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