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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딸기무늬대접(7339) 크게보기 청자상감딸기무늬대접(7339) 크게보기
청자상감딸기무늬대접(7339)
문양설명
청자는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고려청자에 본격적으로 문양이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1세기경에 이르러서이다. 문양의 종류는 중국에서 전래된 국화덩굴문과 연판문 등을 고려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킨 것으로 음양각기법이 이용되었다. 12세기에 접어들면서 비색(翡色) 청자의 완성과 함께 다양한 문양이 다채롭게 청자를 장식한다. 또 고려청자의 장식 기법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것이 상감기법인데, 이 기법은 조각칼로 나타내고자 하는 무늬를 음각한 후 그 홈에 붉은 흙이나 흰 흙을 감입한 것으로 문양의 표현이 사실적인 것도 있지만 도안적인 성격이 강하다. 고려 중기 이후 청자의 중요한 장르로 등장한 상감청자에는 예전에 볼 수 없는 새로운 문양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문양으로는 연덩굴문, 국덩굴문, 국화문이나 모란문, 역상감의 보상덩굴문, 포도동자문 등이 많이 보인다. 이 청자대접은 구연은 내만하고 내저면(內底面)은 좁은 원각(圓角)이다. 구연부의 내외면에 덩굴문대를 백상감하여 돌렸다. 내면 바닥에는 국화문을 백상감하고 내측면으로 4개의 석류문을 같은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외면에는 원안에 국화문을 흑백상감하여 넣어 4군데 배치하고 그 사이를 덩굴문으로 채웠다. 아랫부분에는 작은 국화문 4개를 같은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석류는 붉은 주머니 속에 빛나는 씨앗들이 빈틈없이 들어 있어 다손(多孫)과 다남(多男)을 상징하였다. 그 맛이 시어서 임산부들의 구미를 돋우었기에 아들 생산이라는 상징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또 석류의 모양이 보석을 간직한 보석주머니같아서 사금대(沙金袋: 사금주머니)라는 별명까지 겸하여 부귀다남(富貴多男)의 뜻을 지녀 혼례복을 비롯하여 혼수, 침구, 가구 장식, 도자기 등에 많이 쓰여져 왔다. 국화는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소나무와 국화를 벗하면서 살았다는 일화로 인해 군자의 맑은 아취와 높은 절개를 지닌 꽃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은군자(隱君子: 속세를 떠나 숨어 사는 군자), 은일화(隱逸花: 속세를 떠나 숨어있는 꽃)라는 별명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또한 늦은 서리를 견디면서 그 청초한 모습을 잃지 않는 국화의 생태는 길상 또는 상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영초(齡草: 나이든 식물), 옹초(翁草: 나이든 식물), 천대견초(千代見草: 천대에 걸쳐서 볼 수 있는 식물)라고도 하여 장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선비들이 사용하는 문방도구에서 사용된 국화문은 대부분 높은 절개·절조를 상징한다. 덩굴은 한자표기로 당초(唐草)라 하는데, 곧 당나라풍의 덩굴무늬를 가리킨다. 덩굴문은 고대 이집트에서 발생하여 그리스에서 완성되었으며 북아프리카,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서아시아, 페르시아 등의 제국과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당초라고 하는 용어는 원래 겨우살이덩굴(인동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인동초(忍冬草)는 한국을 비롯한 중국 등지의 산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겨우살이 덩굴식물이다. 이 덩굴은 겨울을 견뎌낼 뿐만 아니라 덩굴을 이루면서 끊임없이 뻗어나가기 때문에 장수와 대(代)를 이음을 상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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