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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집옥재 소로(61093) 크게보기 경복궁 집옥재 소로(61093) 크게보기
경복궁 집옥재 소로(61093)
문양설명
경복궁(景福宮)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워졌다. 북으로 북악산에 기대어 자리 잡았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넓은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져, 수도 한양의 중심이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4년(1867)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정무시설, 왕족들의 생활공간, 휴식을 위한 후원이 위치하고 있다.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은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1990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복원하였으며, 왕과 왕비의 침전, 동궁, 건청궁, 태원전 등이 원래 모습을 되찾고 있다. 집옥재(集玉齋)는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안에 있는 전각으로 고종이 서재로 사용한 곳이다. 신무문 동쪽에 있으며, 왼쪽에 팔우정(八隅亭), 오른쪽에 협길당(協吉堂)이 위치하고 있다. 세 건물은 모두 복도로 연결되어있다. 집옥재, 팔우정, 협길당은 창덕궁 함녕전의 별당으로 지어졌으나, 1888년 고종이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함께 이전되었다. 집옥재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맞배집 구조이다. 고종은 이곳에 선대 임금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하였다. 경복궁 내의 다른 전각들과는 달리 당시로서는 신식인 중국풍의 서양식으로 지은 것이 특징이며, 현판도 중국 북송(北宋) 때의 서예가 미불(米?)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팔우정은 집옥재 왼편에 위치하며 고종의 책을 보관하였던 팔각형의 이층 정자건물이다. 중국풍의 요소들이 섞여 있어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협길당은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을 따른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을 갖춘 건물이다.
경복궁 집옥재 소로에 표현한 연꽃이다. 연꽃은 꽃잎의 일부만을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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