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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준명당 추녀(60432) 크게보기 덕수궁 준명당 추녀(60432) 크게보기
덕수궁 준명당 추녀(60432)
문양설명
덕수궁은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리다가,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곳에 살면서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는 원래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경내가 협소하여 근처의 계림군(桂林君)의 집을 포함하였으며,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삼았다.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1618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였으며, 당시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불렀다.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즉조당(卽祚堂)과 석어당(昔御堂)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아관파천이후 고종이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1910년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石造殿) 등이 건립되었다. 또한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동쪽에 있던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덕수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으며,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하였기 때문에 전각 배치도 정연하지 못하다.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준명당(俊明堂)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이다.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건물을 중건하였던 1897년에 새로 건축하였다. 준명당은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인데,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이 나 타 버린 뒤 다시 지어진 것이다. 이 건물의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 모양 평면을 이루고 있다.
준명당 추녀의 마구리부분에 표현한 연꽃이다. 연꽃은 활짝 핀 모습이며 흑색 바탕에 백색으로 나타내었다. 꽃잎은 사방을 향하고 있으며 끝이 뾰족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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