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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희정당 착고판(60307) 크게보기 창덕궁 희정당 착고판(60307) 크게보기
창덕궁 희정당 착고판(60307)
문양설명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가장 오랫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궁 역할을 하였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한 침전에서 불이 나서 희정당(熙政堂) 등 19동의 건물이 불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을 헐어서 창덕궁의 건물들을 재건하였다. 창덕궁은 197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희정당(熙政堂)은 원래 침전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왕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건축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연산군 2년(1496)에 수문당(修文堂)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희정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1917년에 불에 탄 후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1920년에 지은 것이다. 규모는 정면 11칸, 측면 5칸으로 내부에는 유리창과 전등, 근대적 화장실을 설치하고 바로크풍의 가구를 갖추고 있다.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생겼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설비하였다. 이는 마차나 자동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채택된 서양식 구조라 할 수 있다. 희정당은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로 외국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이다.
창덕궁 희정당 착고판으로 연꽃과 덩굴을 간략한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연꽃은 마치 연꽃봉오리와 같은 모습이다. 연꽃의 아래쪽으로 두 줄의 덩굴이 있으며 연꽃봉오리를 더하여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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