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 전통문양 용도별문양
청화백자철채해태형연적(19695) 청화백자철채해태형연적(19695)
청화백자철채해태형연적(19695)
문양설명
그래서 호리병은 악귀를 물리치고 악한 병과 독을 없애주는 데 영험이 있을 뿐 아니라, 장수·부귀의 신통력이 있다고 믿었다. 민속신앙에서 두창신이 표주박을 보면 달아난다고 하며, 병의 해독을 호리병 속에 집어넣어 가두어 두면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예전에는 정초에 어린아이들의 허리춤에 조롱박을 붉은 실로 꿰어 매달아주었다고 한다. 또 호리병은 남성의 성기와 다남(多男)을 상징하는데, 호리병 속에 수많은 씨앗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돌을 맞은 아이의 의복이나 이불, 보자기, 혼수품, 도자기 등의 무늬로 많이 나타난다. 연판문은 연꽃의 꽃잎을 펼쳐 놓은 모양을 도안화시켜 연속무늬를 구성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형태는 주로 도자기의 어깨부분이나 굽 혹은 저부의 둘레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연꽃이 지닌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즉 도자기 등 그릇의 둘레에 연판문양이 들어감으로써 그 물건의 비범성과 청정함을 나타내어 일반의 비속한 존재와 구별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연판문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삼국 시대에 불교미술이 시작되고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문양화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다. 범종을 비롯한 각종 불구류(佛具類)와 사리장엄구, 향로, 동경 등에서 다양한 연판의 양식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형식은 고려시대에 와서 단조로운 선으로 표현되어 더욱 간결해진다. 연꽃은 옛날부터 생명의 창조, 번영의 상징으로 애호되었는데 그 이유는 연꽃의 강한 생명력 때문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연꽃을 청결, 순결의 상징물로 여겼는데 그것은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지만 더러운 연못에 물들지 않는 속성에 기인하고 있다. 연꽃의 이런 속성을 불교의 교리와 연결시켜 초탈(超脫), 보리(菩提), 정화(淨化) 등 관념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또 연꽃은 환생을 상징한다. 우리 판소리 심청가에서도 심청은 인당수에 빠졌다가 큰 연꽃 속에서 환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풀꽃문은 대칭형을 이루며 간단하고 소박하게 표현되며 사실적인 문양보다는 단순화된 문양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서 자연스러운 서민의 인식과 풍치를 발견할 수 있다. 풀꽃문은 자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연에 순응할 줄 아는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풀꽃문의 전성기는 조선시대 중반에 해당되며, 실용성을 위주로 하는 조선시대 공예의 이념을 잘 나타내며 간결하고 활달한 멋을 느낄 수 있다.
연적은 벼루에 먹을 갈 때 적당한 양의 물을 떨어뜨려 주기 위한 목적에서 고안된 용기로, 구멍 둘을 내어 공기를 조절함으로써 연적 안에 물을 넣고 또 원하는 만큼의 물이 나오도록 조절할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문을 숭상하던 조선시대에 들어와 연적에 대한 수요는 증가되고, 이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연적들이 만들어 졌다. 특히 18세기에는 문인 사대부 취향의 그릇들이 다수 제작되는데, 그 한 예로 시정이 넘치는 작고 아담한 각종 연적들이 만들어진다. 형태로는 팔각, 사각 같은 각형이 등장하였고 조선 고유의 두꺼비나 개구리 연적, 무릎 연적, 복숭아 연적처럼 다양하고 정감 어린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연적은 일반적으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사용됐지만 비교적 큰 것은 장식품으로 애호되어 왔다. 이것은 해태 모양의 백자 연적이다. 해태의 벌어져 있는 입과, 등 위에 얹혀 있는 호리병에 구멍이 뚫려 있어 물을 쉽게 넣고 따를 수 있도록 하였다. 해태의 몸통에 여러 가지 문양을 그려 장식하였는데, 눈썹과 눈, 코, 입술과 방울끈, 호리병 아래 연판문, 그리고 몸통 옆면과 뒷다리에 그려진 풀꽃문은 청화(靑畵)를 이용해 푸르게 채색하였다. 또 귀, 목에 달린 방울, 앞다리와 뒷다리에 달린 날개, 네 발, 정수리와 엉덩이에 그려진 풀꽃문 등은 진사(辰砂)를 사용해 갈색으로 표현하였다. 해태는 조선시대 말엽 대원군 때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을 재건하면서 화재(火災)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 또는 벽사의 의미로 장식되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광화문 앞에 서있는 것이 있으며 그 밖에도 경복궁 근정전의 월대 난간 네 모퉁이와 자경전 굴뚝 십장생 전동 장식에서 볼 수 있다. 해태라는 말은 해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해치는 요순(堯舜)시대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상상의 동물로 그 이름도 해치, 신양(神羊), 식죄(識罪), 해타 등으로 불렸다. 해치의 모습과 성질에 대새 『논형(論衡)』「시응편(是應篇)」과 『이물지(異物志)』 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뿔을 하나 가진 동물로서 모습은 양을 닮았으며 대단히 영물스럽고 사람의 시비곡직을 판단하는 신령스러운 재주가 있어 성군을 도와 현명한 일을 많이 하였고 만일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뿔로 덤비어 받아넘기는 ‘정의의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大司憲의 胸背에 쓰여 지기도 하였다. 흉배에 나타나는 해태의 모습은 鹿角과 같은 뿔이 달린 머리와 목덜미에는 용처럼 갈기가 돋았고 포효하는 듯한 크게 벌린 입, 경쾌한 몸집, 그리고 꼬리 끝에는 사자처럼 긴 털이 돋아 있다. 호리병의 한자 표기는 호리병박 표(瓢)이며 속칭 표단(瓢簞)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선약(仙藥)을 상징한다. 도교에서는 신선이 선약(仙藥)이 들어 있는 호리병을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사람의 병을 치료해준다고 하였다.
공공누리 제 1유형 마크 - 출처 표시

한국문화정보원이 창작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예) 본 저작물은 "문화포털" 에서 서비스 되는 전통문양을 활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