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 전통문양 용도별문양

용도별문양

분청자인화문접시(19678) 분청자인화문접시(19678)
분청자인화문접시(19678)
문양설명
연판문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삼국 시대에 불교미술이 시작되고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문양화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다. 범종을 비롯한 각종 불구류(佛具類)와 사리장엄구, 향로, 동경 등에서 다양한 연판의 양식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형식은 고려시대에 와서 단조로운 선으로 표현되어 더욱 간결해진다. 연꽃은 옛날부터 생명의 창조, 번영의 상징으로 애호되었는데 그 이유는 연꽃의 강한 생명력 때문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연꽃을 청결, 순결의 상징물로 여겼는데 그것은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지만 더러운 연못에 물들지 않는 속성에 기인하고 있다. 연꽃의 이런 속성을 불교의 교리와 연결시켜 초탈(超脫), 보리(菩提), 정화(淨化) 등 관념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또 연꽃은 환생을 상징한다. 우리 판소리 심청가에서도 심청은 인당수에 빠졌다가 큰 연꽃 속에서 환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접시는 운두가 낮고 납작한 그릇의 총칭으로 음식을 담거나 다른 그릇의 밑에 받쳐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분청사기 접시로 외면에는 백상감과 인화기법을 동시에 사용하여 조잡한 여러 겹의 선문(線紋)을 상하로 두고 그 사이를 삿자리무늬로 꽉 채우고 있다. 내면의 경우 도안화된 덩굴문대와 인화문, 연판문을 차례로 시문하고 내저면 중앙에는 이중 동심원 속의 국화와 그 주변을 감싸는 열 마리의 나비를 인화 시문하였다. 삿자리는 갈대로 만든 자리인데, 삿자리무늬는 비스듬히 줄을 이어 짧은 점선이 연결 집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 의한 추상문양은 신석기 시대부터 나타나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에서 나타난다. 만들 때 안으로는 자갈돌 같은 받침을 대고 밖으로부터 노끈을 감거나 노끈무늬·격자무늬를 새긴 방망이로 두드려 표면에 노끈무늬·격자무늬를 나타나게 한 다음 같은 간격의 평행선을 둘러 삿자리 비슷한 삿자리무늬를 장식하였는데 이렇게 만든 토기를 종래 승석문(繩蓆文) 혹은 삿무늬 토기라고 불렀다. 이러한 삿자리무늬는 고려상감청자에서도 나타나며, 분청사기에서는 인화문 기법으로 발전되었다. 분청사기의 무수한 점에 깔린 사상은 『주역(周易)』의「태극론(太極論)」에서 다음과 같이 찾을 수 있다. “점은 찍어가다 보면 결국 그 점은 되돌아오게 되고, 태어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또 태어나는 그러한 것이 삼라만상이고, 점이 모이면 산이 되고, 물이 되고, 또 흩어지면 공기가 되기도 한다.” 분청사기의 삿자리무늬에는 옛사람들의 우주관이 담겨있는 것이다. 삿자리무늬는 단순 소박한 모양과 장식으로 이루어진 분청사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덩굴은 한자 표기로 당초(唐草)라 표기하는데, 당초는 ‘당(唐)나라 풍의 덩굴무늬’를 가리킨다. 당초라고 하는 용어는 원래 겨우살이덩굴(인동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인동초(忍冬草)는 한국을 비롯한 중국 등지의 산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겨우살이 덩굴식물이다. 이 덩굴은 겨울을 견뎌낼 뿐만 아니라 덩굴을 이루면서 끊임없이 뻗어나가기 때문에 장수와 대(代)를 이음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도자기에는 청화(靑畵) 또는 철화(鐵畵), 진사(辰砂), 상감(象嵌) 등 시문기법으로 묘사한 회화풍의 덩굴문이 성행되어 소박한 민화적 장식 의장 문양의 성격으로 나타난다. 연판문은 연꽃의 꽃잎을 펼쳐 놓은 모양을 도안화시켜 연속무늬를 구성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형태는 주로 도자기의 어깨부분이나 굽 혹은 저부의 둘레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연꽃이 지닌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즉 도자기 등 그릇의 둘레에 연판문양이 들어감으로써 그 물건의 비범성과 청정함을 나타내어 일반의 비속한 존재와 구별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공공누리 제 1유형 마크 - 출처 표시

한국문화정보원이 창작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예) 본 저작물은 "문화포털" 에서 서비스 되는 전통문양을 활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