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 문화지식 > 전통문양 용도별문양

용도별문양

분청자인화문내섬명대접(19672) 분청자인화문내섬명대접(19672)
분청자인화문내섬명대접(19672)
문양설명
연판문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삼국 시대에 불교미술이 시작되고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문양화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다. 범종을 비롯한 각종 불구류(佛具類)와 사리장엄구, 향로, 동경 등에서 다양한 연판의 양식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형식은 고려시대에 와서 단조로운 선으로 표현되어 더욱 간결해진다. 연꽃은 옛날부터 생명의 창조, 번영의 상징으로 애호되었는데 그 이유는 연꽃의 강한 생명력 때문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연꽃을 청결, 순결의 상징물로 여겼는데 그것은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지만 더러운 연못에 물들지 않는 속성에 기인하고 있다. 연꽃의 이런 속성을 불교의 교리와 연결시켜 초탈(超脫), 보리(菩提), 정화(淨化) 등 관념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또 연꽃은 환생을 상징한다. 우리 판소리 심청가에서도 심청은 인당수에 빠졌다가 큰 연꽃 속에서 환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덩굴은 한자 표기로 당초(唐草)라 표기하는데, 당초는 ‘당(唐)나라 풍의 덩굴무늬’를 가리킨다. 당초라고 하는 용어는 원래 겨우살이덩굴(인동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인동초(忍冬草)는 한국을 비롯한 중국 등지의 산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겨우살이 덩굴식물이다. 이 덩굴은 겨울을 견뎌낼 뿐만 아니라 덩굴을 이루면서 끊임없이 뻗어나가기 때문에 장수와 대(代)를 이음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도자기에는 청화(靑畵) 또는 철화(鐵畵), 진사(辰砂), 상감(象嵌) 등 시문기법으로 묘사한 회화풍의 덩굴문이 성행되어 소박한 민화적 장식 의장 문양의 성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덩굴문은 그 상징성보다는 대량생산에 적합하고 회화적인 구성으로서의 발전가능성으로 분청사기에서 가장 많이 시문되었다. 번개문은 지그재그 모양 또는 지(之)자, 회(回)자 모양의 무늬를 가리키는데, 이는 곧 번개를 상징하는 무늬이다. 번개는 농경사회에서 가뭄에 비를 몰고 오는 길조로 여긴다. 또 번개문은 연속되는 무늬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연속되어 끊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최대의 길상을 상징한다. 삿자리는 갈대로 만든 자리인데, 삿자리무늬는 비스듬히 줄을 이어 짧은 점선이 연결 집합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 의한 추상문양은 신석시대부터 나타나며,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에서 나타난다. 만들 때 안으로는 자갈돌 같은 받침을 대고 밖으로부터 노끈을 감거나 노끈무늬·격자무늬를 새긴 방망이로 두드려 표면에 노끈무늬·격자무늬를 나타나게 한 다음 같은 간격의 평행선을 둘러 삿자리 비슷한 삿자리무늬를 장식하였는데 이렇게 만든 토기를 종래 승석문(繩蓆文) 혹은 삿무늬 토기라고 불렀다. 이러한 삿자리무늬는 고려상감청자에서도 나타나며, 분청사기에서는 인화문 기법으로 발전되었다. 분청사기의 무수한 점에 깔린 사상은 『주역(周易)』의 「태극론(太極論)」에서 다음과 같이 찾을 수 있다. “점은 찍어가다 보면 결국 그 점은 되돌아오게 되고, 태어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또 태어나는 그러한 것이 삼라만상이고, 점이 모이면 산이 되고, 물이 되고, 또 흩어지면 공기가 되기도 한다.” 분청사기의 삿자리무늬에는 옛사람들의 우주관이 담겨있는 것이다. 삿자리무늬는 단순 소박한 모양과 장식으로 이루어진 분청사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분청사기는 분청자라고도 하는데, 이 분청자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자적인 도자양식으로 고려청자가 쇠퇴하면서 만들어지기 시작되어 16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간 성행하였다. 분청자는 백토를 그릇 표면에 씌우는 백토분장 기법에 따라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이 분청사기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인화(印花)기법을 사용하였는데, 인화기법은 일정한 무늬의 도장을 찍고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백토를 넣는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상감기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13세기경부터 퇴락한 상감 청자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인화문양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성글게 표현되다가 세종 말기에서 세조 연간에 촘촘해지면서 도자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세조 때는 인화분청의 절정기를 이룬다. 인화 분청자의 소재로는 작은 국화문이 주종을 이루며 나비, 커다란 꽃도 인화 문양으로 표현되었다. 인화 분청자는 문양과 구도가 자유분방하지 않고 정형화된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분청자에 비해 특히 왕실용과 관청용이 많다. 이 분청자는 대접 안바닥에 ‘내섬(內贍)’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술과 안주, 왜인(倭人)·여진인(女眞人)에게 주는 음식물과 직포(織布)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내섬시(內贍寺)를 가리킨다. 대접 안바닥에 큰 동그라미를 돌리고 중앙에 5개의 잎으로 둘러싸인 국화꽃과 나비문을 배치하고 한쪽에 ‘내섬(內贍)’이라는 명문을 찍었다. 그 바깥으로 연판문과 작은 국화문, 간략한 덩굴문대를 배치했다. 외측면은 구연부부터 번개문, 삿자리문(繩簾紋), 국화문 순으로 배치했다. 국화는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소나무와 국화를 벗하면서 살았다는 일화로 인해 군자의 맑은 아취와 높은 절개를 지닌 꽃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은군자(隱君子: 속세를 떠나 숨어 사는 군자), 은일화(隱逸花: 속세를 떠나 숨어있는 꽃)라는 별명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또한 늦은 서리를 견디면서 그 청초한 모습을 잃지 않는 국화의 생태는 길상 또는 상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영초(齡草: 나이든 식물), 옹초(翁草: 나이든 식물), 천대견초(千代見草: 천대에 걸쳐서 볼 수 있는 식물)라고도 하여 장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나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즐거움과 행복, 그리고 자유연애와 아름다운 것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동양에서는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에서 연유하여 남녀 화합의 상징으로 여겨지는데, 장자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화궁(花宮) 속으로 날아다니며 달콤한 꿀을 빨아먹으면서 즐거움을 만끽한 데서 나비는 즐거움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특히 꽃에 날아드는 나비의 모습은 부부간의 화합과 자손의 번성의 염원하는 여인의 마음을 나타낸다. 연판문은 연꽃의 꽃잎을 펼쳐 놓은 모양을 도안화시켜 연속무늬를 구성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형태는 주로 도자기의 어깨부분이나 굽 혹은 저부의 둘레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연꽃이 지닌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즉 도자기 등 그릇의 둘레에 연판문양이 들어감으로써 그 물건의 비범성과 청정함을 나타내어 일반의 비속한 존재와 구별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공공누리 제 1유형 마크 - 출처 표시

한국문화정보원이 창작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예) 본 저작물은 "문화포털" 에서 서비스 되는 전통문양을 활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