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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내아(116541) 크게보기
김제 내아(116541)
문양설명
「김제 내아」는 1749년경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헌, 누각(피금각) 과 함께 보존되어 지방관의 일상을 고찰할 수 있는 드문 사례이다. 동헌이 공무를 수행하는 곳인데 반해, 내아는 지방관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살림집이므로 동헌, 누각, 내아 건물은 각각 업무공간, 여가공간, 거주공간을 대표하는 수령의 일과를 구성할 때 꼭 필요한 장소이다. 세 공간은 서로 연계되면서 독립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 동헌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훼철(毁撤)되었다가 1699년 군수 이세성(李世晟)이 새로 짓고 사칠헌(事七軒)으로 이름 붙인 건물로 지금까지 전한다. * 피금각(披襟閣)은 군수 정홍명(鄭弘溟)이 1633년에 지은 누각으로 김제 관아에서 병자호란 이전에 지어진 유일한 건축물이다. 김제 내아는 ‘ㄷ’자형 평면으로 가운데 본채는 5량가 팔작지붕이고 날개채는 3량가의 우진각지붕으로 구성되었다. 상량문 분석 및 대보 부재의 연륜연대 측정 결과 1749년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제 내아는 남향을 한 동헌과 달리 동향으로 지어져 상호 간의 간섭을 줄였다. 동헌 쪽 날개채는 주택의 사랑채와 같이 구성하여 안마당을 보호하면서도 대외적인 관계를 고려했고, 반대쪽 날개채에는 안방과 부엌을 두고 살림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렇게 대청을 경계로 양쪽 날개채에 내외(內外) 개념을 적용한 것은 김제 내아 공간구성의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공포는 장식을 생략함으로써 소박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건축물 전체에 원기둥을 사용한 것은 전각의 형식을 준용하였으며 대청 공간에서 고주의 흘림과 대보의 규모, 포대공과 뜬장여의 사용 등이 매우 고급스럽다. 김제 내아는 모듈을 조립하여 공간을 구성하는 생산방식의 장단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가로세로 8척 규모의 칸을 조합해서 이루어지며, 본채는 두 칸 폭인 16척의 5량가, 날개채는 한 칸 폭인 8척의 3량가로 조립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공간의 치수는 8(척)의 배수로 설정되어 정형화된 입면의 기법이 공간의 기능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특징은 관영건축에서 조선후기 노임제의 정착에 따른 건축생산력의 향상, 건축기술자 직능의 세분화에 따른 시공기술의 발전, 민간 목재상의 대두로 인한 재료수급의 효율화가 함께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김제내아는 고을 수령의 살림집으로 전국 유일, 전국최초로 국가문화재(보물)로 지정된 건물이다. 조선후기로부터 현재까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희소성을 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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