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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유병(114206) 청자상감유병(114206)
청자상감유병(114206)
문양설명
연꽃의 독특한 생장 특성을 이용해 다산의 의미로 승화시킨 것이다. 연꽃은 불교만의 전용 소재는 아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 이전부터 연꽃은 도교와 유교에서 군자(君子)의 상징으로 비유되었다.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는 자신이 노래한 「애련설(愛蓮說)」에서 “꽃 가운데 국화는 속세를 떠난 군자요, 모란은 부귀한 자이며, 연꽃은 군자(君子)라 생각한다”고 찬양하였다. 이와 같이 진흙탕에서도 물들지 않고 청아하게 피어나는 연꽃을 유교에서는 덕망 높은 군자를 상징하는 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것은 향유를 담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의 청자 유병(油甁)이다. 유병은 향유(香油)나 머릿기름 등의 기름을 담는 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토기에서부터 나타나며 고려청자를 거쳐 조선시대의 백자 및 청화 백자에 이르기까지 많이 만들어졌다. 가장 작고 앙증맞은 향유 병에서부터 연지 반죽용 기름을 담는 작은 병, 비교적 큰 머릿기름용 병 등, 안에 담긴 기름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크기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긴 머리카락을 가꾸기 위해 머릿기름이 필요했는데 동백, 아주까리 수유의 씨, 들깨 등으로 기름을 짜서 유병에 담아두고 썼던 것으로 보인다. 머릿기름은 햇빛에 민감했기 때문에 이를 담는 유병은 몸통이 불룩하고 목이 좁은 것이 특징이다. 이 유병의 몸체에는 세 곳에 같은 간격으로 모란문을 흑백상감했다. 구연에는 연봉오리 모양의 뚜껑이 달려 있는데 병 안쪽으로 들어가는 부분이 길쭉하게 만들어져 있어 내용물의 증발을 막고 좀 더 안정적으로 보관할 수 있다. 모란은 부귀(富貴)의 상징으로 많이 쓰이는데, 꽃 중의 왕이라 할 만큼 탐스러운 모란은 신라 선덕여왕 때 당나라로부터 전해졌다. 모란문은 특히 다른 문양과 복합되어 회화적 느낌을 풍기는 표현이 많다. 모란무늬는 조선시대에 민화를 위시한 여타의 민속 공예에서 부귀를 간절히 바라는 기복적 표현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고려 도자기에는 초기에는 송(宋)·원(元) 도자기의 모란문과 같은 양상으로 회화적인 것이 많이 나타나지만 차츰 잎과 줄기가 함께 표현되는 절지화(折枝花)와 화분에 담긴 형태로 표현되는 화분화(花盆花) 등 관념적인 문양이 많이 나타난다. 이 유병에서도 절지화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연꽃문은 고대 인도에서 전래되어 불교 미술의 상징적 도안으로 사용되어 왔다. 수많은 꽃 중에서 유독 연꽃만이 꽃과 열매가 동시에 피어나는 독특한 특성을 지녔는데, 이러한 연유에서 연꽃은 고대로부터 생성과 관련되는 의미를 부여받았다. 이와 같은 생명 창조의 상징은 불교에서는 부처의 지혜를 믿는 사람 모두 사후에 연꽃 속에서 다시 태어나 서방정토에서 왕생한다는 연화화생 신앙으로 표출되었다. 또 불교에서는 연꽃을 청결, 순결의 상징물로 여겼는데 그것은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지만 더러운 연못에 물들지 않는 속성에 기인하고 있다. 연꽃의 이런 속성을 불교의 교리와 연결시켜 초탈(超脫), 보리(菩提), 정화(淨化) 등 관념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한편 연꽃은 민간 신앙에서는 다산(多産)의 의미로 상징되었다. 그 이유는 연꽃의 강한 생명력 때문으로 중국의 민간 신앙 가운데 ‘연생귀자(連生貴子)’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의미는 귀한 아들을 연이어 많이 낳기를 축원하는 것이다. 연꽃의 ‘연(連)’과 연생의 ‘연(連)’이 같은 소리를 낸다고 하여 서로 상통하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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