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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철화연화문항아리(113555) 분청사기철화연화문항아리(113555)
분청사기철화연화문항아리(113555)
문양설명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부부가 서로 의지하고 반려가 됨을 상징하는 쌍어문양을 좋아하였다. 또 한 쌍의 물고기를 그린 그림은 경사 또는 여유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물속에서 노는 모습이 여유롭게 보이기도 하거니와 물고기의 어(魚) 발음이 여유롭다는 뜻의 여(餘) 발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한편 『후한서(後漢書)』「이응전(李膺傳」에서는 “선비가 과거에 합격하여 임금의 얼굴을 뵈는 것을 등용문(登龍門)이라 한다”라고 적고 있다. 등용문에 관한 전설의 주된 줄거리를 보면, 해마다 봄이 되면 황하 상류의 용문(龍門)이라는 협곡에서 잉어들이 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다투어 뛰어오르는데 그곳을 성공적으로 뛰어넘은 놈이 용으로 화한다고 하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면학에 힘쓰는 선비들을 이 전설의 잉어에 비유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잉어가 변하여 용이 되는 것에 비유하였다. 이런 문양은 선비가 많이 쓰는 문방제품이나 기타 공예품 장식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또한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항상 그릇된 것을 경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버들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낙엽고목으로 우리민족에게는 관조의 대상으로 또는 예술의 소재로서 풍류가 깃들인 멋과 함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버드나무는 여성미, 소원, 고향, 부적, 이별, 송별 등의 의미를 상징한다.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잎은 여성의 긴 머리와 같고, 유난히 바람에 잘 흔들려 여성과의 이별의 의미를 지니는 까닭에서다. 버들문이 도자기의 문양으로 사용된 예는 극히 드문데, 모란문과 마찬가지로 고려청자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모란은 화려한 자태로 인하여 꽃 중의 왕으로 일컬어지며, 화목·부귀영화·번영을 상징한다. 송나라 유학자 주돈이는 「애련설(愛蓮說)」에서 “모란은 꽃 가운데 부귀한 자이다”고 하여 모란이 부귀를 상징함을 찬한 바 있다. 또한 모란이 주제로 등장하는 그림들 가운데 부귀장춘(富貴長春)은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리기를 축원하는 도안이며, 장명부귀(長命富貴) 역시 생일을 축하하면서 장수와 부귀를 누리기를 기원하는 도안이다. 또한 모란과 수탉이 주제로 등장하는 공명부귀(功名富貴)는 벼슬길에 나아가 이름을 날리고 부귀를 누리기를 축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고려시대 청자에서 간결하게 도안된 모란무늬가 쓰이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비롯하여 청화백자·진사백자·철화백자 등에서 민화풍의 회화적인 필치로 그린 모란무늬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이다. 분청사기는 청자와 같이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 위에 백토로 표면을 바르고 그 위에 회청색의 유약을 입혀 구워낸 사기이다. 분청사기가 번조된 시기는 대략 14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해당되며 조선전기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우리 도공들의 납치와 요지의 파괴로 분청사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은 철화기법을 사용한 분청사기 항아리이다. 철화기법이란 백토를 입힌 위에 철사 안료로 무늬를 나타낸 것으로, 여러 무늬 가운데 가장 추상적이며 단순성을 띤다. 분청사기의 맨 마지막 시기에 유행하였다. 입 부분이 곡선을 그리며 조금 올라가다가 끝에 가서 크게 벌어지며, 어깨가 부풀었다가 조금씩 좁아지면서 그대로 바닥에 이르는 형태의 항아리이다. 이러한 형태의 항아리는 대략 15세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뚜껑에는 꼭지 둘레에 선을 한 가닥 돌린 후 그것을 중심으로 이중연판문을 그렸다. 몸체는 어깨와 배와 아랫도리의 3단으로 문양대를 나누어 각각 덩굴문과 연화문, 이중연판문을 그렸는데, 문양대마다 아래위에 선을 그어 구획하였고 그 구획선 사이는 비워두었다. 연판문은 연꽃의 꽃잎을 펼쳐 놓은 모양을 도안화시켜 연속무늬를 구성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형태는 주로 도자기의 어깨부분이나 굽 혹은 저부의 둘레에 사용되었는데 이는 연꽃이 지닌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즉 도자기 등 그릇의 둘레에 연판문양이 들어감으로써 그 물건의 비범성과 청정함을 나타내어 일반의 비속한 존재와 구별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연판문이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시기는 삼국 시대에 불교미술이 시작되고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문양화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다. 범종을 비롯한 각종 불구류(佛具類)와 사리 장엄구, 향로, 동경 등에서 다양한 연판의 양식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형식은 고려시대에 와서 단조로운 선으로 표현되어 더욱 간결해진다. 연꽃은 옛날부터 생명의 창조, 번영의 상징으로 애호되었는데 그 이유는 연꽃의 강한 생명력 때문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연꽃을 청결, 순결의 상징물로 여겼는데 그것은 늪이나 연못에서 자라지만 더러운 연못에 물들지 않는 속성에 기인하고 있다. 연꽃의 이런 속성을 불교의 교리와 연결시켜 초탈(超脫), 보리(菩提), 정화(淨化) 등 관념의 상징으로 간주하였다. 또 연꽃은 환생을 상징한다. 우리 판소리 심청가에서도 심청은 인당수에 빠졌다가 큰 연꽃 속에서 환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덩굴은 한자 표기로 당초(唐草)라 표기하는데, 당초는 ‘당(唐)나라 풍의 덩굴무늬’를 가리킨다. 당초라고 하는 용어는 원래 겨우살이덩굴(인동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인동초(忍冬草)는 한국을 비롯한 중국 등지의 산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겨우살이 덩굴식물이다. 이 덩굴은 겨울을 견뎌낼 뿐만 아니라 덩굴을 이루면서 끊임없이 뻗어나가기 때문에 장수와 대(代)를 이음을 상징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도자기에는 청화(靑畵) 또는 철화(鐵畵), 진사(辰砂), 상감(象嵌) 등 시문기법으로 묘사한 회화풍의 덩굴문이 성행되어 소박한 민화적 장식 의장 문양의 성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덩굴문은 그 상징성보다는 대량생산에 적합하고 회화적인 구성으로서의 발전가능성으로 분청사기에서 가장 많이 시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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