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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형토기(3000687) 크게보기 3D 뷰어
발형토기(3000687)
국적/시대
한국/청동기
재질
토제/연질
용도
보관, 생활용품
소장처
경상대학교박물관
3D프린팅 가이드
추천재질 1 : 파우더(SLS/DMLS)
추천재질 2 : 플라스틱(FDM/FFF)
원천유물설명
발형토기는 바리모양의 토기를 말한다. 편평한 바닥을 가지고 있고 목이 없으며, 바닥의 지름보다 아가리의 지름이 큰 토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높이 20㎝ 이상의 것을 깊은 바리(深鉢), 그 이하의 것을 바리(鉢)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형태만으로 보았을 때, 한반도 주변지역에서 가장 이른 발형토기는 신석기시대 전기 중국 동북지방에 널리 분포하는 지자문토기(之字文土器)를 들 수 있으며, 함경북도 서포항 유적의 토기도 깊은 바리모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청동기시대의 토기 중 항아리형 토기와 구분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전기청동기시대의 발형토기 중 가장 이른 것은 함경북도에서 보이는 깊은 바리로서 아가리 끝부분이 바깥으로 바라져있고, 골아가리무늬(口脣刻目文) 또는 구멍무늬(孔列文)가 시문되기도 한다. 남한지역 전기청동기시대의 발형토기는 북한지역의 발형토기에 비해 아가리 부분이 곧게 서 있는데, 아가리의 모양에 따라 구멍무늬토기, 가락동식토기, 흔암리식토기로 구분되며, 골아가리무늬와 결합되는 경우도 많다. 이들 토기는 대개의 경우 깊은 바리, 바리,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 항아리형토기(壺形土器)와 공반된다. 아가리 부위에 행하는 시문은 주로 깊은 바리에 국한되고 있고, 바리에 시문되는 경우는 드물다. 남한지역의 전기청동기시대의 발형토기는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서산 휴암리, 안면도 고남리 등지에서 보이듯, 아가리부분이 안으로 좁아지는 경향을 보이다가, 중기 청동기시대 들어서 밖으로 벌어지는 외반구연의 형태로 변화하면서 유물군 내에서의 비율이 점차 낮아진다. 동북지방과 경상도지역의 일부에서는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에 손잡이(把手)가 부착되는 형태로도 변화한다. 이후 청동기의 사용이 시작되면서, 바리모양을 지닌 점토대토기와 화분형토기가 지역을 달리하여 등장하는데, 형태상의 정의로는 이들 토기가 발형토기에 속하지만, 일반적으로 발형토기라는 명칭을 이들 토기를 지칭하는데 사용하는 예는 드물다. 본 발형토기는 경남 진주 대평리 옥방 3지구 선사유적에서 출토되었다. 몸통이 일부 결손된 발형토기로 5단의 점토대를 바깥으로 비스듬히 접합시켜 돌려가며 쌓아올렸다. 그러나 점토대끼리의 접합부위가 정확하게 관찰되지는 않는다. 외면에는 전체적인 물손질과 함께 박리가 심해 표면을 다듬은 흔적은 뚜렷하지 않지만, 아가리에 가로방향의 물손질과 바닥 외면에 지두압흔(指頭壓痕), 목판조정흔(木板調整痕)이 희미하게 관찰된다. 내면은 목판조정에 의한 나무결이 뚜렷하게 관찰되며, 아가리와 점토대 접합부위에 지두압흔이 관찰된다. 외면은 바닥 굽 바로 위에 그을음이 한 바퀴를 돌며 부분적으로 선홍색의 불맞은 흔이 보인다. 몸통 중위에 그을음이 심하다. 내면은 몸통 중상위에 그을음이 수착되어 있으나 아가리 끝은 황갈색으로 밝은 편이다.
활용설명
발형토기의 형태를 그대로 활용해 생활소품으로 제작하였다. 표면을 다듬은 흔적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무늬가 없기 때문에 토기 자체의 형태미를 잘 살리도록 하였다. 넓은 아가리와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몸통, 편평한 바닥을 그대로 살려서 토기 자체에서 느껴지는 원시적인 미감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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