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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9년명전(永和九年銘塼)(3000655) 크게보기 3D 뷰어
영화9년명전(永和九年銘塼)(3000655)
국적/시대
한국/낙랑
재질
토제/와질
용도
의례, 벽
소장처
경북대학교박물관
3D프린팅 가이드
추천재질 1 : 파우더(SLS/DMLS)
추천재질 2 : 플라스틱(FDM/FFF)
원천유물설명
점토를 틀에 대고 찍은 다음 건조하거나 구운 벽돌이다. 전은 건축물의 바닥에 까는 부전(敷塼), 벽을 장식하는데 사용되는 벽전(壁塼), 묘실을 축조할 때 사용되는 묘전(墓塼), 탑을 축조할 때 사용되는 탑전(塔塼) 등으로 구분된다. 전돌은 삼국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하며, 이 시기에 전을 사용한 구조물 중 가장 뚜렷한 예는 무령왕릉(武零王陵)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전의 사용범위는 넓어지고 형태와 문양, 제작 수법에서 눈부신 발전을 보인다. 전의 문양은 보상화문(寶相華文)과 연화문(蓮花文)이 주류를 이룬다. 그 외에도 용문(龍文), 누각문(樓閣文), 불상문(佛像文) 등이 있으며 이러한 문양 전돌이 출토된 곳에는 그 당시 전탑(塼塔)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에도 전은 여전히 사용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초기에는 통일신라의 형식을 따르지만 그 후에는 대부분 벽전(壁塼)이다. 문양은 통일신라의 문양이 선을 이용하여 화사한 감을 주는데 반하여 고려 시대의 전은 면을 넓게 살렸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청자 전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전은 사용되었으나 용도나 장식 문양에는 큰 변화가 생긴다. 부전(敷塼)은 거의 사라지고 문루나 담을 쌓는데 이용되지만 이러한 용도로 사용되는 전은 거의 문양이 없다. 즉 이 시기에는 고려 시대까지의 불교적인 색채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형태로의 전환이 확인된다. 영화 9년 명전은 흑회색 경질의 벽돌이다. 태토는 가는 사립이 소량 포함된 점토이며 소성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횡단면은 하단이 넓은 사다리꼴이다. 넓은 한 면에는 사 방향의 승석문(繩蓆文) 타날흔이 남아 있으며 맞은편은 도구를 이용하여 깎기 조정하였다. 폭이 좁은 측면의 한 면에는 둘레에 낮은 돋을 선을 돌리고 그 사이에 ?영화구년삼월십일요동한현토태수령동리묘(永和九年三月十日遼東韓玄?太守領冬利墓)?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영화 9년은 353년에 해당되며 무덤의 주인공인 동리(冬利)는 안악 3호 분의 동수(冬壽)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측상단면에는 돋을선을 돌린 장방형 내부에 마름모꼴의 돋을 선을 각각 3개 돌린 문양이 2개 배치되어 있다. 명문이 새겨진 면의 틈과 결실된 부분은 석회를 이용하여 복원하였다. 이 유물이 출토된 고분은 1932년 평양역구내 공사 중에 발견된 전축 분으로 장방형의 묘실과 연도를 갖춘 단실 무덤 구조로 천정은 무너졌으나 본래는 궁륭상 천정으로 생각된다. 무덤 축조 방식에서 중하단부는 벽돌로 쌓고 상단부는 간돌로 쌓아, 벽돌과 돌 혼합 구조를 보이고 있어 전축 분에서 석실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유물은 이미 도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금제태환이식 2점과 금동투조금구, 철정, 골제품 등이 수습되었다.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으므로 고구려고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 벽돌과 돌이 혼축된 묘의 구조, 고구려식 철촉의 공반, 한태수(韓太守)라는 관직명의 사용 등으로 볼 때 낙랑 멸망 이후 고구려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 확대되면서 종래의 낙랑문화와 고구려 문화가 혼합된 과도기적인 양식이다.
활용설명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공간에도 적절한 소품을 활용하게 되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명문이 남아있는 벽돌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서 인테리어에 활용하였다. 벽돌의 전통과 발달과정도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역사의 한 공간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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