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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물건으로 넘실거렸던 추억 속 '강경'

문화포털 기자단 2017-02-03
사람과 물건으로 넘실거렸던 추억 속 '강경'

- 강경 근대문화유산을 만나다 -


조선 시대 최고의 인문지리서 『택리지』를 저술한 이중환은 강경을 책의 마지막 저술 장소로 선택하였습니다. 그의 고향은 충청남도 공주시였는데요. 그가 마지막 저술장소로 강경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18세기 강경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3대 시장인 ‘강경장’은 전라도와 경기, 충청 등 전국을 아우르는 교역의 중심지로 각지의 모든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이었습니다. 


전라도와 평안도를 돌아보지 못했던 이중환은 강경이 각 지역 사람들이 모여들어 전라도의 정보를 수집하기 좋은 장소라 생각하였는데요. 지역의 정보를 저잣거리와 객주를 찾아 정보를 수집하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강경이 번성한 도시였음을 알 수 있는데요. 각지의 사람들이 강경에 모여 각 지역의 정보가 무궁무진했던 곳이었습니다.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위치한 강경은 바닷가 사람과 산골 사람 누구할 것 없이 고된 삶을 살았지만, 사람들의 미소는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계절 여행지로 안성맞춤인 강경은 풍부한 역사를 지녔음에도 비교적 호젓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어 겨울 가족여행지로 제격입니다. 가장 번성했던 시절, 강경의 근대문화유산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람과 물건으로 넘실거렸던 강경의 문화유산과 풍경은 어떠했을까요?


강경역 앞에 위치한 근대역사문화공간 종합안내도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강경역 앞에 위치한 근대역사문화공간 종합안내도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강경역에 도착하여 역 밖으로 나오면 강경의 근대역사문화공간 종합안내도가 있습니다. 제가 궁금하고, 또 보고 싶었던 문화유산이 있는 곳을 눈으로 먼저 찾아보았습니다. 이번 강경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보면서 총 4가지의 테마로 강경을 만나보았습니다.


사람과 물건으로 넘쳐났던 상업도시로서의 강경과 한옥의 독특한 구조를 가진 예배당, 기독교 한국침례회 최초의 교회터 등 종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강경, 학교에 남아 있는 근대문화유산 등 강경을 이루고 있는 종교, 상업도시, 학교, 옥녀봉과 금강을 함께 아울러 볼 수 있는 근대문화유산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1. ‘사람’과 물건으로 넘쳐났던 상업도시 ‘강경’- 근대역사전시관, 연수당한약방, 구 강경노동조합, 구 한일은행제일지점(강경역사관)

(왼쪽부터) 근대역사전시관(강경제일감리교회) / 연수당한약방 외관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왼쪽부터) 근대역사전시관(강경제일감리교회) / 연수당한약방 외관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먼저 강경역에서 멀지 않은 근대역사전시관으로 향합니다. 강경제일감리교회 내에 있었는데요. 뒷문이 잠겨있어 전화를 해보니 관람을 원하면 교회로 들어가서 문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근대역사전시관은 총 8관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침탈한 과정, 인권유린의 사건들, 독립운동, 근대 상업도시의 강경, 기독교 문화유산과 논산의 강경 등 근대 역사문화의 한 일대기를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상업도시로 발달하면서 강경에는 물건을 교역하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연수당을 비롯하여 남일당·자생당·광제당 등 주변에 약방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행상과 일꾼들로 번잡한 도시였으므로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하기 위한 약재상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연수당 한약방은 담배, 인삼, 약초 등의 물품을 취급하기도 하였습니다. 낡았지만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단아한 모습인데요. 상가이지만 전통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어 멋스러움이 묻어났습니다.   


왼쪽부터) 구 강경노동조합 외관 / 구 한일은행제일지점(강경역사관)에 남아 있는 금고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왼쪽부터) 구 강경노동조합 외관 / 구 한일은행제일지점(강경역사관)에 남아 있는 금고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강경이 과거 상업도시로 발달했던 이유 중 하나는 해안이 아닌 내륙에 있으면서 서해안의 밀물을 이용하여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구조 때문이었습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곡식을 운반하는 배와 각종 수공업 제품과 현재 강경 젓갈이 탄생한 소금을 운반했던 배가 이곳을 통해 쉽게 드나들 수 있어 많은 양의 물건들이 오고 갔던 요충지였습니다. 점점 물건이 많아지고 일제 상인들이 많아지면서, 일본이 주인 노릇을 하고 교역품을 침탈하는 모습에 부당한 대우를 받던 노동자들은 힘을 합쳐 노동조합을 만들었습니다.


어민과 강경 상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성한 노동조합의 성금을 모아 당시로써 굉장한 건물을 짓게 되었고, 많을 때는 조합원의 숫자가 2,000~3,0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노동조합은 당시 상인들에게 중요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었는데요. 2층이었지만 무너지면서 젓갈 창고로 이용하였고, 1층만 현재의 자리로 옮겨 와서 강경역사문화안내소가 되었습니다. 


2. 강경에서 만나는 ‘종교’의 흔적 - 구 강경성결교회, 기독교 침례회의 초가

(왼쪽부터)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 외관 / 기독교 침례회의 초가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왼쪽부터) 구 강경성결교회 예배당 외관 / 기독교 침례회의 초가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강경에는 유독 교회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과거 선교활동이 강경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옥녀봉으로 향하는 길에 한옥의 독특한 구조물로 이루고 있는 교회 예배당을 만나보았습니다. 교회의 건물이 한옥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는데요. 최초 신사참배 거부를 선도했던 현대식의 성결교회와는 대비를 이루고 있어 더욱 궁금한 곳이었습니다. 


교회는 겹처마 양식과 붉은 벽돌로 쌓아 올려 근대 건축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옥 구조로 주변 주택건물 비슷한 눈높이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3·1운동 당시 선교사 존 토마스는 옥녀봉 공원에서 교회를 짓기 위해 대지의 평수를 재고 있는 도중 일본 경찰을 만나 구타를 당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외교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결국 조선을 떠나게 되었고, 이후 1945년 교인들의 힘으로 예배당을 완공하였습니다. 


눈여겨 볼 곳이 있는데요, 출입문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 시대의 유교 문화를 고려하여 남녀가 출입하는 문이 달랐다고 합니다. 기둥 사이에 휘장을 설치해 남녀가 서로 바라보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한옥의 구조와 함께 사회의 문화를 반영하여 우리 민족의 사회현상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옥녀봉 아래에는 기독교 침례회의 첫 예배지였던 초가가 남아 있습니다. 침례교는 개신교의 하나로 신약성서를 근본으로 자발적인 예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교단을 말합니다.


3. ‘학교’에서 만나는 강경의 근대문화 - 구 강경중앙초등학교 강당, 강경공립사업학교 관사, 스승의 날 발원지

(왼쪽부터) 구 강경중앙초등학교 강당 / 강경공립사업학교 관사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왼쪽부터) 구 강경중앙초등학교 강당 / 강경공립사업학교 관사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들 사이로 빨간 벽돌의 근대건축물이 보입니다. 무슨 건물인지 궁금하였는데요. 그곳은 바로 강당이었습니다. 100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강경중앙초등학교는 논산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초등학교입니다. 1937년 6월 30일 개교 30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었으며, 체육관 겸용으로 지은 이 건물은 근대시기 교육시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연구 가치가 높아 현재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아이들이 강당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외관을 고치고 있었는데요. 강경역사관인 구 한일은행 제일지점 역시 공사 중이었습니다. 역사관은 공사 중이지만 내부 관람은 가능하였습니다. 새로운 단장을 하고 있는 근대건축물을 보니 근대문화도시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부산상고, 선린상고와 함께 3대 상고로 유명했던 강경공립상업고등학교는 전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 시인 박용래 등 유명한 인사를 배출한 곳입니다. 1931년 교장의 사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전통가옥의 급한 경사 지붕과 곡선의 멋을 겸비한 독특한 배치구성의 건축물이었는데요. 일본의 날렵한 각을 살린 지붕 끝과 한국의 전통적 선이 어우러진 관사의 모습이었습니다. 처마 아래 또 다른 처마지붕이 있어 이는 일본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건축양식입니다.


(왼쪽부터) 강경여자중고등학교 내 스승의 날 기념탑 / 송재동산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왼쪽부터) 강경여자중고등학교 내 스승의 날 기념탑 / 송재동산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강경여자중고등학교는 스승의 날의 발원지입니다. 1958년 강경여자고등학교 청소년적십자사 학생들이 병환에 계신 선생님을 위한 위문공연과 퇴직하시는 선생님들을 위해 꽃다발을 전달하며 시작된 이 행사는 후배들에게 이어졌고, 1963년 청소년 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 5월 24일 ‘은사의 날’로 정하였습니다. 이듬해 ‘스승의 날’로 이름을 변경하였고 이후 1965년 세종대왕 탄생일인 5월 15일로 날짜가 변경되었습니다. 지금 강경여자중고등학교에 2000년 청소년적십자 단원들이 ‘스승의 날 기념탑’을 세우며 최초 스승의 날이 발원되었던 학생들의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4. 강경의 삶의 자취 지상과 천상의 공간 – 옥녀봉, 금강

옥녀봉에서 바라본 강경시내와 금강의 모습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옥녀봉에서 바라본 강경시내와 금강의 모습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금강은 비단처럼 곱고 우아하게 흐르는 강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전북 장수의 신무산 뜬봉샘에서 시작하여 충청북도 옥천, 영동, 금산을 지나 서해에 다다르는 402km의 강입니다.  


백제의 사비성을 장악하기 위해 당나라 소정방이 금강의 물살을 가르며 향하던 길이기도 한데요. 강경 사람들의 삶의 수로이자 터전이었습니다. 옥녀봉 정상에 올라서면 금강의 아름다운 물결이 한눈에 보입니다. 옥황상제의 딸인 옥녀가 이곳에 왔다가 아름다움에 반해 다시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는 ‘옥녀봉’은 강경산 꼭대기에 있습니다. 


옥녀봉의 진정한 멋은 해가 저문 저녁, 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뜬 밤인데요. 옥녀뿐만 아니라 중국의 시인 이태백 역시 옥녀봉의 아름다움에 반하였습니다. 그가 쓴 ‘월하독작(月下獨酌)’에 옥녀봉 달빛 아래 춤추고 노래하며, 강물에 비친 황홀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다고 말하며 옥녀봉과 금강을 예찬하였습니다.


(왼쪽부터) 2016년 강경 시내 모습 / 1960~70년대 강경의 모습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왼쪽부터) 2016년 강경 시내 모습  / 1960~70년대 강경의 모습 ⓒ 문화포털 기자단 장은진


호남선과 장항선이 개통되면서 수로를 통해 물류를 운반하던 강경은 육로 중심으로 물건이 드나들게 되면서 점점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조그마한 읍으로 조용하고 소박한 도시로 남게 되었는데요. 찬란했던 도시의 모습이 사라져가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그때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문화유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사람과 역사, 삶의 조각이 시간을 지나 하나의 퍼즐을 완성하며 강경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근대문화유산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행지로 강경을 추천합니다. 


* 참고자료

- 논산시 ‘곰삭은 길에서 만나는 추억의 여행 강경’ (E-BOOK)  : http://ebook.nonsan.go.kr/fcatalog/ecatalog.jsp?Dir=526

- 최재희. 『이야기 한국지리』 살림Friends,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