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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으로 읽는 조선 시대

문화포털 기자단 2015-08-13
창덕궁으로 읽는 조선 시대

창덕궁으로 읽는 조선 시대

 

 

창덕궁은 1405, 조선 제3대 태종에 의해 지어진 이궁(離宮)’, 즉 왕이 정사를 보던 정궁(正宮)’ 경복궁과는 별개로 지어진 궁궐입니다. 입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된 후에 가장 먼저 복구될 정도로 오히려 경복궁보다 그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또한, 복구된 이후에는 경복궁이 지니고 있던 정궁의 역할을 이어받아 260여 년 동안 조선의 왕이 거처하며 정사를 보는 궁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침략으로 변형된 적도 있었지만, 조선의 임금들은 항상 본래의 상태로 복구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만큼 창덕궁은 매우 중요한 건축물이고 조선 시대를 관통하는 거대한 상징입니다. 따라서 그 안에 담긴 상징을 통해 조선 시대를 읽을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 문화포털 기자단 배승진
 

 
* 자연을 존중하는 조선

태종은 기존의 정궁인 경복궁을 버리고 창덕궁을 새롭게 건설한 이유로 경복궁의 입지가 풍수적으로 좋지 않아서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태종은 자신이 일으켰던 왕자의 난의 흔적이 남아있는 경복궁으로 가길 꺼렸기 때문에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면서 그 명분으로 풍수를 제시했다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그만큼 조선 시대에는 풍수지리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상은 농민, 양반 그리고 임금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조상의 묏자리부터 궁궐의 위치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게 창덕궁은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았고, 평지에 지어진 경복궁과는 다르게 ‘산중 궁궐’로 계획되게 되었습니다. 
 

 


평지에 지어진 경복궁(좌)과 산지에 지어진 창덕궁(우) ⓒ 국가공간정보통합체계

 
북악산을 뒤로 등지고 있는 창덕궁은 독특하게도 산의 지형대로 건물이 놓였는데, 이는 최대한 자연을 해치지 않는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특히 임금의 침전인 대조전의 경우 지형의 생김새대로 건물이 놓여 서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덕궁은 조금씩 틀어지더라도 궁궐 배치의 원칙을 지킴으로서 ‘원칙’과 ‘자연’의 어울림을 이뤄냈습니다.

먼저 창덕궁은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어야 한다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위해 궐의 뒤로는 북악의 매봉을 두고 앞으로는 금천의 물길을 흐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궁궐이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을 지키기 위해 궁궐의 앞부분은 인정전, 선정전 등 공적인 공간을 설치하고, 뒷부분은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를 설치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궁궐을 아홉 겹으로 둘러싸야 한다는 ‘구중궁궐(九重宮闕)’을 이루기 위해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과 희정당을 겹겹이 둘러싸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게 하였습니다.
 

 
* 강력한 왕권의 조선

익히 알려졌듯 조선은 왕조국가였습니다. 따라서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뒷받침되어야 했고, 이것이 창덕궁의 마당을 통해 상징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창덕궁에 있는 3곳의 핵심적인 마당 ⓒ 국가공간정보통합체계

 
창덕궁에는 상징적 의미가 부여된 핵심적인 마당 3곳이 있습니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1마당, 그곳과 연결된 2마당, 마지막으로 인정전 앞 3마당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중 1 마당은 궁궐 정문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마당으로 내부에는 배산임수를 위해 만든 금천이 흐르고 있고, 흙으로 이루어진 마당 가장자리에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여기저기 서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고 있는 1마당과 단순한 흙바닥인 2마당 ⓒ 문화포털 기자단 배승진

 
그렇게 임금이 다니는 길인 어도를 따라 1마당을 지나면 물도 없고, 나무도 없고 흙바닥과 어도로만 이루어진 2마당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2마당에서 인정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궁궐의 모든 신하와 임금이 모여 정사를 논하던 정전(正殿)인 인정전과 함께 마지막 3마당이 나타납니다. 인정전은 내부는 1층이지만 외부에서 보면 2층 건물로 보이는데, 이는 인정전이 궁궐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공간이기 때문에 외관상 높은 건물로 보이도록 한 것이라고 합니다. 
 

 


높이로 압도되는 인정전 ⓒ 문화포털 기자단 배승진

 
또한 이 마당의 바닥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던 1, 2마당과 달리 ‘박석’이라고 하는 돌로 포장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실용적인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인정전 마당은 사신 접견, 왕실 잔치, 과거 시험 등이 이루어졌던 의식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비가 오더라도 바닥이 질척거리지 않도록 포장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창덕궁의 마당 3곳은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당들의 진정한 의미는 마당을 순서대로 거치며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 알 수 있기도 합니다. 먼저 1 마당을 이루고 있는 금천, 흙바닥, 나무와 같은 자연적 요소가 2마당으로 이어지며 흙바닥만 존재하게 되고, 3마당에 들어서면 모든 자연적 요소가 배제된 인공적인 마당이 되는데, 이는 보는 이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조선의 강력한 왕권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자연을 해치지 않기 위해 궁궐건물마저 비뚤게 지을 만큼 조선 시대에는 자연을 존중하고 신성시했습니다. 하지만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3마당에서는 의도적으로 마당의 자연요소인 흙을 덮고 나무를 베어 인공적인 돌로 대체했는데, 이것을 통해 자연을 다스리고 인공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 왕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품계석과 돌 바닥으로 이루어진 3마당 ⓒ 문화포털 기자단 배승진

 
창덕궁은 수없이 불타고 다시 건설되기를 반복했습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칠 때는 일본에 의해 일본풍 건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창덕궁은 끊임없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고자 노력했고, 그렇게까지 예전 모습을 찾으려는 이유는 그곳에 우리 민족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농경사회였던 조선은 자연을 신성시했고, 이는 창덕궁의 지형에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조사회였던 조선의 모습은 연계된 마당의 상징을 통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만큼 창덕궁은 우리의 역사, 조선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글로 읽는 것과는 다른 느낌의 역사, 우리는 창덕궁에서 조선을 읽을 수 있습니다. 


● 관람 안내 
- 관람 시간
1) 2월~5월, 9월 ~ 10월 / 09:00 ~ 18:00
2) 6월~8월 / 09:00 ~ 18:30
3) 11월~1월 / 09:00 ~ 17:30
※매주 월요일은 휴궁일입니다.

- 교통 안내 
1) 지하철 종로3가역(1, 3, 5호선) 6번 출구로 도보 10분
2) 안국역(3호선)3번 출구 도보5분
3) 버스 간선(파랑) 109, 151, 162, 171, 172, 272 / 지선(초록) 7025

- 홈페이지

 
 
● 참고 자료
박정해, 「창덕궁의 역사적 전개와 전통입지환경」, 「국학연구」, 제 24집, 2014, 396p
김독욱, 유홍준 외 「창덕궁 깊이 읽기」, 글항아리, 2012



- 작성자 : 문화포털 기자단 배승진(글) / 장수영(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