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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엔 ‘남한산성’으로 답사여행가요!

문화포털 기자단 2014-07-16
7월엔 ‘남한산성’으로 답사여행가요!

서울, 경기도 성남시, 하남시, 광주시를 둘러 단단한 병풍처럼 수도를 지켰던 남한산성이 2014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11번째로 등재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은 총 11km의 둘레로 동서남북 4개의 문과 유사시 성안과 성 밖을 적의 눈에 띄지 않게 드나드는 암문 8개,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 목적의 누각인 수어장대, 임금님이 도성 밖으로 행차 시 임시로 머무는 행궁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맑은 날이면 서울과 성남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경치가 좋은 성곽 길,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맑은 공기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어 한여름에도 걷기 상쾌한 숲 속 둘레길이 있어 역사와 여행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때(672년) 최초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역사에서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하게 됩니다. 통일 후 당나라가 우리나라를 지배하고자 하였을 때 주장성이 전쟁 기지의 역할을 하였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인조임금은 이 주장성을 기반으로 남한산성을 짓게 되고, 조선 후기 고종임금까지 남한산성을 보수하였습니다. 따라서 7~19세기 유적이 남한산성에서 골고루 발견되어 축성기술의 발달단계를 잘 보여줍니다. 또 남한산성에는 임금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물렀던 궁궐인 행궁이 함께 만들어졌는데, 이는 다른 행궁과 달리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갖추고 있어 유사시 서울에 있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들이 남한산성으로 이동하여 임시수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던 특징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남한산성은 세계인이 함께 가꾸어나가야 할 우리나라의 11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은 200여 개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하루에 모두 둘러보기는 어렵습니다. 등산하며 유적지를 효과적으로 답사하기 위해서 남문에서 시작해 수어장대를 거쳐 서문, 북문으로 성곽을 따라 돌고 난 후, 내려오는 길에 행궁, 동문으로 향하는 코스를 추천합니다.

 

 

남한산성의 남문

 

 


 남한산성에는 사대문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사람의 출입이 활발한 남문에서 시작해 여행을 시작하면 남한산성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 중 수어장대와 사대문 모두를 하루 안에 볼 수 있습니다. 남문은 조선 시대 정조임금이 지화문(至和門)이라 명명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문은 병자호란으로 인조 임금님이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사용하였습니다/ 출처=기자 직접 촬영

 

 

남한산성에는 성곽 길을 따라 사대문이 있습니다. 그중 남한산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인 남문은 사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합니다. 문은 조선 시대 선조 임금 이전에 만들어진 문으로 정조 3년 성곽을 보수 할 때 지화문(至和門)이라 명명하고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청나라 임금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에 박았던 삼전도의 굴욕이 있었던 병자호란 당시 인조 임금이 피난길에 이 문을 지나 남한산성으로 들어왔던 문입니다. 현재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잦은 문입니다.

 

 

남한산성의 서문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경사가 급하지만 광나루와 송파나루에서 산성을 진입하는 가장 빠른 문입니다. 정조 임금은 이 문을 우익문(右翼門)이라 지었습니다/ 출처=기자 직접 촬영

 

 

 산 아래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서문입니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저 멀리 서울 시내와 성남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 경치가 좋습니다/ 출처=기자 직접 촬영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 산 아래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문입니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저 멀리 서울 시내와 성남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하늘이 맑은 날 성곽 아래로 보이는 모습이 경치가 좋은 곳입니다. 정조 임금은 이 문을 우익문(右翼門)이라 지었습니다. 경사가 급하지만, 광나루와 송파나루에서 산성을 진입하는 가장 빠른 문입니다.

 

 

 

남한산성의 북문

 

 

 

 남한산성의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기습공격을 했던 문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따라 우리나라 군사 300여명이 문을 열고 청나라군을 공격했지만, 청나라 군대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법화골 전투'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습니다/ 출처=기자 직접 촬영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기습공격을 했던 문입니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따라 군사 300여 명이 문을 열고 청나라군을 공격했지만, 청나라 군대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법화골 전투’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습니다. 싸움에서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戰勝門)이라 쓴 현판이 남아 있습니다.

 

 

 

남한산성의 동문

 

 


 남한산성의 북문, 남문, 서문은 산의 지형을 따라 등산을 해야 찾을 수 있는 문입니다. 세 곳의 문과 달리 동문은 차가 다니는 길가 한가운데 있어 등산하지 않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문입니다. 비교적 지대가 낮은 곳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동문은 성벽으로써 방어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계단을 높이 쌓아 올렸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동문은 좌측이 되므로 문의 이름을 좌익문(左翼門)이라 불렀습니다/ 출처=기자 직접 촬영

 

성의 남동쪽에 위치한 동문은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이용되었던 문입니다. 다른 세 곳의 문과 가장 동떨어진 위치에 있는 동문은 비교적 낮은 지대에 있고, 계곡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임금님이 궁궐을 나와 잠시 머물렀던 장소인 행궁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국정을 살피니 동문이 좌측이 되므로 문의 이름은 좌익문(左翼門)이라 불렀습니다. 현재 동문 옆으로는 차가 다니는 큰 길이 있고, 사대문 중 가장 낮은 곳에 있어 방어를 위한 성곽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 계단을 높이 쌓아 올린 모습입니다.

 

 

 

수어장대

 

 


 남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입니다. 이곳은 지위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의 누각으로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출처=기자 직접 촬영

 

남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입니다. 이곳은 지위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의 누각으로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임금은 청나라 왕에게 고개를 땅에 박고 절을 했던 '삼전도의 굴욕'의 시련을 겪으며 군신 관계를 맺어야만 했었습니다. 전쟁 후, 소현세자, 봉림대군, 3학자는 청나라 인질로 8년간 잡혀가게 됩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고, 봉림대군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주장하게 됩니다. 결국, 봉림대군은 효종임금이 되어 남한산성을 재정비하고 북벌을 준비하지만, 임금이 된 지 10년 만에 돌아가시게 되어 북벌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수어장대 2층 내부에는 ‘무망루’(無忘樓)라는 현판이 있습니다. 이는 영조임금이 지은 현판으로 굴욕적인 시기를 지내며 북벌을 준비했던 효종임금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행궁

 

 


 행궁은 임금님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입니다. 남한산성행궁은 전쟁 등 유사시를 대비한 피난처로 인조 2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싸웠습니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좌전)과 사직(우실)이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 임시수도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출처=기자 직접 촬영

 

행궁은 임금님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합니다. 남한산성행궁은 전쟁 등 유사시 한양 도성의 궁궐을 대신할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인조 2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싸웠습니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임금이 여주와 이천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남한산성행궁은 종묘(좌전)과 사직(우실)이 있는 유일한 행궁으로 유사시에 임시수도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이전에도 많은 사람이 찾는 문화재이자 등산코스였습니다. 올해 문화유산 등재 이후에는 우리뿐 아니라 세계인들과 함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할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한층 발돋움하였습니다. 이에 문화유산을 돌아보고, 모두 함께 가꾸어 나가야 할 장소로 7월에는 남한산성으로의 답사여행을 추천합니다.

 

 

※능행길

용어풀이) 전쟁이나 재난 등 유사시 혹은 왕이 서울의 궁궐을 떠날 일이 생겨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행사를 말합니다.

 

종묘

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追尊)(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왕의 칭호를 올리는 것을 말합니다.)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가의 사당으로 궁궐의 동쪽에 위치합니다.

 

사직

조선 시대 백성은 땅과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사직은 풍흉과 국가의 운명을 관장한다고 믿어 나라를 창건한 자는 제일 먼저 왕가의 선조를 받드는 종묘(宗廟)와 더불어 사직단을 지어서 백성을 위하여 사직에게 복을 비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궁궐의 서쪽에 위치합니다.

 

 

 

기타정보

 

[남한산성 홈페이지] www.namhansansung.or.kr

[문의전화] 031- 743- 6610

[찾아가기] 대중교통 지하철 8호선 산성역 1번 출구 52번 버스로 이동

[남한산성 주소]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31(산성리 158-1)

[남한산성 행궁 홈페이지] www.ggnhss.or.kr

[문의전화] 031- 777- 7500

[관람시간] 4월~10월 오전 10:00 ~ 오후 18:00

                11월~3월 오전 10:00 ~ 오후 17:00

[정기휴일] 매주 월요일

[관람요금]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