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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94, 그 후 20년?

문화포털 기자단 2014-12-09
응답하라 1994, 그 후 20년?

추억이라는 이름이 가진 피사체는 어떤 형태일까요? 어떤 이에게는 아련함, 또 다른 이에게는 가슴 저미는 아픔일 수도 있겠죠. 그 당시는 참을 수 없는 시간이었겠지만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뒤돌아보면 '그래 그랬었지.' 하면서 잠시 미소가 지어지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이었기에 가능한 미소라 생각됩니다.


여러분에게 1994년은 어떻게 남아 있나요?


저는 94학번입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최초로 시행되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봤었죠. 고3 수험생에게 대학수학능력시험 두 번은 스트레스를 한 아름 안겨주었습니다. 교복을 벗고 입학한 대학교. 새내기란 이름을 들으며 동아리 방을 전전했습니다. 어떤 동아리를 들어갈까?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많이 했었네요. 그렇게 94학번의 새내기 생활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향수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곳이 찾아가 봤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응답하라 1994, 그 후 20년'이라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1994년 문제집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이 당시 학생들이면 누구나 풀어봤던 '수학의 정석' 정말 수학교과서보다 더 많이 봤던 문제집이 정석이었습니다. 때론 저 저자분이 미워지기도 했습니다. '왜 이런 문제집을 만들어서 나를 괴롭히나!'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1994년도 수학능력시험 수험표 1, 2차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1993년 겨울. 모든 고3 수험생들이 199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았습니다. 1차는 여름에 2차는 가을에 시험을 치렀습니다. 여름에 보는 수능! 좀 이상하죠? 처음 시행하는 제도라 두 번에 걸쳐서 봤었지만, 1, 2차 시험의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달랐습니다. 2차 시험을 보고는 다들 실망하는 분위기였으니까요.



1990년대 교과서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낡은 모습의 교과서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깨끗한 교과서를 받죠. 한 해를 쓰고 나면 책 귀퉁이가 헤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추억처럼 이렇게 바래지나 봅니다. 학교에 다닐 때는 교과서를 읽고 또 읽어도 시험이 무엇이 나올지 몰랐는데, 지금도 모르겠네요.



1990년대 당시의 화폐와 전철 승차권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90년대에는 지금처럼 교통카드가 없었습니다. 버스는 종이로 된 회수권, 지하철은 정액권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지하철 정액권이 있지만, 환승을 위해 많은 분이 교통카드를 사용하죠. 정액권을 잃어버리면 정말 난감했습니다. 아~ 한 달 차비를 이렇게 잃어버리는구나~ 하면서 부모님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도 했었거든요.



드라마 응답하라 1994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고3 수험생이 대학을 진학하면 정말 재미있는 생활이 펼쳐지리란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랑이 꽃피는 나무'와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드라마의 영향이었겠죠.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나니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쌀쌀한 3월이 지나면서 학교에는 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꽃비 떨어지는 교정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보며 미소 지을 수 있었습니다. 학내에서는 3월이면 등록금 문제로 집회가 열렸었죠. 물론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새내기에게 프로테스탄트적인 사명감은 없었을지 몰라도, 사회적인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처음 본 중! 간! 고! 사! 아~ 8절지를 가득 써 놓고도 무슨 말을 썼는지 기억도 나지 않더군요. 중간고사 이후 성적공고를 보며 단행한 수! 강! 포! 기! 친구들과 한잔 하면서 교수님을 원망했던 시기였습니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첫 MT를 갔습니다. 춘천 쪽이었는데 한참 걸었던 기억이 나네요. 여러 게임과 한바탕 술자리 후 맞은 아침은 '이제 이 사람들이 가족인가?'하는 의구심을 들게 하였습니다. 나름 꾸민다고 화장을 했던 여자 동기들의 모습. 퉁퉁 부운 얼굴에 허스키한 목소리로 '창일아 물 좀'하던 모습. 그래 너도 사람이었지? 물통을 던져주고 방을 나오니 상쾌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게 함정이었죠. 선배 왈~ '나갔으니 라면 끓여라' 음... 네~ 선배들이 방에서 나오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었군요.



드라마 마지막 승부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94년도의 대표적인 드라마 중 '마지막 승부'가 있었습니다. 다소 반항적인 이미지로 나온 장동건. 그리고 남자들의 연인이었던 심은하. 친구들과 농구를 하면서 마지막 승부처럼 대사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화룡점정은 CC인 친구가 자신의 여자친구에 했던 말, '다슬아 물' 아나~ 농구는 그대로 끝이 났었습니다.


94년 대표적인 드라마는 '서울의 달', '마지막 승부', '사랑을 그대 품안에', '종합병원' ,'M'등 이었습니다. 시청률이 평균 40% 이상 나왔던 드라마였죠. 가요는 김건모의 핑계, 김민교 마지막승부', 마로니에 '칵테일 사랑', 투투 '일과 이분의 일', 김원준 '너없는 동안', 신승훈 '그 후로 오랫동안'이 이 당시 가장 유명한 가요프로그램인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를 했던 노래입니다. 대부분 남학생은 강수지에 열광을 했지만 아쉽게 5주 연속 1위는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90년대 당시 인기 있었던 가수들의 TAPE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요즘은 음원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죠. 스마트 폰의 보급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90년에는 LP와 카세트 TAPE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TAPE이 늘어질 때까지 들어서 재생이 안 되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나오면 재빨리 녹음 버튼을 누르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DJ가 전주나 간주 중에 말을 하면 왜 그리 미웠던지. 지우고 새로 녹음하는 경우가 많았었죠.



서태지와 아이들 LP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김현식 LP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문화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신인 시절이었을 때, 가수와 문화평론가 몇 분이 노래를 듣고 그리 좋게 평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방송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의 인기는 정말 나날이 달라졌습니다.


90년대를 풍미했던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얼마 전 고인이 된 신해철. 한 음악 평론가는 90년대 서태지가 패배자 정서를 노래했다면 신해철은 나그네 정서를 노래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패배자'와 '나그네' 1등을 만을 강요했던 시대적인 정서에서 우리를 위로해준 음악가였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 영화 VIDEO TAPE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TV에서 버튼만 누르면 영화를 선택해서 볼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90년에는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습니다. 인기 있던 영화는 예약해야만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번 빌리면 여러 명이 함께 같이 보기도 하고, 몇 번이고 재생해서 보았습니다. 빨리감기와 되감기를 누르면서 감명 깊은 장면을 다시 보고 했죠. 비디오가 잘 안 나오면 클린테이프에 약을 발라서 한 번 돌려주면 비디오 헤드 청소가 되어 다시 맑은~ 화면이 이 재생이 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90년대 통신 수단이었던 삐삐와 휴대폰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지금은 개개인이 휴대폰이 있죠. 언제 어디서나 전화를 하고 카톡을 하면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속을 더 지키지 않나 봅니다. 집 전화만 있었던 시기에는 약속을 하면 어떻게든 나갔어야 했습니다. 중간에 일이 생겨서 시간이 없더라도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 약속 장소로 가야만 했습니다.


개인 휴대용 삐삐가 보급되면서 연락을 주고받기 더 편해졌죠. 메시지를 녹음하면 공중전화로 달려가 음성 메시지를 확인했고, 연락받을 전화번호 대신 숫자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빨리 오라고 8282(빨리빨리), 연인끼리는 101023535(열렬히 사모사모), 친구끼리 1092 (씹탱구리) 등 회신할 전화번호 대신 번호로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플로피 디스크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지금이야 USB 메모리 또는 Cloud로 파일과 사진, 영상 등을 저장했지만, 90년에는 플로피 디스크가 유일한 저장 수단이었습니다. 5.25인치와 3.5인치를 이용해 파일을 저장했습니다. 한글 3.5 기억나시나요? 파란 화면에 흰 커서가 껌뻑이면서 리포트를 작성하던 시절. 인쇄를 걸면 도트 프린터에서 굉음을 내며 인쇄가 되었습니다. 저 당시 8메가 디스크는 그야말로 큰 화제였습니다.



타임캡슐 ⓒ 문화포털 기자단 김창일


90년대에 타임캡슐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게 뭐야? 지금 쓰는 물건을 왜 담아?'라고 생각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타임캡슐에 있는 물건은 정말 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물건이 발명되기도 했지만, 우리의 편리에 따라서 없어지기도 했으리라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일이네요. 데칼코마니처럼 제 인생을 반으로 접는다면 20살이 그 중간 지점입니다. 나름 꿈도 많고 열정도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몸만 컸지 마음은 크지 못했던 때였습니다. 하나둘 말하기보단 이젠 가슴에 묻는 말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향수라고 하여 특정한 향을 발산하지는 않나 봅니다. 향은 없지만, 기억 속에 남은 향수가 불현듯 꿈틀거리는 장소였습니다. 전시실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자그마한 공간입니다. 하지만 향수를 불러내는데 장소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향수 그 자체가 저의 마음을 크게 부풀렸으니까요.






전시회명 : 응답하라 1994, 그 후 20년

전시기간 : 2014년 10월 29일부터 2015년 2월 22까지

전시장소 : 서울역사박물관 기증유물전시실 제2실

관람료 :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