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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교향악단

개요
서울시교향악단은 1945년 계정식, 현제명, 김성태를 중심으로 설립된 고려교향악단을 전신으로 탄생되었다. 고려교향악단은 수도극장(현 스카라극장)에서 계정식의 지휘로 창단연주회를 가졌는데 연주곡목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이었다. 그러나 그 후 고려교향악단은 재정난으로 해단되고 말았다. 1948년, 몇 개월의 침묵을 깨고 김생려를 중심으로 전 고려교향악단 단원 40여 명과 서울관현악단을 모체로 하여 서울교향악단이 발족되었다. 하지만 1950년, 6·25 동란이 발발하면서 악기와 악보가 소실되고 단원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등 다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상당수의 단원들이 이북으로 납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해군 당국의 주선으로 1950년 11월 해군정훈음악대로 모습을 재정비하여 시공관에서 제1회 정기연주회를 개최하였고 1954년에 해군교향악단으로 개칭되었다. 1957년 드디어 김생려를 상임지휘자로 위촉하면서 현재의 서울시교향악단이 발족되었다. 이후 김만복(1962~1969), 원경수(1970~1971), 정재동(1974~1990), 박은성(1991~1992)에 이어 1994년 다시 원경수(1994~1996)가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세계로 그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는 서울시향은 1982년 미국 서부지역 순회 연주, 1986년 미국 5개 도시 순회, 1988년 유럽 16개 도시 순회, 1996년 아틀란타올림픽 축하공연 등 한국의 음악적 수준을 서양 음악의 본고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1999년 7월 세종문화회관이 재단법인으로 출범하면서 지휘자 정치용을 단장으로 영입하고 2000년 5월에는 세계적인 지휘자 마크 에름레르(볼쇼이 음악감독)를 상임지휘자로 영입했다. 화려한 음색과 정확한 음감, 절묘한 앙상블을 자랑하며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레퍼토리를 폭넓게 소화해내는 서울시향은 국내 최장의 역사를 바탕으로 세계 무대를 향해 더욱더 정진하고 있다
규모
- 상근단원 수: 110명 - 상근직원 수: 6명
연간 연주횟수
- 총 60여 회
활동내역
1948년 제1회 정기연주회 1955년 제31회 정기연주회 1956년 제1회 소년소녀를 위한 협주곡의 밤 1957년 제64회 정기연주회 1958년 제68회 정기연주회 1959년 제79회 정기연주회 1960년 제84회 정기연주회 1961년 제90회 정기연주회 1962년 제100회 정기연주회 1963년 제103회 정기연주회 1964년 제111회 정기연주회 1966년 제129회 정기연주회 1969년 제158회 정기연주회 1970년 제160회 정기연주회 1971년 제167회 정기연주회 1973년 제187회 정기연주회 1975년 제207회 정기연주회 1977년 제226회 정기연주회 1979년 제239회 정기연주회 1981년 특별연주회 1981년 제267회 정기연주회 1982년 제274회 정기연주회 / 미국순회연주 1983년 제290회 정기연주회 ‘범세대 연주회’ 제299회 정기연주회 ‘팝스콘서트’ 제306회 정기연주회 1984년 제313~320회 정기연주회 1985년 제327회 정기연주회 1986년 미국순회연주 / 제353회 정기연주회 1988년 유럽순회연주 / 팝스콘서트 / 제384회 정기연주회 1991년 제444~454회 정기연주회 1993년 제478회 정기연주회 ‘한중수교기념 특별연주회’ 1994년 제500~508회 정기연주회 1995년 제526~534회 정기연주회 1996년 서울환경음악제 / 제546회 정기연주회 1997년 제559회 정기연주회 1998년 제561회 정기연주회 1999년 제578~587회 2000년 제592~593회 정기연주회 2001년 제600~606회 정기연주회 2002년 제614회 정기연주회 / 고베시 초청연주 2003년 특별연주회 2004년 제539회 정기연주회 / 특별연주회 김생려(金生麗, 1948~1961) 서울시향 창단의 주역인 김생려는 조선 기독교대학에서 레오폴드 아우어의 제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투룩테른 베르그를 사사하였다. 그리고 해방과 함께 서울시향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고려교향악단의 창단 멤버인 동시에 총무로 활동하다가 1948년 재정 문제가 심각하던 고려교향악단을 나와 서울교향악단을 창단하였다. 지휘자로서의 정식 교육은 비교적 늦게 시작하여 당시 문정관으로 파견되어 지휘를 맡고있던 롤프 자코비를 사사하고 탱글우드음악페스티발에 참가하여 탱글우드심포니와 필라델피아심포니를 지휘하게 되었다. 당시 그를 지도한 샤를르 뮌쉬가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이며 그는 분명히 지휘의 테크닉을 움켜잡은 지휘자이다”라고 평가할 정도로 김생려는 재주많은 지휘자였다. 그가 창단한 서울교향악단은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해군정훈음악대로 이관된 후 1957년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재창단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우리의 교향악 역사 가운데 그의 선구자적인 노력은 빠트릴 수 없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재동(鄭載東, 1947~1990) 1971년 서울시향의 전임지휘자로 인연을 맺은 정재동은 1974년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1990년까지 일하면서 서울시향이 근대적인 교향악단으로 발돋움하게 한 주역이다.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보스톤의 뉴잉글랜드콘서바토리 지휘과를 졸업한 그는 루지에로 리치, 이작 펄만, 모리스 장드롱, 피에르 푸르니에, 배리 터크웰 등 세계 정상의 거장들과 협연을 하고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1988년 국내 교향악단 사상 최초로 유럽 순회공연을 성사시켜 서울시향을 음악의 본고장에 소개하고 ‘동유럽의 1급 교향악단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게 한 장본인이다. 그의 재임기간 중 서울시향은 서울시 산하단체라는 경직된 체제 하에서도 ‘팝스콘서트’, ‘범세대 연주회’와 같은 개혁적인 프로그램을 추진할 수 있도록 강한 리더쉽을 발휘한 지휘자이다. 한양대학교를 거처 중앙대학교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였다. 팸플릿
리뷰
(……)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울시향의 역사는 바로 우리나라 교향악 역사이자 관현악 운동의 역사이다.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55년의 서울시향사를 통해 무엇보다도 그토록 척박한 시기에 음악하나만을 고집해온 초창기 음악인들의 자기희생과 소명의식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는 거친 들판에 피어나는 한 포기의 풀처럼 매우 열악한 시대적·사회적 환경 속에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묵묵히 지켜온 분들이 있어 오늘의 교향악단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서울시향은 연주횟수에서나 기량에서나 우리 교향악단의 역사를 해방과 더불어 선두에서 이끌어 오며 정기연주회와 특별연주회를 포함한 연주실적뿐만 아니라 국내 창작곡의 기록적인 초연횟수를 남긴 교향악단이다. 그러나 서울시향은 이렇듯 화려한 경력과 더불어 오랫동안 관(官)주도의 경직된 행정체계와 예산 부족, 전문인력의 부족 등으로 몸살을 앓아왔다. 턱없이 적은 교향악단의 예산과 더불어 교향악단 예산 중 인건비가 90%가 넘는 상태에서 공연제작비나 외국의 유사한 지휘자나 음악인들의 지휘료나 협연료의 책정은 매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면 레퍼토리는 반복되게 되고 교향악단의 운영은 계속 악순환을 겪게 되고 만다. 한국에 50여 개가 넘는 교향악단이 존재하며 지금도 계속해서 많은 시에서 활발하게 교향악 운동이 확대되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정부의 문화지원정책이 급격히 변화되는 상황에 맞춰 패러다임을 바꿔야 할 때이다. 정치, 행정, 경제계나 일반사회가 문화·예술 특히 음악 따위에는 바쁘지 않다는 인식에서 뒷전으로 미루고 정부 예산심의의 첫 번째 삭감 대상으로 삼는 풍토에서는 교향악단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세계의 우수한 교향악단 중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 없이 명성을 얻은 악단은 없을 것이다. 빈필하모닉, 베를린필하모닉, 뉴욕필하모닉에 대한 각 도시민들의 긍지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그들의 교향악단에 대한 절대적인 자부심은 음악을 넘어 자기나라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전환된다. 우리도 서울시민의 긍지를 심어줄 수 있는 서울시교향악단의 위상설립에 큰 관심을 보여야 하리라 본다. 1999년 세종문화회관이 재단법인으로 새롭게 출발함으로써 공연예술부 산하에 예술단 지원팀이 있어 서울시교향악단 등 소속 9개 예술단체의 운영과 공연을 담당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서울시향은 기회담당 2인이 주업무를 보고 있다. 이는 뉴욕필하모닉의 사무국 인원이 73여 명으로 구성되어 기금, 공연기획, 홍보, 회원관리, 단원관리, 회계 등의 10개 파트로 나뉘어져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는 경우와 비교한다면 서울시향으로는 서울시향의 홍보와 실적의 부진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전문인으로 구성된 판촉부와 홍보, 기획을 조직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서울시향의 사무국의 구성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라고 서울시향의 기획실장인 오병권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교향악단의 운영구조에 대한 문제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거론되어 왔다. 서울시향에 소속되어 1983년~1984년에 수석 더블베이스주자로 연주활동을 해왔던 안토니 셀바는 한국 교향악단의 문제점 중 한국 교향악단의 경영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지극히 비생산적이고 불합리한 경영구조를 들 수 있다. 이상적인 오케스트라에서는 흔히 상임지휘자가 음악감독을 겸하며, 프로그램은 물론 초청자 선택까지의 예술적인 사무를 맡고 제네럴 매니저(general manager)가 모금을 비롯한 대외활동을 한다. 또 연주자 개개인의 매니저와 무대 매니저, 악기 매니저 등 수많은 사람들이 보다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 힘쓰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교향악단에서는 업무의 책임한계가 분명치 않고 소규모 교향악단에서는 지휘자가 모든 업무를 맡아보고 책임을 진다.” 위의 글은 1980년대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교향악단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종문화회관은 그동안 관(官)주도하에 연주지원업무의 전문성이 결여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서울시향의 기획·홍보·집행하는 연주지원 전문요원의 부족으로 공연기획부터 홍보·티켓판매의 큰 어려움을 겪어 왔다. 2001년 지금까지도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현재 3인의 인력구성으로는 교육프로그램 개발이나 정기회원의 관리와 확충, 체계적인 홍보전략과 같이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들은 역부족이 아닐 수 없다. 기존회원이나 관객들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은 새로운 관객을 확보하는데 드는 비용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데이터베이스화된 조직적인 정기회원들의 관리, 휴면고객들의 활성화, 인터넷 마케팅을 통한 보다 적극적인 홍보와 티켓판매는 상당한 고객층을 창출시킬 수 있으리라 본다. 따라서 전문인력으로 구성된 사무국설치와 같은 근본적인 개혁, 그리고 합리적인 행정과 운영의 개선 없이는 튼튼한 세계적 교향악단으로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서울시향은 올해 별도의 재단법인체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미 재단법인에 즈음하여 세종문화회관은 1998년 16.2%에 불과했던 재정자립도를 1999년 26.1%로 껑충 뛰어 올렸고 계속적으로 재정자립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한 기업과 정부의 공연단체에 대한 지원 풍토와 교향악단의 운영·기획조건이 열악한 국내에서 서울시향이 별도의 법인화체제를 구축하여 보다 앞서가는 운영시스템과 적극적인 마케팅, 타 교향악단들의 모델이 되고 있는 교육프로그램의 개발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악단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자치단체의 적극적인 투자와 지원, 오케스트라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단원들의 기본적 생활의 안정, 최고의 앙상블을 위한 단원들의 철저한 예술적 신념,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교향악단의 운영 등이 갖춰질 때 서울시향은 대형 국제도시인 서울시를 대표하는 위상과 함께 서울시민들의 사랑과 긍지를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다. “예술은 전쟁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안에 쏟아부어야 한다”는 반 고흐의 말의 의미를 되새기며 한국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케스트라로서 21세기를 주도하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한국교향악단의 선도-서울시교향악단의 어제와 오늘’, 박옥진, <세종문화회관 전사>, 세종문화회관, 2002년 (……)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면 고려교향악단에서 서울교향악단, 다시 해군정훈음악대와 해군교향악단을 거쳐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이어지는 큰 줄기를 하나의 역사 속에 묶는 데는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1957년, 김생려가 초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후 1961년 김만복에게 상임지휘자를 물려줄 때까지, 그러니까 김생려 시대는 말할 것도 없이 서울시향의 초창기라 할 수 있으며 이 시기에 서울시향은 오케스트라가 무엇인지, 오케스트라의 역할은 어떤 것인지를 한국에 알리는 일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젊은 연주가들을 발굴하는 청소년 프로그램도 개발해 자라나는 영재들에게 협연 무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지금의 서울시향을 있게 한 한국 오케스트라 운동의 선구자 김생려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해야하며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보내야 하겠다. 1949년에 발간된 <필하모니>라는 음악지를 보면 오케스트라 운동에 대한 좌담이 실려있는데 고려교향악단으로부터 서울교향악단으로 이어지는 초창기의 활동에서도 김생려는 언제나 중심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시교향악단의 뿌리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문제는 생각의 차이가 있겠지만 서울시립교향악단이라는 정식명칭을 가지고 출발한 1957년 8월 1일 이전에도 이름은 다르지만 오케스트라로서의 줄기가 끊기지 않고 이어져 옴으로서 광복후인 1945년, 한국 최초로 결성된 고려교향악단의 창립을 출발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오케스트라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서울시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은 똑같이 고려교향악단을 뿌리로 하고 있으며 초창기에 오케스트라 운동에 참여하면서 전문지휘자로 활동한 김생려와 임원식에 의해 양대 교향악단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김생려에 이어 제2대 지휘자로 취임한 김만복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외국에서 지휘를 전공한 전문 지휘자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전문 레퍼토리 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시기를 시향의 제2기라고 말할 수 있는데 김만복은 시비가 엇갈리는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레퍼터리의 개발에 힘써 많은 작품을 한국 초연했고 한편으로는 한국의 창작곡도 무대에 올려 창작 활성화에 이바지했다. 1962년, 100회 연주는 김만복 지휘로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가 한국 초연되었고 이 시기에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르슈카>, 말러의 교향곡 4번, 그리고 베토벤의 <장엄미사>, <3중 협주곡> 등도 초연되었다. 1970년 3대 지휘자로 원경수가 취임했으나 2년만에 사임했고 1974년 4대 지휘자로 정재동이 무대에 서면서 서울시향의 제3기, 도약과 안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975년에는 4관 편성으로 확대되면서 200회 정기공연을 가졌고 동남아와 미국 순회공연 등 서울시향을 국제 무대에 알리는 프로그램들이 추진되었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이 개관되면서 시향의 운영 주체도 서울시문화공보관실에서 세종문화회관으로 이관되었고 미국과 유럽의 순회공연을 통해 한국 교향악운동의 모습을 더욱 뚜렷이 보여주었다. 정재동이 상임지휘자로 있었던 1974년부터 1990년까지 서울시향은 전 단원의 오디션 실시를 비롯한 질적 향상에 심혈을 기울였고 400회 정기공연도 정재동 시대에 이루어졌다. 특히 1983년 300회 공연은 시향의 역대 지휘자를 한자리에 세워 김생려, 김만복, 원경수, 정재동이 차례로 지휘대에 섬으로써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한 지휘자와 너무 오랜 기간을 함께 하다 보니 정신적 해이가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지휘자의 예술적 기량과 인간적 포용력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지휘자의 영입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5대 지휘자로 박은성이 2년, 6대 지휘자로 다시 원경수도 2년 그리고 그 사이에도 상임지휘자 없이 시간을 허비함으로써 서울시향의 음악적 표류가 계속되었다. 다만 1994년, 500회 정기 공연에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82세의 노지휘자 김생려를 다시 초빙하고 1957년 당시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서울시향과 협연, 데뷔 무대를 가진 피아니스트 백건우를 역시 한 무대에 세워 37년만에 다시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케 함으로써 감격적인 경험을 나눌 수 있었다. 6대 지휘자 원경수가 사임하고 젊은 지휘자 정치용과 장윤성을 전임지휘자로 해서 두 사람이 시향을 이끌기도 했지만 1999년 7월, 서울시 산하의 세종문화회관이 재단법인으로 바뀌면서 민간시대의 새로운 문을 열게 되었다. 재정적인 문제를 비롯해 운신의 폭이 넓어진 세종문화회관은 서울시립교향악단이라는 이름에서 ‘립’자를 뺀 서울시교향악단이라는 새 이름으로 출발하면서 정치용을 단장 겸 지휘자로 선임했고 2000년 5월에는 러시아 볼쇼이극장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겸 예술감독인 마르크 에름레르를 상임지휘자로 초빙함으로써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다시피 숨가쁘게 새로운 기회를 마음껏 누려야 할 시기에 노사문제로 인한 충돌은 또다시 긴 어두움으로 다가왔고 시민과 함께 음악적 즐거움을 나누어야 할 예술집단이 시민으로부터 외면당하는 불행을 맛보아야 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사람들의 모습이 제각각이듯이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질 높은 예술집단으로, 시민의 사랑받는 교향악단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욕심없는 진실함이 앞선다면 바람직한 예술집단으로 우뚝 서는 데 어떤 장애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긴 어둠의 터널도 지나고 21세기의 첫해에 한국에서는 최초로 600회 정기공연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어려운 가운데에서 마르크 에름레르를 상임으로 초빙했다. 앞뒤를 생각해도 지금이 분명 변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이며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또다시 어둠의 터널을 지날 수밖에 없다. 서울시교향악단 창단 55년 그리고 600회 정기 공연의 시점에서 지난 날을 회고할 때 감격과 감동의 역사가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제 한 단계를 뛰어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오케스트라로 거듭나는 눈물겨운 변신을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이다. - ‘서울시향의 어제와 오늘’, 한상우, <서울시교향악단 제600회 정기연주회 프로그램>, 2001년 2월
연계정보
-김생려(金生麗)
-서울시립소년소녀합창단
-서울시립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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