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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님이

작품명
정님이
저자
이시영(李時英)
구분
1970년대
저자
이시영(李時英, 1949~ ) 1949년 8월 6일 전남 구례 출생. 1972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주간시민> 기자와 고교 교사를 거쳐 <창작과비평> 주간을 역임한 바 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부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수(繡)>가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 <채탄> 외 1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1969년 7월 시조 <소금>으로 문화공보부예술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이후 그는 사회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청원 지지를 시작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6년 첫 시집 <만월>을 낸 이후, <바람 속으로>(1986), <길은 멀다 친구여>(1988), <피뢰침과 심장>(1989), <이슬 맺힌 노래>(1991), <사이>(1996), <조용한 푸른 하늘>(1997) 등을 간행하였다. 그의 시는 대체로 민중적 현실에 바탕을 둔 현실 비판의 목소리가 주조를 이룬다. 1970년대의 폭압적 정치 상황에 저항하던 민중들의 삶과 사상을 서사적 골격의 이야기시로 다듬어 냄으로써 리얼리즘시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짧은 서정시를 통하여 민중들의 사랑과 희망을 노래함으로써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새롭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리뷰
이시영의 시는 깊이 아프고 슬프게 아름답다. 그의 시에는 분단시대 아픔의 역사를 고단하게 살아온 이 땅 민중의 아픈 숨결이 출렁이고 있는가 하면 그러한 아픔이 예술적인 형상성으로 고양돼 있기 때문이다. 첫 시집 <만월(滿月)>(1976)로부터 근작시집 <무늬>(1995)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 세계는 역사성과 예술성, 서사성과 서정성이 끊임없이 갈등과 화해, 극복과 고양의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전개돼 있다. 분단 후 이 땅의 시가 일방적으로 이른바 순수주의와 전체주의 대항논리에 함몰되거나 경시되어 왔기에 이러한 이시영의 변증법적 극복과 고양의 노력은 의미를 지니기에 충분하다. (……) 그의 시가 기본적인 면에서 역사성과 예술성, 개인의식과 공동체의식, 개성과 보편성, 장시와 짧은 시라는 상대성을 가치축으로 하여 전개돼 왔기에 그의 시는 내면지향성과 외부지향성의 두 가지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시 <나의 노래>, <노래>, <무늬> 등이 내면지향성을, <후꾸도>, <정님이>, <서울행>, <형제들을 위하여> 등이 외향성을, 그리고 <어머니>, <고개>, <편지> 등이 그 중간쯤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 한편 이야기시형으로 전개되는 외향성의 시들은 대부분이 서사성을 기반으로 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후꾸도>나 <정님이> 등의 시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 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싯푸른 사과들/ 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 어릴 적 우리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 후꾸도가 아닐는지 몰라/ … 중략 …/ 칭얼대는 네댓 살짜리 계집애를 업고/ 하염없이 좌판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사내/ 그리움에 언뜻 다가서려고 하면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자를 눌러쓰고/ 이내 좌판에 달라붙어/ 사과를 뒤적거리는 사내’라고 하는 시 <후꾸도>는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에서 이용악의 <낡은 집>을 거쳐 김지하의 <오적>이나 고은의 <백두산>, <만인보>로 이어지는 이 땅 서사성의 시들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사회적, 역사적 응전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민족문학의 범주로 묶어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이시영의 이야기들은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화소들이 근본적으로 객관적 상관물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서사적이라기보다는 서정적이라 할 수 있다. 외면적으로 그의 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땅의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고 그렇게 만든 구조적 모순에 대한 분노이지만, 궁극적인 면에서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며 그러기에 인간의 원형적인 존재상이라는 인식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의 시가 단순한 선동 선전시로 떨어지거나 관념적인 민중시로 함몰되지 않고 깊은 슬픔을 매개하면서 미적 긴장을 확신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된다. 과거와 현재를 투시적으로 교직하면서 너와 내가 결국은 하나이며 하나일 수밖에 없고 또 하나이어야만 한다는 인간 공동체의식 혹은 진정한 역사의식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시영의 시는 이 몇 가지 상대축의 긴장과 화해 과정에서 생성되고 전개된다는 점에서 항상 미완의 긴장 또는 진행형의 시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며, 또 이것이 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은 그에 있어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고 역으로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의 시가 유행적인 선동 선전시나 관념적인 정신주의적 성향을 지니지도 않기에 그의 시는 도리어 번쩍 눈에 띄거나 크게 주목받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오늘의 현대시가 함께 극복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의 중심축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진지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근자에 집중적으로 보이고 있는 단시도 그 가능성을 열어가는 한 시금석이 될 것이 분명하다. ‘역사성과 서정성의 균형잡힌 아름다움’, 김재홍, <한국대표시인선 50>, 중앙일보사, 1996 (……) 이시영의 모든 작품들은 한결같이 내용의 절실함과 고도의 시적 기교가 잘 조화되는 묘미를 갖추고 있다. 어떤 평범한 사물도, 그의 맑고 깊은 렌즈를 통해 나오면 전혀 새로운 얼굴이 되며,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경이를 제공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때묻지 않은 감각에 잘 훈련되었다는 입증도 되고, 나아가서는 사물을 보는 그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집단의 한가운데서 시작됨을 알리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가령 무엇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고 할 경우에도 그는 개인의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해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그의 시를 읽어 가면서 느끼는 우리의 놀라움이란, 곧 그의 폭넓은 체험과 무한한 상상력에서 비롯되며, 그것들을 철저히 시적으로 요리할 줄 아는 그의 현명한 능력에서 긴 여운을 남긴다. 그는 그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지나쳐 버려도 좋을 기억들을, 가치의 차원에서 환치시키는 고도의 기능공이다. 그에게서는 일견 단순하고 평범한 농촌풍경도, 그 내부의 모순이나 밑바닥을 응시함으로써 하나의 역사적 풍경이 된다.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자기와 비슷한 삶을 영위해 온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과 깊게 관련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가장 가까운 이웃들이 피흘리고, 미치광이가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아픔을 말하는가 하면, 아편과 노름과 버림받은 게으름이 개인을 뛰어넘는 역사적 의미로 조명되기도 한다. 시인이 포괄하는 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다음에 오는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그 맥락이 이어진다. “주먹 같은 뜬눈으로 누워 사는 친구” 곁에 자신도 눕고 싶고, “가을 찬 비 속으로 길 떠난 벗들”을 따라 저도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끝내는 “야음을 틈타 시 한편을 써”보는 미미하고 허약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특정한 한 시대의, 힘없고 외로우나 끝내 선량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 최근 보이고 있는 이시영의 목소리는 모두 이렇게 무엇에 대한 그리움이나 기다림에 바쳐지고 있다. 아무래도 아직은 손 닿을 수 없는, 그래서 더욱 간절한 열망의 편린들로 번득이고 있다. 때로는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유로, 때로는 끝내 타협할 수 없는 세속과 비인간화에 대한 저항으로. 이것은 그의 시를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약속의 내용이 될 것이다. 그는 우리의 시대가 요구하는 시인의 한 골격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발문’, 이성부,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작가의 말
그동안 여기저기 발표했던 작품 중에서 고르고 미발표작 중에서 또 몇 편을 골라 발표연대와 역순으로 실었다. 내 딴에는 열심히 쓴다고 써왔던 것 같은데 묶어놓고 보니 허전하기 짝이 없다. 좀 고쳐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일그러져 있는 얼굴에 얄팍한 분칠을 하는 짓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정말, 좋은 시를 쓰고 싶다. 그것이 나의 꾸밈없는 노래이면서 우리들의 진정한 노래로 불려질 수 있는 시를. 허나 나의 인간수업이 아직 멀었고 나의 시 또한 참다운 우리들의 노래에 이르기에는 아득하고 아득할 뿐이다. 설익은 관념의 토로가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는가 하면, 낯뜨거운 말재주들이 곳곳에 버티고 있고, 가슴에 이르지 못한 분노들이 다스려지지 않은 채 튀어나오기도 했다. 이 모두가 우리들의 절실한 체험에서 유리되어 있다는 점에서나, 한 편의 시로서 형상화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나 나의 시는 아직도 실천의 뿌리를 내릴 만한 든든한 실체를 못 찾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실체가 없는 소리들은 공중에서 떠돌며 저 홀로의 괴로움에나 깊고 깊을 것이다. 허나 시인이 어디 하루 아침에 똥 누다가 이루어지랴! 지난 몇 해 동안 불안스레 두리번거리며 걸어왔던 시간을 교훈삼아 저 매서운 바람, 귓볼을 때리는 겨울 혹독한 거리로 나서야지. 그리하여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더불어 넉넉한 가슴으로 기다려야지. 어려운 시절, 여러 가지 말 못할 사정 속에서도 미미한 나에게까지 첫 시집을 마련케 해준 창작과비평사의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이 조그마한 책이, 지금도 추운 곳에서 고생하고 있을 벗들에게 진 다함 없는 빚의 몇십분의 일이나마 갚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후기’, 이시영,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그동안 여기저기 발표했던 작품 중에서 고르고 미발표작 중에서 또 몇 편을 골라 발표연대와 역순으로 실었다. 내 딴에는 열심히 쓴다고 써왔던 것 같은데 묶어놓고 보니 허전하기 짝이 없다. 좀 고쳐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일그러져 있는 얼굴에 얄팍한 분칠을 하는 짓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정말, 좋은 시를 쓰고 싶다. 그것이 나의 꾸밈없는 노래이면서 우리들의 진정한 노래로 불려질 수 있는 시를. 허나 나의 인간수업이 아직 멀었고 나의 시 또한 참다운 우리들의 노래에 이르기에는 아득하고 아득할 뿐이다. 설익은 관념의 토로가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는가 하면, 낯뜨거운 말재주들이 곳곳에 버티고 있고, 가슴에 이르지 못한 분노들이 다스려지지 않은 채 튀어나오기도 했다. 이 모두가 우리들의 절실한 체험에서 유리되어 있다는 점에서나, 한 편의 시로서 형상화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나 나의 시는 아직도 실천의 뿌리를 내릴 만한 든든한 실체를 못 찾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실체가 없는 소리들은 공중에서 떠돌며 저 홀로의 괴로움에나 깊고 깊을 것이다. 허나 시인이 어디 하루 아침에 똥 누다가 이루어지랴! 지난 몇 해 동안 불안스레 두리번거리며 걸어왔던 시간을 교훈삼아 저 매서운 바람, 귓볼을 때리는 겨울 혹독한 거리로 나서야지. 그리하여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과 더불어 넉넉한 가슴으로 기다려야지. 어려운 시절, 여러 가지 말 못할 사정 속에서도 미미한 나에게까지 첫 시집을 마련케 해준 창작과비평사의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 이 조그마한 책이, 지금도 추운 곳에서 고생하고 있을 벗들에게 진 다함 없는 빚의 몇십분의 일이나마 갚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 ‘후기’, 이시영,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고향에 가면 꼭 걷고 싶은 길이 있다. 내가 나의 시 ‘마음의 고향 4- 가지 않은 길’에서 묘사한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이 남아 있을까/ 중학1학년,/ 새벽밥 일찍 먹고 한 손엔 책가방, 한 손엔 영어단어장 들고/ 가름젱이 콩밭 사잇길로 사잇길로 시오리를 가로질러/ 읍내 중학교 운동장에 도착하면/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 해에/ 함뿍 젖은 아랫도리가 모락모락 흰 김을 뿜으며 반짝이던,/ 간혹 거기까지 잘못 따라온 콩밭 이슬 머금은/ 작은 청개구리가 영롱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팔짝 튀어 달아나던,/ 내 생에 그런 기쁜 길을 다시 한번 걸을 수 있을까.’에서의 ‘가름젱이 콩밭 사잇길’이다. 마을 서쪽 외침이 쪽으로 가다가 방아다리를 지나 웃냇가 가는 길을 버리고 보(洑)를 지나 아랫냇가를 훌쩍 건너 약간의 경사진 언덕(등짐을 진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지게를 받쳐놓고 쉬었다)을 오르면 그곳이다. 여름이면 다래를 머금은 목화밭이 길게 펼쳐져 있고 가을이면 키 큰 수수들이 바람에 서걱이는 곳. 화엄사 계곡에서 흘러온 냇물이 곧잘 언덕을 들이받아 벌겋게 황토가 드러난 곳. 나는 밭 매는 어머니를 따라가 그 아랫냇가에서 송사리를 잡으며 놀았고 해 저물면 송아지를 거느린 일소들이 ‘핑경(풍경의 전라도 사투리)’을 딸랑이며 돌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 고향에 가보니 아래냇가, 웃냇가는 물론 그 ‘가름젱이’(다른 이름으로 가는정(細音坪)으로 불리기도 함.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참조)마저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대신 반듯반듯하게 경지 정리된 논들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으며 아랫냇가 징검다리가 놓였을 법한 자리엔 거대한 송전탑이, 그리고 그 옆으론 사도리 갑문(閘門)이 서 있었다. 갑문 아래로 수로 같은 것이 놓여져 있었는데 흐르는 물인지 고여 있는 물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억새 우거진 그 속에 백로들이 돌아와 살고 있었다는 것. 나는 그 새들이 돌아온 조상들의 넋인 양 반가웠다. 나는 아무도 걷지 않는 볼품 없는 긴 둑길을 걸어 화엄사 입구까지 가보았다. 거기에 비로소 흐름을 멈춘 계곡이 남겨져 있었다. 이로써 나는 화엄사에서 출발하여 황전리 계곡, 중마리, 가랑리 그리고 광평리를 지나 사도리 앞 들을 가로지르며 옥이교(玉只橋)에서 한번 숨결을 모았다가 용두리에서 다급히 터뜨리며 섬진강에 합류하던 긴 내 하나를 지도상에서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가는정’ 혹은 ‘가름젱이’라는 아름다운 지명(地名) 하나도. 아, 그러나 눈 감으면 지금도 보인다. 들의 이쪽과 저쪽을 가르며 때로는 큰 바위를 타 넘으며 콸콸거리고 때로는 잔잔하게 굽이돌며 푸른 소를 만들고 때로는 자갈돌 위를 요란하게 소리내며 흐르던 내. 큰 비가 와 계곡물이 불어나면 학교 수업을 일찍 파하고 나와 동네에서 온 장정들의 등에 업혀 간신히 건너던 내. (……) 나는 나와 함께 아무것도 공유할 게 없는 관광지 화엄사 계곡에 쭈그리고 앉아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어디 가서 잃어버린 소년들의 함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아니 어디 가서 들판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흐르던 장일천을 되찾을 수 있단 말인가. 훗날 나는 그곳을 이렇게 한번 더 노래한 적이 있다. (……) 멀리 마을에 저녁 연기 오르는 것도 반갑지 않았다. 들은 완벽한 빈 들. 마을은 노란 초가지붕들로 새로 단장했건만 누나들과 형님들의 가출이 시작되는 건 이 무렵이었다. 저녁이면 구례구역 낮은 측백나무 울타리 가에 옷보따리를 안은 흰 저고리 검은 치마의 누나들이, 그리고 어색한 양복 차림의 형님들이 득시글거렸다. 쉽게 얘기하면 ‘도시바람’이 난 것이고 좀 다르게 표현하면 젊은 농촌 인구의 이농이 막 시작된 것이었다. 내 시 속의 ‘정님이’나 ‘후꾸도’도 다 그렇게 고향을 떴다. 그리고 우리의 농촌 공동체는 1970년대 초엽부터 급격히 붕괴되고 만다. 하여간 들은 완벽한 빈 들. 서리라도 내리면 더욱 쓸쓸했다. 그리고 눈 속에 파묻힌 신작로를 걷는 일이란 또 얼마나 팍팍했던가. 지용의 시에 그런 구절이 있다.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이 시의 정서는 오래 전에 이미 고향을 떠나 근대의 수많은 항구를 거쳐온 자의 그것이지만, 하여튼 중3짜리 나의 마음도 ‘제 고향 지니지 않고’ 이미 ‘머언 항구로 떠도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마음, 고향과 갈라서고 싶은 마음에서 근대의 시가 싹트는 것이 아닌가. 고향과 도회가 충돌하고 신작로와 소롯길이 갈리고 옛 시간과 새 시간이 부딪히는 곳으로부터. 생각해보면 나의 시는 너무 오래 고향의 질곡에 묶여 왔다. 근대의 세련이 너무 부족한 것이다. 시인은 어쩌면, 늘 머언 항구로 떠도는 사람이다. 머무는 곳은 질곡! 다시 한번 중3짜리 소년이 되어 신작로를 걷고 싶다. 아니 그 길을 아예 버리고 시끄러운 도회로 나가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다시 기차를 타야 되리라. 전라선 구례구역에서, 이제는 근대의 수많은 항구를 경험한 성숙한 시민이 되어.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이시영, <한국일보>, 2003. 5. 15
관련도서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한국대표시인선 50>, 중앙일보사, 1996 <만월>, 이시영, 창작과비평사,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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