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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촌요(耽津村謠)

작품명
탐진촌요(耽津村謠)
저자
정약용(丁若鏞)
장르
한시
작품소개
<탐진농가(耽津農家)>·<탐진어가(耽津漁歌)>와 더불어 3부작(三部作)을 이루고 있는 <탐진촌요(耽津村謠)>는 모두 15수(<여유당전서>의 시제(詩題)에는 20수로 되어 있으나 실제 15수만 수록되어 있음)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시집 권4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 농촌의 모습과 농민 생활의 고초를 묘사함으로써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본관 나주(羅州). 자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 귀농(歸農). 호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자하도인(紫霞道人)·탁옹(籜翁)·태수(苔叟)·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시호 문도(文度). 근기(近畿)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사환(仕宦)했으나,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 등 모두 5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1776년(정조 즉위) 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 보고 그 학문에 감동되었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經義進土)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고, 1784년 이벽(李蘗)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천주교 교인이라 하여 같은 남인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을 받고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水原城)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徐龍輔)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周文謨)사건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副司直)을 맡고 17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다시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 신유교난(辛酉敎難) 때 장기(長鬐)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그곳 다산(茶山) 기슭에 있는 윤박(尹博)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柳馨遠)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朴趾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北學派)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시재(詩才)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으며,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융희 4) 규장각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1959년 정다산기념사업회에 의해 마현(馬峴) 묘전(墓前)에 비가 건립되었다. 저서에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가 있고, 그 속에 <목민심서(牧民心書)>·<경세유표(經世遺表)>·<흠흠신서(欽欽新書)>·<마과회통(麻科會通)>·<모시강의(毛詩講義)>·<매씨서평(梅氏書平)>·<상서고훈(尙書古訓)>·<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상례사전(喪禮四箋)>·<사례가식(四禮家式)>·<악서고존(樂書孤存)>·<주역심전(周易心箋)>·<역학제언(易學諸言)>·<춘추고징(春秋考徵)>·<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맹자요의(孟子要義)> 등이 실려 있다.
국문풀이
누리령 잿마루에 바위가 우뚝한데 길손이 눈물 뿌려 사시사철 젖어 있다 월남을 향하여 월출산을 보지 마소 봉마다 모두가 도봉산 모양이라네 동백나무 잎들은 얼어도 무성하고 눈 속에 꽃이 피면 붉기가 학 이마 같아 갑인년 어느 날에 소금비가 내린 후로 유하나무 감귤나무도 모두 말라 없어졌다네 바닷가 왕대나무 키가 커서 백 자러니 지금은 낚싯배 상앗대로도 못 쓴다네 정원지기가 날마다 새 대를 가꾸어서 죽력 내내 권문세가에 바치기 때문이야 성벽은 다 무너져 언덕받이 설렁한데 해가 지면 징소리만 주춧돌을 울린다네 여러 섬에 나무들을 해마다 베어만 내지 청조루를 중건하는 사람은 통 없다네 무논에 바람 불면 보리물결 장관이고 보리타작 할 무렵에 모를 게다 꽂는다 배추는 눈 속에서 새로 잎이 파랗고 병아리는 섣달에 솜털이 노랗다네 석제원 북쪽에는 갈림길이 하 많아서 예부터 낭자들이 이별하는 곳이라네 한도 많은 문 앞의 수양버들 나무들은 그통에 다 꺾이고 남은 가지 몇 개 없어 눈처럼 새하얀 새로 짜낸 무명베를 이방에 낼 돈이라고 졸개가 와 뺏는구나 누전의 조세를 성화같이 독촉하여 삼월하고 중순이면 세 실은 배를 띄운다네 완주의 황옻칠은 맑기가 유리 같아 그 나무가 진기한 것 천하가 다 알고 있지 작년에 성상께서 세액을 견감했더니 봄바람에 밑둥에서 가지가 또 났다네 오만족 총각인지 머리털은 더부룩한데 써내는 글씨 보니 중국 문자 아니로세 자바섬이 아니면 루손섬에서 왔으렸다 장미빛 옥합에서 야릇한 향내 풍기네 백련사 누대 앞에 둥그렇게 비친 물결 봄이면 눈 같은 조수 문중방까지 오른다네 유명한 절 다해봐야 두륜사가 으뜸이지 서산대사 공적 기린 어제비가 있으니까 시골 애들 습자법이 어찌 그리 엉망인지 점획과파 모두가 낱낱이 비뚤어져 글씨방이 옛날에 신지도에 열려 있어 아전들 모두가 이광사에게 배웠었는데 가시밭길 어느 때나 앞길이 트일는지 누른 띠밭 참대나무 주릿대 비슷하네 형방의 아전들이 소란 떠는 것이 서울에서 누가 또 귀양을 왔군그래 삼월이면 송지에 말시장이 열리는데 오백 푼만 집어주면 천재마를 고르게 되지 흰말총 체라던지 검은말총 갓이랑은 그 모두가 한라산 목장에서 온 거라오 전복이야 옛날부터 점대에서도 즐겼지만 동백기름이 창자 훑어낸다는 것 헛말이 아니로세 성 안의 아전들 들창문 안에는 규장각 학사들의 서찰이 다 꽂혔네 도독 영문 둔 지가 이백 년이 되었는데 부두에는 왜놈 배를 다시 매지 못했었지 진린의 사당 속엔 봄풀이 우북한데 아낙들이 돌을 던져 아들 점지해 달란다네
어휘풀이
- 청조루: 강진현(康津縣) 객관(客館) 남쪽에 위치한 누대. 현감(縣監) 오순종(吳舜從)이 건립한 것이라고 함. - 누전(漏田): 토지 대장에서 누락된 전토. - 오만족: 중국 사천성(四川省) 남부, 운남성(雲南省) 동북부 등지에 흩어져 사는 종족들. - 점획과파: 습자(習字)하는 기본법. 즉 점찍고, 건너긋고, 삐치고, 파임하는 것이다. - 글씨방이……있어: 영조(英祖) 연간의 서예가요 양명학(陽明學)에 밝았던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나주(羅州)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처음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었는데, 그의 문필을 좋아하는 많은 선비가 모여들자 그를 다시 진도(珍島)로 이배하였다. 이광사는 그 배소에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 후학 지도에 몰두하였다. - 주릿대: 형구(刑具)의 일종. 원래 주뢰(周牢)인데 여기서는 글자를 바꾸고 음만 취하여 주뢰(珠雷)로 표기한 듯함. - 점대: 대(臺) 이름. 한(漢) 나라 때 미앙궁(未央宮) 서쪽에 있었는데, 송(宋)의 소식(蘇軾)이 쓴 <복어행(鰒魚行)>에, “점대에 사람 없고 긴 활만 쏘던 시절, 처음에는 사람들이 복어 먹을 줄 몰랐다네(漸臺人散長弓射 初噉鰒魚人未識)……” 하였음. - 진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우리나라에 파견되었던 명(明)의 수군 제독.
해설
<탐진촌요>의 배경이 되는 탐진(耽津)은 지금의 전남 강진으로,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이다. 정약용은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시절 보게 된 농촌의 모습과 농민 생활의 고초를 <탐진촌요>·<탐진농가(耽津農家)>·<탐진어가(耽津漁歌)>에 그려내었다. 이 작품에서는 탐진의 경관과 농민들의 생활모습뿐만 아니라 당시 제주도에 표류한 외국인에 대한 풍문(제9수), 누군가 귀양 와서 소란 떠는 아전들의 모습(제12수)까지 다양한 모습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중심이 되는 것은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눈물겨운 삶의 모습이다. 권문세가에 바치기 때문에 키가 백자나 되는 왕대나무가 있다 할지라도 낚싯배의 상앗대로도 못 쓰는 현실(제3수), 피땀 흘려 짜낸 무명을 이방의 졸개들이 뺏어가고, 성화같은 세금 독촉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삶(제7수)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이 다가온다. 당시 강진의 여러 모습을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주창한 조선시(朝鮮詩) 정신이 실천적으로 구현된 것이라 하겠다. 특히 제7수는 붕괴해 가는 봉건체제에서 비롯되는 실정(失政)과 탐관혹리(貪官酷吏)의 횡포로 고통을 겪는 농어촌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촌민들이 애써 무명베를 바래어 희고 곱게 만들어 놓자마자 졸개들이 이방에 낼 돈이라고 빼앗아 간다. 물론 정당한 값을 쳐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협잡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재해 입은 전토(田土)라고 거짓 보고하여, 관청의 장부에는 세금을 면제시켜 놓고는 이를 착복하기 위하여 독촉이 성화같다. 이 시는 곧 당시의 부패한 정치 현실을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정약용의 한시(漢詩) 가운데는 관리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농민들의 고달픈 삶을 노래한 것들이 많이 있다. 이는 객관적인 묘사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이런 작품을 통해 당시의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고발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을 촉구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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