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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쥐(野鼠)

작품명
들쥐(野鼠)
제작
조선키네마사
감독
나운규
장르구분
1919년~1934년
출연/스태프
*출연 나운규, 신일선, 주삼손, 윤봉춘, 주인규, 이금룡 *스태프 제작/전(일본), 기획/진수(일본), 감독,각본/나운규, 촬영/이창용, 편집/나운규
내용
어떤 남녀가 서로 사랑하여 결혼을 하기로 맹세를 했다. 그런데 한 부자가 애인이 있는 처녀를 데려가려고 하였다. 이 돈 많고 욕심 많은 부호의 폭력과 금력으로 남자는 연인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그 부자는 그 처녀와 강제로 결혼식을 올린다. 이때 ‘들쥐’라고 불리는 패거리가 이 결혼식장에 나타나 부자를 한주먹에 물리쳐 버리고 처녀를 다시 찾아 그의 연인에게 돌려보낸다.
예술가(감독)
*나운규(1902~1937) 나운규의 호는 춘사(春史)였고 일본 식민지시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감독이자 배우였다. 그의 대표작은 데뷔작인 <아리랑>(1926)이다. 현재 남아 있지 않은 이 영화는 일제시대 조선영화의 대표작이며 일본의 압제에 은유적으로 대항한 민족영화의 표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1924년 안종화의 추천으로 윤백남 프로덕션에 입사하여 <운영전>(윤백남 감독,1925) 등에 단역 및 조연으로 출연한 후 감독이 되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벙어리 삼룡>(1930)을 만들 때까지를 전기로 볼 수 있고, 이후 <오몽녀>(1937)를 마지막 작품으로 남긴 기간을 후기로 잡을 수 있다. 전기는 몇 가지 경향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민족적 울분과 저항의식이 짙게 깔린 <아리랑>(1926), <사랑을 찾아서>(1928), 엽기적 통속성과 권선징악적 주제가 담긴 <풍운아>(1926), <들쥐>(1927), <사나이>(1928), 치정관계를 통한 신파성이 강한 작품 <금붕어>(1927), <잘 있거라>(1927), <옥녀>(1928)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후기 작품은 주연과 각본만 맡은 <아리랑 그 이후>(1930), 연출까지 맡은 <아리랑 3편>(1936) 등 이전의 영예를 만회하려고 애쓴 작품, 사람들의 비난을 받은 유치한 활극인 <철인들>(1930), <한>(1931), <남편은 경비대로>(1931,출연) 등이 있는가 하면 말기에 가서는 인간의 욕구를 어둡게 다룬 <오몽녀>(1937) 등이 있다. 그의 대표작은 <아리랑>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 영진은 시대를 고민하다가 광인이 된 인물로 자신의 집 식구를 괴롭히는 지주의 마름을 낫으로 찔러 죽이고 아리랑 노래를 부르면서 잡혀간다는 것이다. 1919년 3·1 독립운동 시절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22년을 전후로 함경북도 청진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던 것이 이런 작품을 내놓게 된 직접적인 동기라 짐작되고 있다. 이 작품의 의미와 작품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지금 시나리오 형태로 남아 있는 작품으로 추리한다면 이 작품의 가치는 조선 최초로 독자적인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신파 번안이나 전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던 당시에 아리랑이라는 민중의 염원을 담은 민요를 당시 상황을 토대로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은, 이 작품이 민족적이고 일제에 저항적이었다는 맥락에서보다는, 한국 영화인들이 최초로 영화 속에서 자신의 서사를 구축했다는 맥락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후 카프 영화인들을 비롯한 사회적 주제를 다룬 한국 영화들에 이 영화는 계속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작품정보
아리랑 (1926) 풍운아 (1926) 들쥐 (1927) 금붕어 (1927) 잘 있거라 (1927) 옥녀 (1928) 사랑을 찾아서(두만강을 찾아서) (1928) 벙어리 삼룡 (1929) 철인도 (1930) 금강한 (1931) 개화당 이문 (1932) 암굴왕 (1932) 무화과 (1935) 강건너 마을 (1935) 그림자 (1935) 아리랑 (3편) (1936) 칠번통소사건 (1936) 오몽녀 (1937)
리뷰
*작품해설 남우 윤봉춘의 데뷔작으로 ‘들쥐’라고 불리우는 방랑자들이 포악한 부자를 골탕 먹이고 빼앗긴 애인을 찾게 해준다는 내용의 액션물이다. 감독 나운규는 당시 각본과 감독의 명의를 자기의 이름으로 내지않고 일본인 쓰모리에게 한국식 이름인 김창선을 지어주고 발표하게 하는데, 그것은 일본 관헌의 검열제를 피하기 위한 나운규의 지략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들쥐>는 일제와 식민지 조선의 관계를 암시한다는 작품으로 인정되어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전편 상영금지처분을 받게 된 작품이다. *평론 후일에 가서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당시에도 영화에 대한 일본 관헌(官憲)의 검열제가 철저히 시행되고 있었으니 조금치라도 민족적인 색채가 보이는 작품은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민족적인 색채가 농후하다느니 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인에 대한 반항과 울분으로 시종된 <아리랑>이 세상의 햇빛을 보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래서 운규는 여러 가지로 궁리한 끝에 쓰모리를 이용한 것이니 일본사람 명의로 발표하면 감쪽같이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랑>에 나오는 주인공인 영진이 일본관원을 때려눕히는 통쾌한 장면은 영진을 정신 이상자로 만들었으므로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도 하겠지만 전체적으로야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운규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한 쓰모리는 그저 제 이름으로 발표해 준다는 바람에 좋아서 승낙을 했던 것이다.(<주간조선>, 정군재(정영일), 1987년 9월 6일자)
연계정보
-아리랑
-풍운아
-사랑을 찾아서
-임자 없는 나룻배
-오몽녀
관련사이트
한국영상자료원_ 종합영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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