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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유교건축의 개요

작품명
전통유교건축의 개요
장르구분
유교건축
문묘와 향교
문묘는 문선왕묘라고도 부르기도 하며 문묘의 중심 건물은 대성전이다. 대성전은 공자 및 네 제자의 신위를 모신 건물 이름이며, 유교의 이름난 학자들의 신위도 모셨다. 대성전 앞 동쪽 건물인 동무(東廡)에 중국의 학자들, 서쪽인 서무(西廡)에 신라 이래 조선의 학자 신위가 모셔진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네모 반듯한 울타리를 두르고 남쪽 한가운데 출입문을 낸다. 대성전에는 특별한 장식도 하지 않고 화려한 단청도 거의 칠하지 않으며, 건물에 정연한 질서를 세우고 단정 검박한 조형미를 갖추는데 그친다. 이 제사 지내는 건물군과는 별도로 학생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건물군이 자리잡는데 중심은 강당인 명륜당이다. 그 앞 좌우에 동재(東齋)ㆍ서재(西齋)라고 해서 역시 대칭으로 긴 기숙사 건물이 세워진다. 명륜당에도 네모 반듯한 울타리가 생기면서 역시 질서 정연한 대칭구성을 하게 된다. 전국의 문묘 중에 으뜸은 서울문묘인데, 이는 교육기관을 함께 갖추고 있어 성균관이라고 불렀다. 네모 반듯한 울타리로 둘러싸인 대성전 일곽이 앞에 있고 그 바로 뒤에 직선축 사이에 명륜당 일곽이 놓여 있다. 주변에는 서적을 보관하는 건물이나 문묘의 제사를 집행하기 위한 여러 부속 건물들이 마련되어 하나의 큰 건물군을 이루지만 중심부에서는 직선축을 살리고 좌우 대칭구성을 하여 전체적으로 엄격한 질서를 잡은 모습이다. 지방 도시에서 문묘는 제사와 아울러 유교의 교육기능을 겸하는 향교가 세워졌다. 지방에서도 향교의 건물구성은 서울의 문묘를 본받아 그 축소 복사판으로 건립되었다. 제사를 지내는 건물로 대성전과 동·서무가 하나의 울타리 안에 들어서고 교육을 위한 명륜당과 동·서재가 따로 별도의 울타리 안에 자리잡게 되고 그 외곽에는 건물을 관리하는 관리사나 제사를 준비하는 준사청 등이 마련되는 것이다. 지방마다의 특색을 가미한 부분이라면 대성전과 명륜당의 위치를 서로 바꾸는 경우를 볼 수 있고 간혹 경관을 즐길 수 있는 누각을 정문 상부에 또는 별도의 자리에 마련하는 정도다. 향교 역시 엄격한 대칭과 질서를 조형의 근본으로 하였다. 배치방식을 보면 제사지내는 대성전 일곽이 앞에 놓이고 명륜당을 둘러싼 공간이 뒤에 놓이는 소위 전묘후학(前廟後學) 형식, 또는 그 반대인 전학후묘 즉 명륜당이 앞에 놓이고 대성전이 뒤에 놓이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간혹 이들이 좌우로 나란히 놓이는 경우도 있다. 대개 향교가 일찍 건립된 것으로 믿어지는 개성이나 경주, 전주 등 큰 도시에서 제사지내는 공간이 강당 공간보다 앞에 놓이는 형식이 많이 보인다. 처음에는 이런 전묘후학의 형식이 먼저 자리잡다가 나중에 가면서 그 반대로 제사공간을 뒤로 하고 교육시설을 앞에 두는 전학후묘형식으로 변해 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조선시대에는 향교의 건축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공자의 모습을 새긴 상(像)을 세우지 않고 단지 나무에 신위를 지칭하는 위패만을 모시도록 한데 있다. 고려 때에는 간혹 향교에 흙으로 빚은 공자상을 모셨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조오례의’가 정해지면서 제례를 위해서는 자그마한 나무토막에 신위를 글로 적은 위패(位牌)만을 모시도록 규정하고 상을 만들지 않도록 정하였다. 조선시대 사묘 건물에 상을 모시지 않고 단지 위패만을 세우게 됨에 따라 건물 자체는 더 간소하고 절제된 표현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유교 자체가 화려한 치장을 기피하는 경향을 가진데다가 예배 대상을 단지 위패만으로 한정함에 따라 유교 관련 건축 자체의 표현에서도 절제와 간소가 더 강조되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전주향교, 경주향교, 나주향교, 강릉향교 등이 우수한 건물군을 이루고 있으며 전주향교 대성전은 사당 건물이 갖추어야 할 엄격하고 질서있는 외관을 잘 보여주며 경주향교 등은 향교 전체의 단순하면서도 질서있는 공간구성이 돋보인다. 강릉 향교는 9칸의 장대한 누각이 일품인데 이처럼 향교에 장대한 누각을 갖추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서원
조선시대 서원의 출발은 1543년(중종 38) 풍기의 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그 곳에 백운동 서원을 창설하면서라고 한다. 이후 서원에 대한 나라의 사액도 증가되어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거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선현에 대한 제사와 후진에 대한 교육을 통해서 향촌사회에서 사림세력의 거점으로 자리한 서원은 유교의 가르침에 입각한 엄격한 질서와 검소하고 질박한 조형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면서도 성리학적 자연관과 향촌 지배층으로서의 위세를 나타내는 건축표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서원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은 사당과 강단이며, 이 밖에 학생들의 숙소인 재사 및 서책이나 목판 등을 보관하는 서고가 딸리고 건물을 관리하는 고직사 외에 사림들이 집회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누각을 갖추는 것이 보통이다. 서원내 건물들은 대개 일정한 배치상의 원칙을 갖고 있었다. 문이나 누각, 강당, 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사당을 제일 뒤편 전체 건물배치가 정연한 질서를 갖추고 뚜렷한 위계를 이루도록 한다. 이것은 서원이 바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예를 실천하는 장소임을 분명히 하려는 결과이다. 이런 원칙을 기본으로 하면서 각기 조성되는 여건이나 주변 지형조건에 따라 적절한 변화를 준다. 강당이나 사당을 일직선상에 두지 않고 축에 변화를 둔다거나 전체 건물군이 절점이 될만한 위치에 높은 누각을 세워 공간구성에 변화를 주고 주변 자연경치를 서원 내에 끌어들이기도 한다. 서원에 지어지는 개개 건물들은 특별히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거나 화려한 치장을 나타내지 않는다. 사당은 네모 반듯한 평면에 간결한 구조와 외관을 하고 있고 강당은 우뚝하게 높은 기단 위에 탁 트인 개방된 대청마루를 중심에 두고 단정하게 지어진다. 개개 건물의 간결함이 일정한 원칙 아래 정연하게 모이면서 서원의 전체적인 건축공간에 질서와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런 점에서 서원은 향교와 기능적으로나 공간구성의 원칙에서 상당히 공통된다. 사당과 강당을 건물구성의 기본으로 삼아 선현에 대한 제례를 통하여 예를 행하고 또 학문을 익히고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점에서 향교나 서원이 모두 공통된다. 그러나 향교에서 보기 어려운 서원의 건축적 특징은 따로 있다. 그것은 향교가 읍치 변두리의 특색없는 지형 속에 획일적이고 단조롭게 조성되는데 반해서 서원은 제각기의 다양한 지형조건 속에서 주변 자연지세를 최대한 건축적으로 활용하는 점이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이상향으로 삼고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구현하고자 한 16세기 선비들의 자연관이 서원에서 유연하게 또 때로는 감동적으로 표현되다. 서원은 19세기 말에 흥선대원군의 철폐령에 의해 대부분이 철거되었지만 16세기 또는 17세기 초반에 창건된 서원 중 일부는 지금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 경주의 옥산서원과 서악서원, 산청의 남계서원등은 비교적 서원의 정형을 잘 남기고 있으며 안동의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은 주변의 자연 조건을 적절히 건축에 끌어들인 점이 주목된다. 이 밖에 도동서원 역시 낙동강의 강물이 길게 굽어지는 모서리 언덕 위에 자리잡고 누각을 우뚝 세워 주변 자연 경관을 효과적으로 건축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고 강당의 기단은 여러 색깔의 작은 돌들이 모자이크를 이루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며 석재 중에는 불교 사찰에서 쓰이던 주배들이 섞여 있는데 이는 조선조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본래 숙수사라는 절터였던 것처럼 도동서원도 원래 불교사찰이 있던 자리에 나중에 서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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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병산서원필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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