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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향교 대성전(長水鄕校 大成殿)

작품명
장수향교 대성전(長水鄕校 大成殿)
소재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 교동 254-1
지정종목
보물 제272호
장르구분
유교건축
개요
장수터미널에서 천변도로를 따라가다 군청 광장을 지나 동촌마을을 가다보면 좌측으로 장수향교가 위치하고 있다. 1407년(태종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장수면 선창리에 창건하였다. 1686년(숙종 12)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877년(고종 14)에 현감 홍우정(洪佑鼎)이 중수하였으며, 1935년에 중수하고 1970년, 1973년, 1975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이 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이 향교의 특징은 원노(院奴)인 정충복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부장 안코쿠시(安國寺惠瓊)가 장수에 침입하였을 때, 원노인 정경손(丁敬孫)이 교복을 입고 문묘 앞에 꿇어앉아 경서를 외우며 말하기를, ‘만약 향교에 들어오려거든 먼저 내 목을 베고 들라’고 하였다. 이에 왜군들도 그의 기개에 감복하여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이라는 쪽지를 주고 물러가 왜군 후속부대의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를 비롯한 열읍의 향교가 거의 소실되었으나 오직 장수향교만 전화를 입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정경손의 공로였다. 그리하여 후인들이 그의 의행(義行)을 기리기 위하여 향교 문전에 의거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 비는 장수의 삼절(三絶)로 이름나 있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교동 마을의 한가운데 향교가 위치하고 있는데 거의 경사가 없는 평지에 전학후묘(前學後廟)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 안쪽으로 외삼문인 부강문(扶綱門)이 있고 그 동쪽에는 새로 건립한 유림회관과 임진왜란때 향교를 지킨 충복(忠僕) 정경손(鄭敬孫)의 비각이 서 있다. 외삼문 안쪽으로는 명륜당이 전면에 위치하였고 그 안쪽으로 동서재인 진덕재(進德齋), 경성재(敬誠齋)가 날개처럼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어서 강학공간(講學空間)을 이루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집인데 서쪽 부분에는 초석 대신 짧은 누하주(樓下柱)가 세워졌고 그 위에 귀틀이 짜여져 있어서 원래 중층 건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서재 뒷쪽으로는 사마재(司馬齋)가 있어 또다른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강학공간 뒤쪽에는 내삼문이 있고 안쪽에 대성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 신도가 설치되어 있고 사방에 담장이 있어 존현공간(尊賢空間)을 이루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규모인데 전면에 개방된 퇴칸이 있다. 장대석을 일렬로 놓은 낮은 기단 위에 원형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민흘림 원기둥을 세웠으며 창방을 결구하여 축부(軸部)를 구성하였다. 측면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열된 주심포계(柱心包系) 형식인데 첨차나 제공의 형태는 다포계(多包系) 법식이 혼용되어 있다. 주간에는 화반을 2개씩 두었다. 전면에는 어칸에 세살 2분합문, 좌우 협칸에는 세살 외짝문과 격자살 광창(光窓)을 달아 매우 개방적인 입면 구성을 보이고 있다. 창호와 기둥 사이에는 판벽(板壁)을 설치하였다. 지붕은 맞배 형식이며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갖춘 겹처마이다. 내부에는 공자를 주벽(主壁)으로 하고 그 앞에 사성(四聖)을 모셨으며 좌우 측벽에 중국 송나라의 사현(四賢)과 우리나라 십팔현(十八賢)을 배향하였다. 가구(架構)는 1고주 5량가 구조로 전후면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 대공을 세워 종보(宗樑)와 종도리를 받쳤다. 천장은 연등천장인데 종보 위에는 작은 소란반자(小欄盤子)를 시설하여 특이하다.
도면 및 이미지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전북편>, 건축가협회, 1999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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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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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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