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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문묘 대성전

작품명
강릉문묘 대성전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교2동
지정종목
보물 제214호
장르구분
유교건축
개요
강릉역 뒤쪽에 있는 명륜고등학교의 교정에 강릉향교와 대성전이 있다. 강릉향교는 화부산자락을 뒤로 하고 왼쪽으로는 낮은 구릉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으며, 앞쪽에는 강릉시가 한눈에 보이며, 멀리 남대천이 보이는 시원한 장소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1127년(인종 5)에 향교의 역사가 시작되어 1313년(충선왕 5)에 강릉도 존무사 김승인(存無使 金承印)이 화부산 밑에 문묘를 갖춘 향교를 건립하여 비로소 체계를 갖추었다. 그러나 1411년(태종 11) 화재를 당하여 그 2년 뒤 강릉도호부 판관 이맹상(判官 李孟常)의 발의로 중건되었고, 수차 중수가 있었다. 1909년(순종 융희3)에는 화산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던 중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폐교되고 양잠전습소를 설치한 적도 있었다. 향교는 지방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문묘건축과 함께 건립되었는데, 경국대전에 의하면 대도호부에 90명, 도호부에 70명,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의 학생을 두었다고 한다. 조선중엽 이후에는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시작으로, 많은 서원과 정사(精舍) 및 서당 등의 사학이 건립되어 향교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강릉향교는 이 지역 교육의 중추적 기관으로서의 기능과 유학 실천의 전당으로서의 역할을 끊임없이 수행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향교의 구성은 일반적으로 문묘공간과 강학공간의 배치에 따라 전묘후학(前廟後學), 전학후묘(前學後廟), 그리고 좌묘우학(左廟右學), 좌학우묘(左學右廟)의 병렬형 배치로 분류된다. 이 중 강릉향교는 전학후묘형에 속한다. 이같은 배치는 대부분 경사지에 건립되며 전형적 형식에 따르게 되나, 강릉향교는 향교와 문묘 설립의 근본의미를 살리면서도 주위환경을 잘 이용하여 그만의 독자적인 공간구축에 성공하였다. 강릉 향교의 규모는 서울의 성균관을 제외한 지방 향교로서는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정제(整齊)되어 있는데 중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서무, 회랑, 동서재가 있으며, 이 중 대성전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정면의 기둥 사이를 전부 개방하여 퇴칸(退間)으로 하고 그 주열(柱列)에 고주(高柱)를 배열하여 벽을 치고 그 중 가운데 3칸에는 각각 두짝 빗살문의 출입문이 있다. 측면에는 고주 2개를 세워 종량(宗樑)을 받치게 하고 공포는 기둥머리에 첨차를 하나 끼워 내려서 두공(頭工) 살미를 받도록 하고 그 위에 행공(行工) 첨차를 가로 끼워서 외목도리(外目道里)와 보머리를 받치고 있으며, 기둥머리에 꽂힌 첨차의 형태는 주심포 집의 것이나 다른 것은 변형된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는 판석을 깔고 주위 기단에는 전(塼)을 깔았다. 좌우 측면의 박공(朴工) 머리에 방풍판(防風板)을 달았으나, 원래의 것이 아닌 것 같으며 처마는 홑처마의 맞배 단층집이다. 나주, 장수의 향교와 더불어 3대 향교로 일컬어지며 적절한 외부공간과 건물구성으로 엄숙하면서도 친화력 있고, 절제되었으면서도 여유있는 공간을 창출하고 있는 등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도면 및 이미지
연계정보
관련도서 <전국 건축문화자산 강원편>, 건축가협회, 1999 <한국의 건축문화재 강원편>, 박경립, 기문당, 1999 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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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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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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